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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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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3-08 ㅣ No.3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상장례 지도사 학교 강의)

2007년 3월 5일  11:40-12:40,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대강당

강사: 김영남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머리말

우리 인생에는 불확실한 것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 대부분은 연령회 봉사를 하시면서 많은 체험을 하셨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인생의 마지막 과정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럽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이런 종착역을 향해 하루하루 전진해 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만 본다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 인생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인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제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그리스도교의 사생관(死生觀) 요약.

우선 그리스도교의 사생관(死生觀)에 관한 중요한 말씀 몇 가지를 열거하겠습니다. 위령미사 때 주례사제가 바치는 다음 기도문에는 그리스도교에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永生)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위령미사 감사송 1)

미사 경문의 다른 문장들도 그러한 것이지만, 위의 기도문의 내용 하나하나가 다 성경과 교회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되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님의 삶 전체,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믿습니다. 

위에 인용된 감사송의 내용도 바로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내용은 신약성경에 가장 권위있게 증언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성서를 전공한 학자로서 신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위의 기도문에 나오는 가르침에 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에 관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2.1. 코린토 전서 15장을 통해본 부활신앙의 의미


2.1.1. 부활신앙의 두 방향

앞에서 우리는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라는 점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 신앙’하면, 즉시 ‘예수님의 부활’ 신앙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의 이 두 측면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오늘 강의의 주제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2.1.2. ‘부활신앙의 중요성’:

많은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 제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먼저 말하지 않고, 그분의 부활에 관하여 먼저 말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채로 그대로 계신 분이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아무리 훌륭하였다 하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는 곳이 바로 코린토 전서 15장입니다. 그런데 1코린 15장을 바오로 사도가 쓰게 된 계기는 코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 중에서 일부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1코린 15,12)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를 매우 염려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앙 내용 중의 하나 정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을 그리스도 신앙이게 하는 근본적인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 즉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는 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도 제대로 믿지 않는 태도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코린토 전서의 거의 마지막 부분인 여기 1코린 15장에서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부활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코린토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ㄱ);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 이상 인용된 말씀들과 특히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라는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 줍니다. 사도 바오로 자신의 삶을 보더라도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하여 겪고 있던 그 모든 고생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후대의 그 많은 순교자들의 삶도 모두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행복선언(마태 5,3-12)과 ‘산상설교’를 비롯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도 허망한 것이 될 뿐입니다. 


2.1.3. 1코린 15,1-11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5장 1-11절에서 말하려는 내용,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코린토 교우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믿음에서는 ‘굳게 서 있다’(1ㄴ절). 문제가 되는 것은 후반부에서 다루게 될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아니 한다면, ‘헛된’ 믿음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전해 준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것, 묻히셨다는 것, 부활하셨다는 것, 나타나셨다는 것”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묻히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사(假死) 상태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고, ‘나타나셨다는 것’은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라고 본다면,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사건’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복음)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들을 용서하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들[장래의 우리들]의 부활’과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하였듯이 바오로는 15장의 후반부(12-58절)에서는 여러 관점에서 이 연결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1.4.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1코린 15,12-58)


1코린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공동번역].) 여기서 ‘맏물’이란 그 해에 맨 먼저 거두어들인 과일이나 곡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맏물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들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봉헌되었습니다(탈출 23,19; 신명 26,1 이하 참조). 여기 1코린 15,20에서 이 단어는 ‘맨 먼저 부활하신 분’이란 의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20절의 내용은 맏물이 있으면 그 다음에 다른 소출들이 따라오는 것처럼, ‘죽은 이들의 맏물’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면, 이어서 그리스도 안에 죽은 이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오로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완성의 시작으로서 이해되었습니다. 

26절: “마지막 원수로서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죽음이 없어짐으로써 이사 25,8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이사 25,8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참조: 미사 감사기도 제3양식 죽은 교우를 위한 기도 부분: “이 세상에서 불러가신 교우 ...를 생각하소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 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1코린 15,35-49에서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부활방식’ (달리 표현하면 ‘육신부활 문제’)에 관하여 논한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일으켜집니까?”라는 35절의 질문은 이 단락의 주제를 제시합니다. 제기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36-41절에서는 여러 가지 예들이 제시되고, 42-44절에서는 다섯 번이나 대조가 연속 나오는데, 이 모두는 ‘부활한 후의 몸’‘죽을 때의 몸’에 비교해서 얼마나 좋게 다른지를 강조합니다. ‘부활한 후의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영적이고’, ‘천상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점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하여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부활하기 전에 ‘썩거나’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다음 말씀들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1코린 15,36);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습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 15,50).

방금 인용된 50절의  문장에서 ‘살과 피’는 사멸(死滅)할 가능성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을 표현합니다(갈라 1,16; 마태 16,17 참조). 즉 50절의 위의 말은 결국 죽거나 전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51절 참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세말을 맞이하는 사람도 그대로는 안 되고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2);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3).

