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마리에-old

18.1 활동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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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3-08-07 ㅣ No.46

 

 

제18장 쁘레시디움 회합의 순서                     - 교정된 원고-

 

 * 활동 보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활동보고는 쁘레시디움 주회합의 핵심이다. 불완전한 인간일 따름인 단원들이 은총을 입어 성모님께서 내려주신 사도직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었으며 영적으로 어떠한 체험을 했는가를 보고하는 이 시간은 매우 엄숙하고도 정성스레 준비되어야 한다.

 

상훈은 첫 번째 조항에서 “쁘레시디움 주회합에 규칙적으로 정각에 출석하여, 자신이 한 활동에 대하여 알맞고 또렷한 보고를 한다.”라고 활동을 보고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회합에 ‘규칙적으로 정각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한 활동에 대하여 알고 또렷한 보고를 하기 위한 정성어린 준비작업이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을 깊이 묵상해 보라. 즉, 부족한 우리 자신이 은총을 입어 성모님의 거룩한 사도직 단체에 공적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여 미천한 우리의 활동이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통하여 보고 됨으로써 우리의 보고가 성모님 군단의 서기록에 기록되고, 동시에 성모님과 모든 천상의 군대가 우리의 보고를 함께 듣고 있다는 것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때 제단에 옹위한 수많은 천사들을 볼 수 있는 은총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렇게 많은 천사들이 무릎을 꿇고 감탄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장엄한 모습을 보게 되니, 우리가 늘 받아 모시는 이 성체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감각하고 가볍게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여, 뗏세라를 보라! 뗏세라의 그림 위에 무엇이 보이는가? 거룩하신 천상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천상의 모후를 옹위한 저 많은 성모님 군단의 빛나는 얼굴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시선이며 그들의 귀는 지금 우리 단원들의  기도와 활동 보고를 듣고 있다. 뗏세라는 신화나 환상을 그려낸 그림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저 거룩한 제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천상의 신비를 ‘볼 수 없는 인간의 눈’을 가지고도 실제로 보았던 것처럼, 쁘레시디움의 시간과 공간은 주회합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사도직 활동과 보고를 통하여 천상과 연결되는 ‘현재의 상태’이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활동보고는 내 자신이 하느님의 사람, 즉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업에의 동참을 의미한다.

 

활동을 보고할 때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 많은 뗏세라의 천사들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영혼이 우리의 보고를 듣고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활동을 수행해야 하며, 더욱이 수행한 활동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으로 보고를 준비해야 하겠는가는 이미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활동 보고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활동에 대한 보고자이지 평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환자방문의 목적은 위로와 기도이지 우리가 쾌유의 은총을 일구어 내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열매 맺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바오로 성인은 말한다. 활동을 하면서 대상자 앞에서 기도하기 보다는 그에게 먼저 기도를 청해야한다. 우리의 활동 대상자들은 불쌍한 영혼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볼 수 있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활동 대상자들을 단지 인간적 감정에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휴머니즘에 머문다면 우리는 신심단체나 사도직 단체가 아닌 자선단체의 회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쉬는 교우들의 불친절을 경험하고 환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오히려 하느님이 과연 계시는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을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평등하게 만드셨을까? 하고 한 번 쯤 자연스럽게 회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신앙의 갈등을 느꼈다. 은총을 통해 사제성소를 받았지만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세상에 고통 받는 많은 이들, 갈등하는 이들을 발견하면서 사제성소에 대한 회의와 하느님 현존과  그 분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쁘레시디움 주회합 안에서, 그리고 활동 안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느낌과 삶의 방식들은 바로 우리 인생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둡고 힘든 요즈음의 세상에서 우리들의 행복과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으로 부족한 우리가 성모군의 군사로 뽑힌 것은 과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다. 그러나 우리가 레지오 마리애 안에서 보람을 느끼고 아름답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시인의 다음과 같은 시에서 표현된 ‘우리의 부족’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아름다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며 괴로워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우리의 아름다움’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결국 하느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겸손한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부족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며 애태워 노력한 나의 작은 기도와 활동을 그 애틋한 마음에 실어 함께 봉헌하는 시간이 바로 쁘레시디움 주회합의 활동보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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