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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同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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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05-12 ㅣ No.857

 

 

 

  아래의 글은 나의 사순절 묵상이며 강론이었다. 6월 예수성심성월에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릴 예정인데 아마도 다이제스트지에는 분량상 요약본이 기재될 성 싶다. 이지면에 원문을 싣는다.

 

 

*동감(同感)

 

사순절을 준비 하면서 나는 두 가지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한적한 수녀원에서의 피정과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이다.

피정과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는 나에게 동감(同感)이라는 작은 단어의 의미를 새삼 살아있는 부활의 언어로 선택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마음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의 말과 소식을 들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동감(同感)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 자신에게 무엇을 제안하거나 참여를 청했을 때 그것을 수락하는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역시 동감(同感)이다.”

동감(同感)이란 똑같이 느낀다는 말이며 똑같은 평가와 가치관을 함께 공유한다는 말이다.

이번 사순절 판공성사가 끝나고 동창신부 사이에서는 이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많은 쉬는 교우분들이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성당에 나오기 위해 진정한 고백성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이 영화는 단연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임산부를 살해한 살인자가 자수를 하고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다고 한다. 입소문으로 나에게 전해진 이 화제의 영화는 그 제작서부터 동감(同感)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음을 알고 영화 관람전서부터 기대가 컸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며 감독인 멜깁슨은 진지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인 작품의 연기자이기 보다는 폭력이 미학화되고 오락의 요소롤 제공되는 헐리우드식의 히어로로서 등장하는 대중적 연기자였다고 기억되었다.

어느날 천주교 신자인 멜깁슨은 자신의 집에서 먼지에 쌓여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진 오래된 한 책을 발견하고 먼지를 털며 그 책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그 책의 먼지를 털었다.

그 책은 바로 성서였다. 순간 먼지는 하늘로 날개짓을 하며 성서라는 책의 냄새가 피워올랐다. 그 순간 그 책이 나에게서 버려진 외로운 존재임을 느낀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네 천주교입니다. 전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렇게 말한 멜깁슨이었다. 버려진 성서를 들고 그는 한참을 서있었다.

왠지 모르는 감정에 먼지를 털고 소파에 앉아서 신약성서를 펼쳤다.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부분이었다.

2000년 전에 예수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셨고 3일뒤에 부활하셨다. 평소에 상식중에 상식, 역사중의 인류의 최고 사건이라고 누구나 다아는 가장 보편적 일반상식이 되어버려 이제는 아무 느낌도 갖지 않는 그 사실 온인류의 다른 종교인들까지 상식적으로 아는 그 사실!

 

마치 우리 집에 성서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성서를 느끼고 성서를 살아가는가하는 마음의 질문에는, 동감이 아닌 불감(不感)이라는 단어로 대답해야함을 그는 느끼게 되었다.

 

멜깁슨은 ‘외로운 불감(不感)’의 대상인 예수님의 수난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를 울게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동감(同感)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고통이 지나간 것이 아닌 지금 함께 느껴지는 감정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아팠고 미안했고 그래서 눈물이 흘렸다고 한다.

그의 그런 동감의 체험은 전재산을 다 받쳐 그리스도의 수난을 철저히 그 당시의 역사적 고증과 성서에 입각한 재현이라는 목적안에서 제작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마치 당시를 재현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다큐멘타리를 보는 듯하다는 평이 지대하였다. 언어역시 영어가 아닌 예수님은 히브리의 지방어인 아람어를 쓰시고 로마 병사들과 빌라도는 라틴말을 구사한다. 화제가 되었던 편태장면에서 너무 가혹한 장면이 나온다. 이것 역시 당시의 고증으로 채찍에 못과 유리와 동물과 사람의 뼈의 파편을 넣어 만든 것을 사용한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영화는 아이러니 하게도 헐리우드의 주력자본인 유태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유태인들에게 자신의 영화구상을 제시하였을 때 그들은 모두 외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쏟아부었고 몇 번이나 실패감에 좌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다시 일으켜 준 것은 바로 그 성서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자신에게 느껴진 예수님 수난을 통한 사랑의 동감(同感)이었다.

