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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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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82

 

 

신약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해제

 

 

-김영남,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8a 에페소서, 분도출판사, 1998

 

 

 

1. 수신자 문제

에페소서는 그 첫 구절부터 매우 중요한 본문 비평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는 "에페소에서"라는 수신 공동체가 있는 장소에 관한 문제이다. "에페소에서"(그리스어"엔 에페소")라는 어구가 바오로 서간을 수록하고 있는 수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P46:200년경)와 4세기의 사본인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처럼 신약성서의 본문 비평에서 대단히 중요한 권위를 갖고 있는 고대 사본에 나오지 않으며, 오리게네스, 바실리오, 예로니모 같은 교부들도 이 어구가 들어 있는 사본을 모르고 있다. 본문 비평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어구는 원래의 "에페소서"에 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삽입된 어구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에페소서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서간 자체 내에서는 에페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저자가 과연 에페소 공동체에 편지를 보낸 것이라면 왜 이토록 에페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크게 보아 다음 두 가지 가설이 있다.

 

1.1. "라오디게이아서" 가설

떼르뚤리아누스(Adv. Marc. 5,17)와 그밖의 다른 문헌들에 의하면 마르키온은 "에페소서를" "라오디게이아서"로 취급했다고 한다. 사실, 골로 4,16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가 라오디게이아 교회 앞으로 편지를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에페소서는 본디 라오디게이아 서간이었는데 "나는 네 소행을 알고 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내겠다"라는 요한 묵시록 3,15-16의 말처럼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모습이 불미스러웠기 때문에 "라오디게이아"라는 수신 공동체의 도시 이름을 삭제하고 그 대신 "에페소"라는 이름을 써넣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그 반대 주장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골로 4,16에서 말하는 라오디게이아 서간이 분실되어 전해오지 않자, 수신인 장소가 명기되지 않은 채 전해지던 어느 편지(현재 우리가 "에페소서"라고 부르는 서간)에 "라오디게이아"라는 수신 교회의 도시 이름을 삽입해 넣었으리라는 주장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1.2. "회람서간" 가설

많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에페소서는 처음부터 어느 특정 공동체에 보내졌던 서간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교회들에 보내졌던 일종의 회람서간(回覽書簡)으로서 수신 공동체의 이름을 써놓는 곳이 본래에는 공란으로 비어 있었다. "에페소"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된 이유는 에페소가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가설은 서간 자체 안에 에페소 공동체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왜 없는지도 설명해 준다.

  이 회람서간 가설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가설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대의 편지들 중에서 이런 예(수신자의 난을 공란으로 비워두는 경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신약성서에 나오는 편지들 중에서 수신자가 여러 공동체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여러 공동체에 보낸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갈라 1,2; 1베드 1,1).

  에페소서의 수신자들은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와의 긴밀한 관계로 미루어보아 소아시아의 교회들이라고 추정된다.

 

2. 친저성 문제

에페소서는 2세기부터 마르키온과 무라또리 경전 목록에 바오로 사도의 서간으로 인정되어 왔다. 에페소서 자체 안에서도 필자가 바오로라고 명기되어 있다(1,1; 3,1).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이다(3,1; 4,1; 6,20). 그래서 에페소서는 필립비서. 골로사이서, 필레몬서와 함께 전통적으로 옥중서간 獄中書簡 또는 수인서간囚人書簡이라고 불렸다. 18세기 말엽까지 에페소서를 바오로 사도가 친히 기록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졌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서도 M. Barth, P. Benoit, F.F. Bruce, G. B. Caird,, H. Schlier, M. Zerwick 같은 학자들은 에페소서의 바오로 친저성親著性을 옹호한다. 그러나 바오로의 친저성을 옹호하는 이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서간의 핵심은 바오로의 것이지만 이 바오로적인 핵심이 후일 제자 또는 서기에 의해 확대되거나 변경되었다"며 그들의 주장을 좀 수정하기도 한다.

  한편 에페소서의 바오로 친저성을 부인하는 현대의 학자들을 일부만 거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F.W.Beare, H.Conzelmann, M.Dibelius, J.Gnil-ka, E. K semann,R,Schnackenburg. 이 학자들은 바오로 친저성이 의심되지 않는 서간들과의 차이점들을 주로 다음과 같이 논거로 제시한다.

 

2.1. 바오로의 친저성이 논란되지 않는 서간들과 에페소서의 차이점들

2.1.1. 어휘와 문체의 차이

약 50개의 어휘가 바오로계 문헌들 중에서 이곳 에페소서에서만 사용되고〔예컨대 그리스어로 "타 에푸라니아"(1,3,20; 2,6; 3,10 6,12), "디아볼로스"(4,27; 6,11)〕, 일부 단어들은 신약성서의 후기 문헌들이나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서나 발견된다(예를 들면, "디아노이아"; "아파테", "마소티아", "호시오테스", "폴리테이아"). 일부 단어들("디카이오쉬네". "뮈스테리온", "오이코노미아"."플레로마")은 바오로의 친저성이 의심받지 않는 서간들에서 사용되던 의미와는 좀 다르게 사용된다.

