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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애인 행정도우미를 계속 운명으로 여겨야 할까요? 아니면 시험을 준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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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미카엘 [112.164.204.*]

2017-11-15 ㅣ No.11630

이곳 게시판에 계속해서 여러 질문을 해서 제 사정은 잘 아시리라 보고 질문드립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저는 2001년 교통사로로 장애인이 되어서, 2007년 장애인 행정도우미를 해서 지금까지 해 오구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 행정 도우미를 운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공무원 증원이다 머다 하면서 주위의 친한 공무원 분들이 시험에 도전해보라구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나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공부할 여건은 아주 안 좋습니다.

그리고, 단기간 공부해서 합격해 버리게 되면, 장기간 공부해온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망설여지는 건 신앙 생활이 약해질까봐 두렵습니다. 계속 해 오던 성경필사도 힘들 것이고, 재속회 서기로서의 임무도 소홀히 할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뻔히 떨어질걸 알고 있기에 망설여지는 겁니다. 즉 공부할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더욱이 나의 운명 장애인 행정 도우미라는 수필로 제 1회 가톨릭 장애인 생활수기에서 장려상에 입상했기에, 장애인 행정 도우미를 그만 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여기다가 그 수필을 올립니다..
나의 운명 장애인 행정 도우미
천주교 제주교구 효돈성당 김민수 미카엘

흰색으로 칠해진 육면체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 그 위에 흔들거리는 링거병 속에서 나오는 하얀 액체를 몸에 담으면서 누워 있는 남자. 저쪽 구석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피범벅이 된 채로 남겨져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나였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 내가 거기에 있게 된 상황인지 몰랐다. 나중에 나의 고향 제주도로 2차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계명대학교 학생이었고 총학생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 때는 2001년 10월 19일이었습니다. 그 날 총학생회 부회장과 밤 늦게까지 일하다가 일을 끝냈습니다. 밤이 늦었기에 부회장은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간다고 해서 우리는 제 자취방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내 자취방 도로 앞은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스쳐지나갈 때 쯤, 우리가 탄 차는 좌회전 신호를 무시하고 좌회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봉고 차량이 과속으로 돌진하더니만 우리가 타고 있던 차를 급습했습니다. 신호를 무시 한 결과입니다. 그 사고 후 우리는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응급치료를 끝내고 우리는 학교부속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후 부회장은 일주일만에 퇴원했지만 난 40일째 의식이 없던 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 필름처럼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제주에서 대구로 왔던 장면들이 하나 하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축구 스포츠기자라는 꿈을 향해 인문대 축구부에 입단하여 주장까지 올랐던 일, 밑바닥 경험을 많이 쌓기 위해서 했던 신문 배달, 총학생회 사회문화부장으로 일하며 헌혈 릴레이를 기획하여 총장님으로부터 받았던 공로패.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사고로 인해 꿈결 같은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날의 교통사고로 뇌병변 2급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황금같은 20대 중반을 시간이 가는대로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통원 치료까지 모두 마친 후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장애인 직업재활 시설 어울림터였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장애인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해맑은 얼굴이었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문득 제주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의사 선생님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달리 해 보았습니다. 사고 당시 2002년도에 대구에서 지하철 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났었습니다.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저는 대구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고, 그 사고가 일어날 당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오히려 교통사고가 죽음을 피해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옆집 할머님의 권유로 성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교통사고 전에는 주님의 고마움을 모르던 내게 교통사고를 통해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였습니다.