 성서에 충실한 대사와 역사적이며 고고학적인 노력으로 고증된 현실적인 연상은 커다란 충격자체였다. 성서의 흐름과 성서에 충실한 대사와 장면을 통해 본 이 영화는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성모 마리아의 강하면서도 인내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내적인 마음의 상태와 우리 교회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안에서 성모님 차지하시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재정립하는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수님의 수난의 순간들에 성체성사의 장면을 교차 중복 처리하면서 감독은 성체성사와 십자가상의 제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동감(動感)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도움으로 새삼스럽게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바로 2000년전에 저렇게 처절히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땀과 살이 그대로 이 미사안에서 단순히 상징이 결코 아닌 예수님의 그 몸과 피로 재현됨을 머리가 아닌 눈물과 슬픔과 회개의 벅찬 가슴을 통해 동감됨을 느꼈다.

  사제인 필자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내 자신의 사제직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은총의 직무인가를 알게 되었다.

또한 이 거룩한 직무에 일상의 습관적으로 불감(不感)이라는 영적 어둠을 통해 미사성제를 드리지 않았나? 얼마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수님이 지금 당하시듯이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모님처럼 동감하면서 정성스레 봉헌하였는가를 반성하였다.

사제는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봉헌하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적 존재이다. 이러한 의미가 동감어린 삶의 증거와 기도안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나는 불행한 사제요 혹시 예수님을 다시 못박는 유태인 대사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제들은 모두 잘 알 것이다. 미사의 경문에 나타난 하느님의 그 생생한 현존을!

나는 미사의 경문을 바라보면 놀라운 다음의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찬 제정의 축성문의 두 문장 즉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몸이다.”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라.” 위의 두 문장만은 경문의 다른 어떤 글씨와는 다르게  가장 크고 굵은 활자체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다음의 지시사항이 빨간 작은 글씨체(이를 Ritus라고 한다.Ritus는 주로 사제의 전례시 동작과 행위에 대한 지시사항과 의미를 적은 것을 말하며 작고 빨간 글씨체로 쓰여져 있다. 이는 경문에서 발음되지 않는다.)로 앞서 쓰여있다.

“사제는 아래의 기도문에서 주님의 말씀은 마디 마디 또렷하게 발음한다.”- 앞의 문장은 빨간색 글자로 해주셔요! ^^--

 

그렇다! 위의 두 문장은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

 

 예수님이 당신을 희생하셔서 주신 그 살과 피는 바로 미사의 성찬 제정 기도문인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사제의 입술과 예수님의 입술이 하나 되어 지금 이 미사안에서 선포되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의 힘으로 실제로 빵과 포도주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이 빵과 피는 앞으로 미사전례안에서 나를 기억하고 상징할 상징물“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저 빨간 글씨! 사제를 향한 지시사항에서 보듯이 이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시다.

경문의 그 어떤 부분에서도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사제가 직접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서 선포하는 대목을 볼 수 없다. 이 두 문장 이외의 그밖에 경문의 문장에서 사제는 설명체나 간구체를 사용하여 성부께 기도하고 영광을 드린다.

이 두문장을 발음하므로써 사제는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로서 선포하는 일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장엄히 2000년전의 그순간이 재현되고 선포되는 것이다. 이것이 여타의 종교와 특히 개신교의 예배 경문에서는 있을 수 없고 있지 아니한 사실이다.

만약 미사때의 성체와 성혈이 주님의 몸과 피가 아니고 단지 2000년전의 십자가상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멘트라면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할 것 이다.

 

“여러분은 모두 이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내어준 그분의 몸이었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라고

 

즉 사제는 예수를 3인칭으로 칭하며 소개하는 식의 경문이 삽입되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 거룩한 멘트를 통하여 사제는 서슴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과거의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현재형으로 이곳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의 십자가상의 제사와 부활의 생명을 성령을 통하여 선포하게 된다. 그렇게 선포할수 있는 권한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이어오게 하셨다. 그분은 바로 최종적으로 미사의 절정에서 성체와 성혈의 변화를 위한 당신의 말씀이 소개가 아닌 사제안에서 하나되시어 지금의 미사를 당신의 희생제사로 현재화시키려 하셨던 것이다.

 모든 사제들은 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또렷히’ 아주 ‘또렷히’ 정성스레 말하면서 2000년의 시간차를 극복하고 또한 나약하고 부족한 한인간인 내가 그리스도의 흠없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이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의 신비를 ‘우리는 신앙의 신비’라 부르며 노래로 응답한다. 신비란 도무지 모를 것을 억지로 알려하는 모호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너무나 크고 감동된 사랑과 기쁨을 통해 우러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사의 정이다.