  더 큰 차이점은 문제의 차이이다. 유의어를 중첩하여 사용한다든가(1,15-18 참조), 관계문과 분사 구문들을 장황하게 연결시킨다든가(참조: 1,3-14; 1,15-23) 하는 경우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런 예를 개별적으로는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에서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너무나 큰 차이점을 보인다. 이런 에페소서의 고유한 문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편지가 본래에는 하나의 "신학적 설교"이었는데 후일 편지의 형식(편지 서두 인사와 결문 축복 등등)을 갖추기 위해 앞뒤에 편지 양식을 첨가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1.2. 신학적 내용의 차이

에페소서의 고유성은 신학적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의화론,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회론의 네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큰 차이점들만 약술하고 아래에서 서간의 주요 내용을 다룰 때 좀더 상술하겠다.

2.1.2.1. 의화혼(義化論)

에페소서의 의화론에는 이미 "업적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모든 논쟁들이 빠져 있다. 2,10에는 "선행善行들"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후일 사목서간들에서 자주 나온다. 그리고 "디카이오쉬네"〔義〕라는 단어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같은 바오로의 서간들에서는 "무상無償으로 주어진 종말론적 사건"의 의미를 갖고 있던 용어였는데 여기 에페소서에서는 윤리적 덕행의 의미로 다른 여러 덕행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참조: 4,24; 5,9; 6,14). "율법"도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와는 달리, 더 이상 육肉이나 죄의 개념들과 관련되지 않고 있으며,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갈라놓는 요인으로 단 한 번(2,15)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2.1.2.2. 그리스도론

에페소서에서 그리스도론은 이미 골로사이서에서 부여되었던 우주적 기능을 취하고 있으며 바오로의 대서간들(로마서, 고린토 전ㆍ후서, 갈라디아서)과 비교해 보면 새롭게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신비"라는 주제가(1고린 2,1-10에서는 이것이 십자가에 관련되어 있는데)여기 에페소서에서는(3,4; 참조: 골로 1,26)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일치와 관련하여 적용되고 있다.

2.1.2.3. 종말론

종말론적 긴장이 한층 누그러져 있다.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기대는 2차적인 것으로 물러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부활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2,5-6과 로마 6,5를 비교해 볼 것). 그리고 "충만함" 및 "성장"의 개념은 구원의 시간적(사건사적) 측면보다는 공간적-수직적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을 오셔야 할 주님으로서 바라보기보다는 우주와 교회의 현실적 "머리"로서 바라본다(4,10 참조).

2.1.2.4. 교회론

에페소서의 가장 큰 차이점(고유성)은 "교회론"에서 드러난다. 에페소서에서 교회는 더 이상 개별 지역교회로서 고찰되지 않고 보편적 교회(세상에 흩어진 각 지역교회들을 전체로 통괄하여)로서 고찰된다. (바오로 친서로 논란되지 않는 서간들에서는 대부분 교회를 "지역교회"로서 이해하고 있다. 골로 4,15.16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1고린 12,28; 15,9; 갈라 1,13에는 광의의 교회 개념을 보여준다.) 교회는 그 외연外延과 영향에 있어서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1,21-23; 3,9-11). 에페소서에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2,20). 이 말은 물론 거기에 "예수 자신을 모퉁이돌로 하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기초를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1고린 3,11의 말과는 교회관에서 분명히 큰 차이점을 드러낸다. 에페소서에서 교회를 1고린 12,31과 로마 12,4-8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 몸의 머리"(1,22-23; 5,23)라고까지 부르는 것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볼 때 주의를 기울여볼 만한 새로운 점이다.

2.1.3. 기타 내용의 차이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에서와는 달리 에페소서에는 필자와 수신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해주는 구체적 내용들이 거의 없다. 수신자들은 이 서간에서 한 번도 "호칭"되지 않는다(예컨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등등). 편지를 끝내면서 축원을 하기 전에 바오로는 으레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알리는데(참조: 로마 15,22-29; 1고린 16,5-12; 2고린 13,1-2; 필립 4,10-16; 필레 22), 에페소서 편지 말미에는 구체적 내용이 거의 없다(6,21-22의 내용은 구체성이 없다). 이 점은 에페소서의 수신 공동체를 "에페소 공동체"라고 본다면 더욱더 큰 문제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2년이 넘도록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고(사도 19,1-20,1) 후에도 에페소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었는데(사도 20,17-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구체적으로 안부 하나 묻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수신 공동체를 "에페소"에 고착시키지 않는 "회람서간"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해결이 된다. 물론 이 구체성이 없는 이유는 "회람서간" 가설이 말해주듯이 서간의 성격 자체가 구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도 설명될 수는 있지만, 로마서에서는 그토록 깊은 신학적 내용을 종합적으로 전해주고, 그 수신 공동체가 자신이 세우지도 않은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교우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밝혀주는 말을 가끔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에페소서는 이 점에서 다른 서간들과 크게 다르다.

  친저성 문제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유의해 보아야 할 내용 중의 하나는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표현이다. 에페 3,5에는 "이 신비〔그리스도의 신비〕는 (이전의)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들의 자식들에게, 영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지금처럼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도 바오로가 과연 이 편지의 필자였다고 한다면 자신도 포함하여 사도들을 "거룩한 사도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 표현은 사도 바오로 자신에게서 나온 호칭이라고 보기보다는 바오로 다음 세대에 바오로와 사도들을 지극히 존경하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더 있다.

