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1주일(나해) 마르 12,28ㄱㄷ-34: ’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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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8-11-02 ㅣ No.3694

연중 제31주일(나해) 마르 12,28ㄱㄷ-34: ’18/11/04

 

 

 

   언젠가 아시아 소공동체 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말씀을 읽고 나누는 것'을 기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묵주기도처럼 기도문을 입으로 외는 염경기도나 성가를 불러야만 기도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주님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씀을 드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사가 최고의 기도라고 하는데, 미사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아갈 길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또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성체로 북돋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주님께서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묵주기도도 주님의 생애를 20단계로 나누어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와 주님과의 대화를 기도라는 관점에서 바라봅시다.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하고 여쭙는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29-31)라는 주님의 응답을 듣게 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다시 주님께 확인하고자 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 그러자 율법학자는 주님으로부터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 는 인정과 그에 따른 기쁨을 기도의 응답으로 얻습니다. 물론 이 기도에 이어 그의 실천이 뒤따랐으리라 추측합니다.

 

   우리가 구역 반 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나누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살고 머무는 가정과 직장, 성당, 지역사회를 복음의 가치로 검토해보고 복음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복음의 정신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이 험하고 타락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성당에 데려와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더러운 개천에서 깨끗한 어항으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이 선교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복음선교 17항을 보면,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어항에서 물고기를 꺼내어 냇가에 풀어주면 그 고기는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음화를 통하여 인류 사회가 성화되기도 한 반면, 부작용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희망보다는 죄의식을 더 심어주고, 세상 안에서 종교 계율에 걸려 그나마 유약한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교회의 단기적 선교 전략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니까 더러운 개천에서 사람을 꺼내 어항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시키겠다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세웠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고 하신 것과 같이 복음의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8)

   물론 그렇다고 교회가 교리교육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신자 각 개인의 복음화 활동의 의무를 배제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례를 받고 또 복음에 따라 사는 삶으로 새로워진 새 사람이 없다면 새 인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화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내적 변화이며, 한마디로 표현하여, 교회가 복음화한다는 말은, 교회가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거룩한 힘을 통하여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활동, 그들의 삶과 구체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 (18)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화를 인간 차원의 쇄신차원으로 변환시켰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인간의 모든 차원이 변화하여야 합니다. 교회로 볼 때 이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더욱 넓은 지역이나 더욱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바로잡는 것이기도 합니다.”(19) 라고 말합니다.

   곁들여 교황은 문화의 복음화도 언급합니다. “복음과 그에 따른 복음화는 확실히 문화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모든 문화에 대하여 독립적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느 한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이며,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인간 문화나 문화들의 요소들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과 복음화가 어떠한 문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모든 문화와 융합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과 복음화는 어느 한 문화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문화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20)

   이렇게 변화된 새 복음화라는 교회의 새로운 선교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느님 사랑이웃 사랑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 같은 한 손의 등과 바닥이라는 양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주고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새 신자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구원을 입어 죄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참다운 인간생활을 할 수 있으며, 함께 그 복음의 활동을 이어가기 위하여 새 신자를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의 구원하심에 감사드리고 찬미드리는 하느님 사랑과 그 구원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구원을 이어나가기 위해 형제들과 주님의 은총을 나누는 이웃 사랑이 영적으로는 첫째와 둘째의 순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같은 하느님 찬미와 이웃 봉사의 같은 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첫째, ‘복음 말씀 나누기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헤아립시다.

   둘째, 헤아려 깨우친 그 뜻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가 처한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지혜롭게 모색합시다.

   셋째, 모색한 방편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식별합시다.

   넷째, 식별하여 확인한 그 방편을 실천할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실천계획을 세웁시다.

   다섯째,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기를 청합시다.

   여섯째, 주님의 이끄심 안에서 공동체와 함께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고 형제들과 하나 되어 주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로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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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72094&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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