강론

*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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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11-10 ㅣ No.97

*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내가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은 내탓만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분명 내탓이다.”


어떤 젊은이에게 받은 메일의 한부분이다. 마음에 와닿는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어진다고 말하고 마치 어두운 터널에 있는 것 같은 답답함과 좌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더해가는 실업란과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정신적 영적 공황은 이들을 더 깊은 좌절의 수렁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경을 뚫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편지의 내용으로 그는 위의 글을 보내왔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바로 나병환자이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는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비참한 인간이하의 천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공동체에 의해 추방당했으며 부락에서 4키로 이상 떨어진 곳에 살아야 했으며 구걸도 금지하였고 나병환자를 보면 사람들은 소리치며 돌을 던졌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지하 굴에서 나병환자들이 모여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어렸을때 나는 그 영화를 통해 나병환자의 모습을 잠시 본 것이 전부이다.

하여간 나병환자는 하느님께 버림받고 인간세계에서 추방당한 공식적인 죄인이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나병과 외로움의 3중고를 통해 서서히 죽어가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러던 그들 열명이 예수님 앞에 나선다. 한명도 아니고 열명! 나병환자 한명만 나타나도 돌세례를 받는 판에 열명씩이나 나타난다. 분명 그들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쩌면 목숨을 건 시도였을지 모른다.

만남의 장소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사이! 사마리아사람과 갈릴래아사람 사이는 바로 갈라지고 왕래가 없는 반목의 관계성을 갖고 있었고 그 사이를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그분은 어느편으로도 가지 않으시고 그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시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오늘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보여주실 화합과 용서와 치유와 믿음을 통한 하나됨의 의미를 당신 여정을 통해 장소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크게 소리쳤다. 늘 사람들에게 멀찍이 떨어지고 분리되어 산 그들 삶의 관성때문일까? 하지만 그 거리를 크게 소리침으로 극복하려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처럼 맑고 또렷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자의 처절한 목소리 가난하고 외로운자의 피끓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과 믿음이 그들을 이곳에 오게 하였을 것이다. 멀찍이라는 말은 이제 그들의 믿음을 통해 살아져야할 마지막 단어의 사용일것이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크게 소리쳤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캐오처럼 반겨주시고 나자로처럼 대해 주실줄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셨다. 어루만져 주실줄 알았던 그분도 나병환자가 두렵고 싫으셨던 것일까? 그 나병환자들은 사제들에게 갔다. 가는 동안 그들은 실망할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제들에게 가서 나병으로 썩어가는 몸을 보이라는 주문만을 하시는 예수님! 당시의 사제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나병이 확인되면 그것은 바로 죄인임을 공적으로 판결받는 절차를 의미하였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공동체와의 격리가 이루어졌다.


야속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간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동안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끝에 다음과 같이 칭찬하신다.

“일어나 가라. 너희 믿음이 너를 살렸다.”


믿음이라는 한자어는 신(信)자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알 듯이 사람 인(人)이 말씀,가르칠,맹세할 언(言)을 붙여 만든 글자이다. 즉 사람이 그 말씀을 따르고 가까이하고 실천할 때 그것을 믿는다고 한다. 만약 두 글자가 떨어진다면 그 글자는 하나의 글자가 아닌 인언(人言) 즉 사람말이 된다. 즉 가르치신 말씀 지시하신 말씀은 지금 실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늘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우리는 미사의 개회식에서 자비송을 바친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죄는 영혼의 때가 아닌 영혼의 나병이다. 하느님 공동체로부터 이죄는 나병처럼 나를 분리시키며 나의 영혼을 죽도록 썩게 만든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전례의 언어들이 성서에 바탕에서 탄생되었으며 성서는 바로 하느님 구원행위의 살아있는 증언이며 실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전례안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 지금 여기서 다시 재현되고 완성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전례와 성서와 삶이 개별적이며 나와는 괴리된 과거의 사건이 아님을 다시한번 인식하게 된다.


미사때 우리 모두는 단순히 미사를 시작하는 마음을 가다듬도 죄를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늘 멀찍이 서서 크게 외치는 나병환자의 처절한 구원을 향한 외침으로 이 자비송을 노래하여야 하겠다.


오늘 자비송을 바치기전에 오늘의 복음 말씀을 하나 더 떠올렸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정말 나도 사제이지만 사제에게 가서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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