 

2.2. 골로사이서와의 관계

에페소서에 관한 특수한 문제의 하나는 골로사이서와의 관계이다.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는 각개 서간의 구성과 주제에 있어서 유사할 뿐 아니라, 때로는 말마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일치할 정도로(참조: 6,21-22와 골로 4,7-8; 에페 5,19-20과 골로 3,16-17)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요한 점은 다른 곳에서는 드물게 사용되는 어휘들이 서로 비슷한 문맥에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에페 2,16과 골로 1,20.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화해"라는 문맥에서 같은 "화해하다" 동사 사용; 에페 2,5-6과 골로 2,12-13; 3,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적 운명에의 참여"라는 문맥에서 "함께-부활하다", "함께 살리다"등의 같은 동사들 사용; 에페 4,16과 골로 2,19: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신앙인들의 성장"이라는 문맥에서 "성장"이라는 같은 단어 사용.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양쪽 서간에 공통적이다: "그리스도의 신비" 또는 "하느님의 신비"(에페 1,9; 3,3.4.9; 5,32; 6,19' 골로 1,26.27; 2,2; 4,3);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페 1,22; 4,15; 5,23; 골로 1,18; 2,1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페 1,23; 4,12.16; 5,23-30; 골로 1,18-24; 2,19); "충만함"(에페 1,20.23; 4,13; 골로 1,19; 2,9); "그리스도의 천상적 현양"(에페 1,20; 골로 3,1);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맺어진 '평화' "(에페 2,14-15와 골로 1,20); "깨달음과 지혜"(에페 1,8-9.17-18; 3,18-19; 4,14-15.23; 5,17; 골로 1,9.10.27; 2,8; 3,10.16);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부활"(에페 2,5-6; 골로 2,12-13);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음"(에페 4,17-24; 골로 3,5-15); "영으로 가득 찬 예배"(에페 5,17-20; 골로 3,16-17).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단락들은 다음과 같다: 편지 서두에서 수신자들을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실한 이들"이라고 부르는 점은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가 일치한다. 그리고 디키고의 파견과 관련된 대목은 두 서간이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에페 6,21-22; 골로 4,7-8). 사도의 관심사를 기도로써 도와달라는 청도 그 구성에 있어서 일치한다(에페 6,18-20; 골로 4,2-4).구조적 일치는 특히 가훈표에서 잘 드러난다(에페 5,22-6,9; 골로 3,18-4,1). 두 서신의 가훈표가 다같이 아내와 남편, 자녀와 그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를 차례차례 다룬다. 수신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전에는…그러나 이제는"의 도식도 두 서간에 일치한다(에페 2,1-3.11-13과 골로 1,21-22; 3,7-8). 찬미가(찬양)에 있어서도 내용적 유사성이 많이 보인다(에페 1,3-14; 2,14-18; 3,14-21과 골로 1,15-20; 2,13-15). 어떤 경우에는 골로사이서의 여러 부분이 에페소서의 한 부분에 합쳐진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참조: 골로 1,14.20과 에페 1,7; 골로 4,3; 1,26과 에페 3,4). 전체적으로 보면 에페소서의 주관심사는 "교회론"에 있고, 골로사이서의 주관심사는 "그리스도론"에 있다.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의 관계에 관한 위의 고찰들을 종합해 볼 때, 같은 필자가 시간적 간격을 가지고 두 서간을 썼다고 보는 견해와, 필자가 서로 다른데, 한 필자가 다른 서간을 자료로 이용했다고 보는 견해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두 서간의 필자가 서로 다르다고 볼 경우에, 위에 제시된 비교를 보면, 짧은 편지인 골로사이서가 에페소서를 요약한 것을 바탕으로 씌어졌다고 보는 견해보다는, 에페소서의 필자가 골로사이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당시 교회 상황에 적용ㆍ발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 골로사이서가 바오로의 친저가 아니라면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에페소서도 아니다. 그렇지만 골로사이서의 바오로 친저성이 인정된다고 하여, 에페소서의 바오로 친저성도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위에서 바오로의 친저성이 논란되지 않는 서간들과 비교하여 에페소서가 가지고 있는 큰 차이점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어휘와 문체, 신학적 내용들〔의화론,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회론〕, 기타 내용) 살펴보고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의 관계까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차이점들은, 자주 주장되듯이, 바오로 사도가 그의 생애 말기에 로마의 어느 감옥에서 구원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에 관하여 오래 명상한 것을 일종의 유서처럼 써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회람서한처럼 써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점들이 생겨났다고 봄으로써 설명되기에는 너무나 크다. 오히려 이 차이점들은 바오로 사도를 매우 존경하고 그의 사상을 잘 알고 있던 어느 제자가(바오로 다음 세대에) 골로사이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자신의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에 적용한 것으로 볼 때 더 잘 설명될 수 있겠다. 에페소서의 바오로 친저성이 이렇게 부인된다고 하더라도 이 서간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가명假名 사용은 유다교와 헬레니즘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일종의 문학 현상으로서, 그 목적이 독자들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친정성 문제와 경전성經典性 문제는 분리해서 고려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서는 철저하게 바오로의 신학으로 각인되어 있으며(예컨대 참조: 에페 2,8과 로마 3,24; 에페 2,17-18; 3,11-12와 로마 5,1-2; 에페 4,28과 1고린 4,12; 에페 3,14; 4,5와 1고린 8,5-6),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그래서 신앙인들의 삶을 위해 규범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성경"聖經이다.