일년이 넘게 교리 교육을 받고 미카엘이라는 세례명으로 견진성사까지 받아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주님을 더 잘 알고자 네이버에 있는 ‘천주교 신자 여러분’카페에 가입하고, ‘믿는이의 편지‘를 통해 천주교리에 대해 자세히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블로그(http://blog.naver.com/skykms)를 작은 성지화하여 매일 복음 말씀을 네이버 카페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두 번째 삶을 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곤 두 번째 인생에서는 다른 장애인들을 위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좋은 생각’과 ‘매일미사’를 소리 내어 크게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하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키워 나갔습니다. 저녁 식사 전에는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휘젓고 걸어 다녔습니다. 저녁을 먹곤 아버님과 함께 학교운동장에서 재활훈련을 하였습니다. 일단 걷는 것이 불안정했기에 수 없이 걸었습니다. 엉성한 폼이지만 운동장을 뛰어다녔고, 평균대에서 균형 잡는 연습도 하였습니다. 사고 전에는 자전거도 탈 수 있었고, 수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균형을 못 잡아서 할 수 없습니다. 더 균형 잡는 연습을 통해 자전거도 타고 수영도 할 수 있게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좋은 폼으로 뛰어 다닐 것입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나였기에 육체적으로 힘든 것 쯤은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비장애인이었을 때 해병대를 제대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님이 나를 많이 이끌어주셨습니다. 당신 아들이 하루 아침에 거의 불구가 되 버렸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저를 받아 주셨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나의 재활 운동에 조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끝없는 발음 연습으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사고 초기에는 제 발음은 발음도 아니었습니다. 거의 괴성에 가까웠습니다. 언어 치료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말하는 것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두 번째 인생에서의 좀 더 나은 발음을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 복학을 위해 대구로 갔고, 이런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전공과는 상관없는 평생 교육사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 공부를 더하여 사회 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절 이끌어서 취득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일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문은 좁고 높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사회복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프리랜서 사진가, 웹 디자이너, 사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한 말 “이해받기 보단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단 사랑하라”는 말은 내 생활신조가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에는 주님께서 왜 내게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기도드릴 적마다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었으니까요
낮에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어울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밤에는 성경필사를 하고, 가톨릭 관련 책자들(교부들의 신앙,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등)을 읽었습니다. 이러면서 늘 기도할 적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습니다.
2007년 장애인 행정도우미가 생긴 이래로 여태껏 장애인 행정도우미 일을 해 오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오고 있습니다.

성당에서도 세례 받구 견진까지 받아서 본당 신부님 추천으로 2008년에 재속프란치스코회 레오 형제회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별 의식이 없었지만, 이것 역시 주님께서 절 당신의 도구로 쓰려구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재속회에서도 입회~유기 서약기를 거쳐서 종신서약(2011)까지 받게되었습니다.
저희 형제회에는 어르신분들이 많이 계셔서, 컴퓨터쪽으로는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신을 받구 나서 서기보를 거쳐서 형제회의 서기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장애인 행정도우미 일도 순조롬게만 진행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장애인들이 보다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근무하게 하기 위하여, 장애인 행정도우미의 정규직화(무기 계약직화)를 이루기 위해서 대통령님께 편지쓰구, 복지부 등에 건의하고, 그러다가 행정도우미를 못하게 될 뻔도 하였습니다.
그순간 주님께서 절 도우시어 제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작년까지 5년간 저희 본당이 있는 효돈동에서 근무하며 지역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올해부터는 서귀포시청 경로장애인 지원과에서 서귀포시지역의 장애인 일자리에 참여하는 장애인들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이버 밴드 가톨릭 교우회, 천주교 사랑방등에 매일 복음 말씀등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본당에서도 주보 접기 등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도도 많이 드렸습니다. 9일기도를 비롯하여 새사제 첫 안수(3명),아치에스 시 성모님께 봉헌, 주일미사에서 감사봉헌, 매일 묵주기도 20단 드리기, 성삼일 미사 참례, 사순시기 십자가의 길,하느님의 자비 축일 전 9일기도, 본당 성모의 밤 봉헌등입니다,
네이버에 장애인 행정도우미 카페를 개설(http://cafe.naver.com/ableadmin)하여 다른 장행도들과 교류하면서 장애인 행정도우미 정규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15기도를 아침마다 드리고 있고, 성경필사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십시오 성프란치스코의 영적권고 5,5,8
실상 그대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상한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천상 일을 훤히 꿰뚫어 볼 정도로 예리하고 명석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오늘도 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성경 말씀처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께서 장애인 행정도우미의 정규직화를 이루어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이제 저는 계속 장애인 행정도우미를 운명처럼 여기구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장애인 행정도우미들을 위해서라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까요?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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