바오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후(死後)의 생명은 죽은 인간의 육체에 내재해 있던 불사불멸의 어떤 힘이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또 바오로는 부활을 고대의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이 믿었듯이, 미이라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가 되살아  나는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육신(몸)의 부활이라는 것이 단지 지상생활의 생물학적 연장일 뿐이라면 그런 부활은 우리 인간이 염원하는 대상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죽을 때의 인간의 그 처참한 몰꼴로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흼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사후(死後)의 생명’은  ‘죽음과 썩음’의 과정을 겪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분”, “비존재(非存在)에서 존재(存在)로 불러내시는”(로마 4,17참조)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 그러나 우리 인간 각자의 고유한 인격의 정체성(identity)이 확인될 수 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부활한 후의 몸’과 ‘죽을 때의 몸’의 차이는 ‘죽음과 썩음을 사이에 둔’ 차이입니다. 창조주 하느님만이 메울 수 있는 차이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오로에 의하면, ‘죽은 이들의 부활 신앙’은 결코 죽음(썩어 없어짐)의 진지함과 냉엄함을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2.2. 부활 신앙을 지니고 사는 의미


첫째, “부활하여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복음’이 주는 제 1차적인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참조 요한 3,16; 로마 8,32 등), 부활하여 우리를 위하여도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잊는다 하여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그분, 주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신앙’이고 부활신앙은 근본적으로 ‘희망’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오로는 1테살 4,13에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역경도 이겨내 수 있는 희망, 그래서 “죽음의 문턱까지 넘어서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가 가질 수 있는 이런 ‘희망’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그 힘’입니다! 이 점을 다음의 성서 구절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 8,32;  8,35-39.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부활하시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신다(로마 8,10-11 참조). 이 점을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로마 5,5).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물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2코린 4,8-10.11ㄴ)

위의 두 구절에 의하면, 세례와 믿음을 통해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결합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로마 5,5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3.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


3.1. 총 요약: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하느님”

저는 얼마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 전집을 읽다가, 제가 오늘 강의하려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총요약하는 것 같은 말씀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요한 1,14 성탄절 신비, 삼종기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자 되신 하느님(2고린 8,9),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하느님

          (마르 14,24; 로마 5,8; 8,32; 3,24-25; 1고린 15,3; 갈라 2,20; 요한 3,16; 1요한 3,16 ),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김수환 추기경 전집 제10권, 267쪽에서 인용. ‘1984년 200주년 준비 교구 사제연수회 강론’ 중.

 괄호 안의 성서 구절은 내가 삽입해 넣은 것임)


그런데 인용된 추기경님의 말씀은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용한 추기경님의 말씀에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계신 분,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채로 남아 있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께서 ‘부활하시어 오늘의 우리를 위해서도 살아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2.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불가분의 관계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결코 분리시켜 볼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빠스카 신비”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불가분하게 연결시켜 묵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메시지가 없다면, ‘부활’ 사건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한, ‘어떤 누군가가 부활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들은 바로 예수님의 그 수난과 죽음이 바로 “우리를 위한 수난이요 죽음”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를 위한 부활”이라는 의미도 나오는 것입니다. 코린토 전서 15장 전체는 바로 이 문제, 즉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들의 부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다루는 곳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요한 3,16; 로마 8,32)이 예수님의 시자가 죽음의 이유라는 점에 관하여는 --> 앞에 인용한 추기경님 말씀 참조.


3.3. 그리스도의 수난이 차지하는 중요성

3.3.1.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중요성

마르꼬 복음서에서는 30여년간의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도 마지막 3년 그 중에서도 마지막 주간에 일어났던 일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하여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전해주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사도들을 중심으로 했던 초기 신앙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얼마나 은혜롭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3.3.2.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차지하는 중요성

바오로 사도의 설교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핵심사항이었습니다. 이 점은 이른 바 “십자가 신학”이라고까지 불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25)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선포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가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 신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상기시킵니다(예, 갈라 3,1; 1고린 1,13).

       

3.4. 그리스도의 수난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


요약.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편으로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일깨워 주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더욱 굳게 가지라고 요청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하여 더욱 예민해지라고 요청하면서(세상의 죄’/ ‘세상의 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도록 자극합니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단체적으로도 지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라고 요청합니다.


맺음말

머리말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죽음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우리 인간 가운데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 가사(假死) 상태에 있다가 소생된 사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되살아 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위령 감사송에도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죽음의 운명, 허무의 위협 앞에 굴복하는 인간에게 결정적인 희망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덕분에 그 죽음의 장벽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사랑자체이신 당신과 영원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계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신약성경의 증언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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