 

3. 서간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적-교회적 상황과 집필 동기

먼저 예비적으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겠다. 우선 저자가 유다교 출신이며(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계 유다교 출신) 수신자들은 이방인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자주 나오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여러분"의 구분이 자주 나오는데에서도 증명된다(1,12-13; 2,1.3.11.13.17.22; 3,1; 또한 4,17-20; 5,8ㄱ: 때로는 이 구분이 매우 모호하기도 하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수신자들의 대다수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에페소서에는 온갖 논쟁적인 어투가 사라져 있다. 내용적 및 시기적으로 에페소서와 가장 가까운 편지인 골로사이서에 있었던 이단에 대한 경고들(예컨대, 골로 2,4.8-23)이 에페소서에는 없다(에페 4,14에 이단에 대한 막연한 경고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한 외부의 적들도 드러나지 않는다.

  에페소서의 집필 동기는 수신자들을 그들이 받아들였던 "그리스도 신앙인의 생활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새로움"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것은"새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2,15와 4,24에 잘 드러나 있다. 2,15에서 서간의 저자는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을 단 하나의 새 인간으로 만드셨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평화와 일치를 교회 내에서 이루기를 호소하고 있다. 4,24에서는 개인적인 면에서 묵은 인간을 버리고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에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입으시오"라고 호소한다.

  에페소서의 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신약성서 안에서 에페 4,3.13 두 곳에만 "일치" 또는 "단일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노테스"가 나온다.) 구체적 위험은 이방인 출신의 구성원들과 유다인 출신의 구성원들 사이의 소원疏遠함이었던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였던 것 같다. 서간의 필자는 이방인-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에 합류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참조: 에페 2,11-22는 로마 11,13-24의 주제를 잇고 있다). 이스라엘이 구원사 안에서 갖고 있는 고귀한 품위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여기에는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 선교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수구파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러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상황은 이미 하나의 과거지사가 되어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서간의 저자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나 다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되었으므로(2,15)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일치와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한다. 교회일치와 관련하여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의 일치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4,11-12 참조).

  둘째, 에페소서의 저자는 수신자들이 그들의 일상생활을 "묵은 인간을 벗고 새 인간을 입었던" 세례 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참조: 1,13; 4,22-24.30). 편지의 절반이나 되는 지면地面을 할애하고 있는 훈계(권고)는(4-6장) 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제외〔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17-19). 수신자들은 분명히 결코 이론적이기만 하지는 않은 위험 곧 그리스도교적 독창성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윤리적 생활 차원에서뿐 아니라 개인적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까지(특히 혼인생활에서: 5,22-23 참조).

 

4. 서간의 응답―주요 내용

우선 말하자면, 에페소서 저자의 글은 하나의 신비적 실재에 대한 매우 평온하고, 거의 관상적이며 찬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신비적 실재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기쁘게 고백하고, 수신자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그 확신에 동참하게 하려고 한다.

  골로사이서에 비하여 에페소서는 계시되고 실현된 "하느님 계획"의 교회적 차원에 집중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서간의 교의적 성격이 지배적인 전반부(1-3장)에 나타나며, 후반부(3-6장)에서는 전반부에서 설명된 교회론에 근거하여 그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예컨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신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권고들이 나온다. 에페소서의 이런 전체적인 구성에 따라 아래에서는 서간의 주요 내용을 "교회"라는 주제와 "그리스도교적 생활"이라는 주제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4.1. 교회

4.1.1. 하느님의 세상 구원계획 속에 있는 "교회"

이미 서두 찬양(1,3-14)은 세상의 창건 이전에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던 일종의 예비-교회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1,3.4.5.11 이하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예정"이라는 개념은 전문적 의미의 예정이 아니라(전문적 의미의 "예정"이라면 "구원의 예정"만이 아니라. "멸망의 예정"도 언급되어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선택"의 은총에 현재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주 반복 사용되는 복수형 "우리"는 에페소서의 저자가 얼마나 "공동체적 용어로"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의 전체(공동체)를 구상(계획)하였다. 더 나아가 이 교회에 대한 계획은 세상 전체에 대한 좀더 광범한 하느님의 계획, 곧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총괄하시려는"(1,10) 하느님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교회는 바로 이 하느님의 계획의 "신비"가 계시되는 장소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교적 지혜에 속한다(1,8-9 참조).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총괄된다"는 인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과의 관계에서 겁먹지 않고 그를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으로 보거나, 폭군으로 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권세"를 빼앗기고 비성화非聖化되어 유일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3,14 참조). 왜냐하면 그분만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3,9) 다만 그분으로부터 천상 적이든 지상 적이든 온갖 유형의 권세(3,5 참조)가 존재와 힘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 공동체 전체는 특히 이에 관해 증언을 해야 한다(3,10 이하 참조: 전체 신약성서 안에서 "교회"전체가 선포활동의 주체〔주어〕가 되어 있는 유일한 본문이다―이 선포는 나중에 보편적 차원을 가진다)고 본다. 바로 이 하느님을 향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3,21)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겸손하고 기쁘게 영광송doxologia을 바치는 것이다. 이 영광송은 마치 그리스도 신앙인 공동체 전체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이 위에서,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신 분"(4,6)을 향하여 올리는 합창노래와도 같다.