따라서 신비란 질문에 대한 모호한 미소가 아닌 눈물어린 가슴저미는 동감(同感)의 표현양식이다. 이렇듯 우리가 그분과 하나될 때 우리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알 수 있다.

그 어느 종교예식의 경문에 내 몸이며 내 피라고 적을 수 있겠는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권한을 갖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는 내몸이라며 그분을 자신과 동일이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이러한 감동어린 사실들을 너무나 느끼지 못하는 영적(靈的)인 불감증(不感症)에 걸려 있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천주교의 전례는 활기차지 못하고 지루하다! 매번 같은 말만한다! 무엇인가 자극적인 것이 필요하고 바뀌어야 한다. ” 이러한 불평안에는 동감이라는 감정보다는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미사의 일치적이며 현존적인 의미를 망각한 원인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불감(不感)은 바로 유다의 감정이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2000년이나 지난 예수님의 수난! 수난 복음안에서 나는 예수님의 역할을 했지만 사제가 되어 처음으로 군중의 다음의 말을 함께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요. 십자가에!”

어느 냉담을 푼 형제님이 군중의 대목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를 외치며 우셨다.

미사가 끝나고 가서 여쭈어 보았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무 미안해서요. 그리고 너무 몰랐습니다. 미사가 다 연극이고 예식만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힘들게 돌아가신줄 몰랐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신부님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맞다! 서운 하셨을 것이다. 참으로 나에게 그분의 그 마음과 힘듦을 불감(不感)한 나의 차고 무감각한 마음을 보시고 ........

영화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바치는 것이다.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엄청난 수난을 당하신다. 영화를 통해 고통에 동감하면서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일어나는 것이 더 힘드시겠구나 차라리 여기서 끝장 나는 것이 더 좋겠다.”

십자가형! 당시 로마의 모든 사형제도와 고문중에 유일하게 집행시 살려 달라는 애원이 아닌 제발 빨리 지금 여기서 죽여달라고 외치며 애원하게 되는 최고의 극형!

그분은 일어나셨다. 다시 일어나셨다. 부활(復活)은 다시 일어섬(resurrection)이다.

그분의 수난은 초인적 인내의 영웅적 결과라는 허리우드식의 해피앤딩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죄인들의 다시 일어섬을 위한 고통의 다시 일어섬이며 우리의 고통과 죄를 짊어진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전적인 동감과 동참이었다.

그 아들 예수님을 달려가 가슴에 안으신 성모님의 말씀 “아가야 괜찮다. 아들아 괞찮다.”

하시며 어린 아기의 시절 걸음마하다가 넘어진 그 어리고 약하고 사랑스런 아들을 회고하며 동시에 지금 무참히 무너져가는 피범벅의 아들을 안으신 성모님은 무너지는 가슴을 지탱하며 땅을 흙을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움켜잡으신다. 강하신 어머니! 그리면서도 무너지는 그가슴! 내아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냐며 원망의 하소연도 없이 그분은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괞찮다. 아가야!”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왜 이분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보다는 바로 지금 그분을 안아드리고 사랑해 드리며 함께 느끼며 위로해 드리는 어머니의마음!

바로 동감의 마음이다. 원망을 할 여유도 이유를 물을 사람도 없었다.

 

 

 

얼마전 한 산부인과에서 기적적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한 아기는 갑자기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위급해 졌고 출혈과 탈진으로 회생이 어려울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간호사가 그것을 보고 너무나 안따까워 병원에서의 두 쌍둥이를 격리하라는 규칙을 어기고 죽어가는 한 아기를 다른 쌍둥이의 요람에 함께 놓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 아픈 아가는 점점 편안한 얼굴이 되었고 다음날 가보니 아픈 아가를 건강한 아가가 팔로 안아주고 함께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의학으로 풀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지만 나는 이 두 쌍둥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동감(同感)이라는 중요성 함께 함이라는 아름다운 기적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서 역시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것은 바로 함께 머무르시기를 위한 것임을 가장 최우선적으로 말한다. 그 다음이 당신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함께 머무는 자는 사랑하는 자이며 함께 느끼는 자는 바로 쌍둥이처럼 한모습인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 당신은 나의 눈빛 나를 안아준 그 나의 고통을 알아준 동감의 눈빛을 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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