 

4.1.2.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차원("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에페소서의 그리스도론은 교회에 관한 담화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광대한 우주와 갖는 관계에서 출발한다(1,9-10.20-22a).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갖는 관계는 이 관계의 하나의 특수화이다(1,22b-23 참조). 서간의 수신자는 사실 원초적인 "하느님 뜻의 신비"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총괄하는 것", 곧 이미 옛 기다림의 시간을 완성한 새로운 시간의 충만함에 관리자를, 책임자를 주는 것(참조: 이와 유사한 쿰란에 있었던 "신비"의 묵시문학적 의미: IQpHab 7,2.13-14; IQS 11,17-19)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판토크라토르"(pantokrator. 만물의 주재자)(1,20 이하. 22ㄱ 참조)라는 거대한 형상(이미지)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세상을 해석하는 열쇠를 준다. 그리스도의 다스림(나라)은 단지 교회에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교회보다 더 크다. 교회는 그분(그리스도)을 자신의 한계 속에 제한시켜 놓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자신을 세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위한 무대가 된다. 그렇지만 우주가 아니라, 교회만이 이른바 그리스도의 "몸"이다(1,23; 2,16; 4,4.12.16; 5,23.20).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소속해 있는 장소이며, 그분으로부터 의미와 방향지시뿐 아니라 존재 자체와 존속함과 정체성identity까지 받는(4,15-16 참조) 유기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에페 1,22ㄴ-23은 대단한 능변이다: 하느님은 "그분〔그리스도〕을 교회에, 만물 위에 '〔우두〕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같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인 두 개의 동심원同心圓을 이룬다. 그러나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충만, 곧 그분의 현존, 그분의 은총과 선물들로 충만한 환경이다(참조: 3,19; 4,10.13; 5,18). 그리스도는 교회와 초월적인 관계뿐 아니라 내재적 관계도 가진다. 이 특별한 관계는 호세아 예언서의 옛 상징을 취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유하는데서 분명해진다(5,25.27 참조). 그런데 5,2를 보면 교회는 "여러분" 또는 "우리"라는 인격적이고 역사적 단위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구속(구원)의 원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은혜를 받은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2,4-5 참조). 구원사건의 첫 원천에는 다만, 자기 자신의 죄들 때문에 죽은(2,1 참조)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4.1.3. 교회의 구성

에페소서에 나오는 교회론의 한 특수한 면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하느님의 거처" 또는 "성전聖殿"(2,22)이라는 이미지에 나타난다. 바오로 자신에게도 매우 특별한 직무가 인정되었다(3,2 이하 참조). 이 점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에페소서의 대목은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제시하는 4,7-16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출발점이자(4,7 이하.10.11.16) 교회의 전체생활과 그 직무들이(13절과 15절) 긴장을 갖고 지향해야 하는 목표이다. 둘째, 저자는 몇 가지 특수 직무를 언급한다: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전파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습니다"(4,11). 비록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다른 목록들(1고린 12,28; 로마 12,6-8)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기(에페 4,11)에 언급된 기능들은 중요한 기초적인 직무들이다. 이 직무들을 둘러싸고 공동체가 구성(조직)되어 있다.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혼합체"이다. 성인聖人들과 죄인들의 혼합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적 체험과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합체"라는 뜻에서이다. 에페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교회일치 운동의 (좋은)예이다. 서간의 저자는 자신의 역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교회라는 새로운 현실에 합류한 히브리인들과 이방인들에 관하여 말한다. 저자는 신앙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으로 실현하신 일치와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 안에서 두 편을 하나로 만들고 분리시키는 벽 곧 적개심을 헐어내셨으며…그리하여 그분은 자신 안에서 둘을〔단〕하나의 새 인간으로 만드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으며, 한 몸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두 편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그 안에서 적개심을 죽이신 것입니다"(2,14-16). 여기에 나오는 장중한 문체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저자의 마음을 얼마나 채우고 있으며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 " 단 하나의 새 인간으로 만드시어"라는 문장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모든 차별(분리)은 극복되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새 인간"(개인적 및 사회적 의미에서)은, 상호공존뿐 아니라 상호친교도 증진시키고 실현시키는 평화의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서로서로" "〔단〕하나의 영 안에서 아버지께"(2,18)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구원사적 여러 조각(그루터기)들이 모여 이제는 교회에 계시된 신적神的 "신비"를 이룬다:〔이 신비란〕"곧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상속자가 되고 공동몸을 이루고 공동약속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3,6). 여기에는 옛 시대의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매우 특별한 지위가 인정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백성에 이방 사람들은 은혜로 합치된다〔참조: "전에…이방인인 여러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 있었다"(2,12);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들이나 거류자들이 아니라 성도들과 같은 시민들이자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2,13.19)〕. 여기에는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접붙임〔接枝〕이라는 이미지가 반영된 듯하다(로마 11,17-24 참조). 그러나 서간의 저자는 이미 교회는 더 이상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2,2; 5,6에 나오는 "불순종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에 유의).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비록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만의 것도 이방인들만"의 것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유형인 "그리스도의 몸"인 "새 인간"을 형성하고 있다.

 

4.2. "그리스도교적 생활"

에페소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 생활에 관한 훈화(권면) 부분(4-6장)은 그 앞에서(1-3장) 상세하게 언급된 그리스도론적ㆍ교회론적 및 인간학적인 언명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참조: 4,1에 나오는 낱말 "그래서"〔그리스어"운"〕. 이와 비슷한 경우에 관하여 참조: 1데살 4,1; 로마 12,1; 골로 3,1).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에페소서에는 우선, 초자연적 인간학에 관한 저자의 관점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간의 저자가 모든 이가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식들이었다"(2,3)고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세례 이전의 과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간의 저자는 "자비가 넘치시고". "그의 은총이 지극히 충만한 하느님"(2,4.7)을 찬양하면서 저 조건이 극복되었음을 축하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전형적인 바오로적 유산을 만난다: "사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2,8-9). 구원은 그리스도의 운명과 그리스도의 역동적인 정체성identity에 독특하게 참여하는데에 성립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지고". "함께 일으켜지며". "함께 앉혀진다". 여기에 나오는 윤리는 이방인적 상황의 단호한 극복에 있다. 그런데 이방인적 상황이란 정신의 맹목성(정신적 소경), 하느님의 생명에서 제외됨, 마음의 완고함(4,17-18 참조), 방탕(4,19; 5,3-5), 거짓말(4,25), 분노(4,26 이하), 도둑질(4,28), 험담(4,29)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목록은 단지 몇 가지 예일 뿐이다. 이방인적 상황을 극복하는 삶을 에페소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모델로 표현한다.

 첫째 표현 모델은 "묵은 인간을 벗어놓고". "새로운 인간을 입는 것"이다(4,22.24). 이 본문은 골로 3,8-11과 병행을 이룬다. 에페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적인 쇄신의 과정이며,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聖性)으로 하느님에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4,24)이라는 하느님의 계획에 계속 상응해 나가는 길로서 이해되어 있다.

  둘째 표현 모델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본받음(모방)"(4,31-5,2)이라는 초대이다. 이 본받음은 그리스도교적 신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태도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이 사랑의 태도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규정된다: 친절, 자비, 용서(4,32 참조), 사랑과 자기 자신을 내어줌(5,2), 이런 점을 서간의 저자는 이미 서두 찬양에서 바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의 속량의 피를 흘린 것을 두고 찬양하였었다(1,6-7 참조).

  셋째 표현 모델은 "어둠과 빛"의 대조(5,6-14)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적 실존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자유로운 이행 과정으로 묘사하거나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doxa 안에서 거닐음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지혜 문학적으로도 표현한다(5,15-17). 여기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행실에 늘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음 깊이에서부터 하느님께로 들어올려지는 노래처럼 묘사된다(5,18-20). 이 노래는 술에 취해 방탕해지는 것과 대조적인 것으로〔성〕령의 열정적인 활동의 긍정적 표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노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끊임없는 감사에서 구체화된다.

  에페소서의 훈화(권고)가운데서 특별한 단락은 이른바 가정 의무표(가훈표;Haustafel, 5,21-6,9)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서로 순종하시오"(5,21; 참조: 필립 2,3)라는 초대로 시작하는데, 이 기획적인 훈화 아래 가정 안에 있는 여러 인간관계에서 가져야 하는 의무(본분)들이 차례대로 다루어진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5,22-33),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에서(6,1-4), 종들과 주인들의 관계(6,5-9). 저자는 골로 3,18 - 4,1에 나오는 비슷한 대목을 앞에 두고 발전시키는데, 특별히 부부의 관계에서의 본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유비 시키면서 신학적으로 심화한다.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의 혼인이 가지는 품위의 정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시는 "사랑의 신비"를 그 혼인이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신약성서의 배경이 되는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드문 사실은 아내에 대하여 남편이 가져야 하는 사랑의 본분을 상세히 언급한다는 점이다. 자녀들과 부모 관계에 관한 훈계(권고)는 전통적 모티브들을 반복하고 있는 반면에 종들과 주인관계에 관한 권고(훈계)는 세속의 주인들도 그들의 종들과 다름없이 다같이 하늘에 "같은 주인님"을 모시고 있음을 명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들도 여러분도 같은 주님을 하늘에 모시고 있다는 것과, 사람 차별을 하는 일이 그분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6,9; 참조:6,8). 이렇게 하여 요란스럽지 않고 비폭력적인, 그러나 불굴의 그리스도교적 사회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회혁명은 사회학적 분석들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고, 위로부터 곧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동기 부여를 받은 "형제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에페소서의 훈계(권고)는 군사용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권고로 끝난다(6,10-20). 저자는 구약성서에서 빌려온 강한 상징적 언어들을 사용하며(참조: 이사 11,4-5; 59,16-18: 지혜 5,17-23) "악마의 계교에 맞설 수 있기 위하여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시오"(6,11)라고 권고한다. 저자의 근본 의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온갖 환상과 거짓 안전감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적 주권(다스림)의 영향권에서 떼어 내려하는 온갖 권세들에 맞서서 힘써 싸워야 한다. 저자는 "하느님의 무기들"(진리, 정의, 평화, 믿음, 구원, 영, 하느님의 말씀, 기도)을 열거하여 세례받은 자로 하여금 그의 특별한 신원identity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일깨워 준다. 이 특별한 신원은 그 자체로 이미 비신앙인들로부터 구별시켜 주고 "의연히 서"(6,13)있을 수 있는 깨끗한 영역을 제공한다.

 

5. 서간의 구성

두 개의 중요한 단절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단절 부분은 처음의 세 장과 나중의 세 장을 구분하는 곳이다. 사실 1-3장의 부분은 일반적으로 결론을 표시하는 하나의 영광송doxologia으로 끝나다(3,20-21). 반면에 4,1에는 "그러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라는 형식문으로 시작하는데 이 형식문은 이미 로마 12,1에서 권고(훈계) 부분을 시작하였었다. 제1부에서 사용된 언어는 관상적이며 찬양적인 데 비하여 제2부에서는 주로 명령법을 사용하여 훈화적이다. 또 다른 단절 부분은 1장에서 14절과 15절 사이에 있다. 1,3-14에 나오는 "서두 찬양"은 독립적인 문학 단위로서 편지의 서두 부분으로는 비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바오로계 편지의 일반 양식에 의하면 편지 서두 인사 다음에 바로 "감사"기도 부분으로 들어간다. 에페소서에서는 이 감사기도가 1,15에 가서 시작된다.) 1,3-14의 "찬양"은 전체 서간의 서문으로 분리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해서 문학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편지 서두 인사(1,1-2)와 서두 찬양(1,3-14) 다음에 두 부분이 나온다: 제1부는 주로 교의적 성격이 강하며 장중한 문체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며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해 가는 그리스도교 교회를 통하여 펼쳐지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경이와 신비를 다룬다. 제2부는 제1부에서 언급한 그런 신원의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구체적으로 교회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루는 권고(훈계)부분이다(4,1-6,20).간단한 소식과 끝맺음 축원으로써 편지가 마무리된다(6,21-24).

 

6. 집필 시기와 장소

에페소서의 집필 시기는 서간의 친저성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골로사이서와의 관계에서 비교적 분명해진다.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 에페소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골로사이서보다 나중에 씌어졌다. 에페소서가 골로사이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때로는 자료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바오로의 서간들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암시하는 곳들이 많음을 고려할 때 에페소서의 집필 시기를 70년 이전으로 잡을 수는 없다.

  에페소서의 집필 시기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의 편지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냐시오의 편지들은 100∼110년경에 기록된 것들로서 에페소서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Ignpol 5,1과 에페 5,25; IgnEph의 편지 서두와 에페 1,3-5; IgnEph 9,1과 에페 2,20-22). 이렇게 볼 때 에페소서의 집필 상한선은 100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에페소서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기간(81∼96년) 말엽에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시사하고 있는 자료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겨 에페소서의 집필 연도는 90년대 초 정도로 잡기도 한다.

  집필 장소: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의 긴밀한 연관관계를 고려해 볼 때 에페소서는 에페소 주변에서 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에페소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7. 에페소서가 현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주는 의미

에페소서에 나오는 어휘들의 시대적ㆍ문학적 장벽을 넘고, 에페소서 저자가 그 당시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우리가 귀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에페소서는 우리 시대를 위하여도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아래에서는 에페소서가 현대의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다음의 네 가지 관점에서 간략히 살펴보겠다: 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신비적 차원을 일깨운다는 점, 2) 교회의 일치를 강력히 호소하고 종교적 개인주의를 배격한다는 점, 3) 인류의 일치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고취한다는 점, 4) 에페소서의 교회상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

 

7.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신비적 차원에 대한 경각

에페소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크다. 교회를 하나의 "사회학적 조직체"로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에페소서는 교회를 그 피상적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계획해 두셨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셨고 사도들에게 계시하셨으며 교회 안에서 펼치시는 "하느님의 신비"의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한다. 에페소서는 이 "신비"mysterium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신비이고,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의 신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사항들까지도 언제나 교회의 신비적 현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에페소서는 신앙인들에게 힘차게 호소한다.

 

7.2. 교회의 일치에 대한 강력한 호소와 종교적 개인주의의 배격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신약성서의 일관된 확신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문헌들 중에서도 에페소서는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까닭은 "교회의 일치"라는 주제가 에페소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에페소서의 저자 당대의 교회 내적 문제였던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의 문제를 배경으로 "하나이며 거룩한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2,11-22의 대목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현대에도 유다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한"이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세계에서 여러 "교파들"로 분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파들 상호간에 많은 갈등과 분쟁을 자아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에페소서는 우리에게 하나요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상을 보여준다(참조: 4,2-6.12.15; 1,22-23; 2,14-22). 일부 사람들은 교회의 중재적 역할에 대한 에페소서의 강조가 그리스도의 구원중재의 유일회성을 가리거나 밀어낼 염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토록 긴밀히 결합해 있어서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과, 교회가 전적으로 그분을 향해 있지 않거나(4,12.15 참조) 그분 밑에 종속되어(4,23-24 참조) 있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염려는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에페소서가 현대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 중에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에페소서가 자유와 자율의 기치아래 종교적 개인주의에 빠지기 쉬운 현대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거기에 빠지지 않고 "교회적인 신앙"을 갖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점이다. 에페소서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의 신앙생활을 공동체 중심적인 신앙생활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문헌이다.

  에페소서에서는 세례와 의화(에페 2,1-10 참조)도 결코 "개인주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늘 "공동체와 관련된 것"으로 고찰된다. * 에페소서의 구성에서 볼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인 "한 몸"(2,16)에 관하여 말하는 대목(2,11-22)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구원〔義化〕받음"(2,8)에 대하여 말하는 그 앞의 대목(2,1-10)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에페소서 저자는 구원(의화)사건에서 교회론적 결과들을 끌어내고 있다. 세례와 불가분 연결되어 있는 의화사건은  의화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인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화해시킨 교회라는 몸으로 이끌어들인다. 이렇게 에페소서 저자는 의화론을 조직적으로 교회론과 연결시키고 그러면서 교회의 차원들을, 가톨릭과 정교회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신적新的 초월성의 신비 안으로 이동시켜 놓는다. 에페소서는 어떤 종교적 개인주의도 단호히 극복한다.

  이 점은 에페소서 저자가 영으로 충만한 하느님 예배를 강조하는데서도 잘 드러난다(5,18-20 참조). 그에 의하면 영으로 충만한 하느님 예배가 있어야 비로소 혼인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등등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향력 아래서 수행해 가는 것이 가능해진다(5,21 - 6,9 참조). 에페소서 저자는 전례의 어휘들을 많이 사용하면서 독자들을 하느님 찬양에 이끌어들이고자 하며(1,3-14 참조), 기도에 참여하도록 하며(3,14-21 참조), 지속적인 기도와 청원기도를 하도록 요청한다(6,18-20 참조). 이런 에페소서의 말씀들은 교회 없이도 그리스도교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무교회주의적 신앙 이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열거한 에페소서의 말씀들은 어떤 교회가 자칭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느님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그들의 신앙과 희망의 표현인 기도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과연 어느 만큼 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지 반성하게 한다.

  종교적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교회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에페소서의 이러한 가르침은 에페소서에 나오는 여러 교훈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에페소서의 가훈표(家訓表 Haustafel)를 포함한 여러 교훈들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과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변세계를 마주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 고유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말씀들이다. 그런데 에페소서의 맥락에서 보면 이 모든 교훈들은 "교회적인 신앙의식"에 의해 뒷받침 받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4,12.15-116).

 

7.3. 인류의 일치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에 대한 고취

에페소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인류 전체의 일치와 평화를 위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현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에페소서에 의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우주적-보편적 차원들을 내포한다. 따라서 에페소서적으로 생각할 때 "교회의 일치와 평화"의 문제(2,14-16 참조)는 "우주와 인류의 일치와 평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에페소서에 의하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간은 믿음과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하여 평화를 이루시고 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신다. 그래서 모든 이가 "그분을 통하여〔단〕하나의 영 안에서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2,18). 에페소서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 전인류를 이미 당신께서 항상 원하셨던 종말론적인 "하나", 곧 종말론적인 "하나의 세계"에로 모으신다는 것(1,10; 2,15 참조)과 "그리스도의 가없는 풍요하심을 복음으로 전하고"(3,8)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쳐 준다(3,8-12 참조).

  요컨대, 에페소서에 의하면 교회는 모든 인류를 하느님 앞에서 "일치"에로 모으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구로서 전세계에서 민족들을 화해시켜 평화를 이룰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인류의 평화와 일치를 위한 자신의 사명을 설득력있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의 "분리의 벽돌"을 마침내 헐어내고 "하나이요 거룩한 교회"로 일치해야만 한다.

 

7.4. 에페소서의 교회상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

에페소서가 제시하는 교회상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특히 현대에 와서 의식화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에페소서에서는 승리하신 주님과 결합된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강조된 나머지, 수난하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을 뒤따라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에페소서가 전제로 하고 있는 깊은 확신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에페소서 저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와 구원"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으심"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특히 2,14에 나오는 "자신의 몸 안에서 두편을 하나로 만들고 분리시키는 벽 곧 적개심을 헐어내셨으며"와 2,16에 나오는 "한 몸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두 편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그리고 2,5.7.8에 강조되는 "은총").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에페소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교회론적 통찰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고 총괄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1,10)을 위해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도구의 역할을 한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의식이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들과 모든 개별 그리스도 신앙인들 안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에페소서 저자가 당대의 교회를 위하여 내놓았던 목표에 좀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이 에페소서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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