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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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6-19 ㅣ No.418

"네이웃을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너의 원수는 미워해야한다."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구약의 율법과는 정반대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패기자일까요?

 

그리고 구약의 율법은 좋지 않았던 법일까요?

 

요즈음 광고 카피중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것이다."

 

오늘의 해답인 듯 보입니다.

 

당시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매우 당혹스런 말씀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상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아니 불가능한 것 처럼 보입니다.

 

배우 전도연 주연의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개신교에 입문한 그녀는 비로서 자신의 자식을 유괴하고 살인한 유괴살인범을 신앙으로 용서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누렸다고 말하기 위해 교도서에 있는 자식의 살인범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유괴 살인범은 그녀가 그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역시 용서와 평화를 얻었다고 ......."

 

전도연은 순간 "누가 언제 당신을 용서하였습니까?" 라고 울부짖습니다.

 

너무나 뻔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버리고 하느님을 경멸하기 위해 온갖일탈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려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혼돈 스러운 표현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영화를 보고 종교는 우상이며 양심의 가책과 영혼의 나약성을 이용한 위선이라는 인식이 들었다고 하고

 

어떤 천주교신자는 고백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묵상하였다고 합니다.

 

전도연의 용서가 완전한 용서가 되지 못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내가 용서하기 전에 용서받았다고 말한 그 살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었을 까요?

 

과연 진정한 용서와 사랑은 누가 할수 있고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왜 우린 용서해야하나요?

 

전도연은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하고 평화를 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럼 바꿔말해 우린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받은 그 수많은 은총에 대해 감사합니까?

 

어쩌면 이영화는 참으로 시각에 따라 달리 생각되어지고 느껴지는 영화일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말입니다.

 

즉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영화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수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원수사랑의 목적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란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자녀가 될수 있다."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제목을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라는 제목에서 유럽에서는 불리워집니다. 즉 자녀들의 기도라는 뜻이지요1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수 있을까?하고 어려움과 황당함 그리고 구약의 율법을 패기하시는 듯한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하여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용서의 명령은 이 목적에 의해 그 전 계명과 차이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승화를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아뢰오니!라는 말을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가 말입니다.

 

하지만 이말씀의 뜻을 잘 묵상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늘 바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함이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마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징표입니다.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고 단순한  용서와 사랑의 징표입니다.

이것이 용서와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수 있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예수님은 기적으로 당신의 말씀을 증명하셨고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한 기적은 바로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이 주신 징표 즉 표징은  기적이기 보다 바로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매일 경험하는 날씨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해가 떠오른다고 하지만 오늘 그분은 "당신의 가 떠오르게 "당신이 하신다고 합니다.

 

 

 

"당신의 해!"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이란 시간을 보내는 것이며 가능한 즐겁게 보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인생이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만들어 가는 시간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해가 당신의 해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비치는 저 태양은 아무 통제나 목적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해이며 당신이 하시는 애쓰심입니다.

 

저는 오늘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에게 비추는 저 태양의 빛과 나에게 내리는 이비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의 표징이라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표징안에 기적과 자연스러운 섭리가 함께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꼭 미워하고 미움을 받을 때 모든 이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태양과 위로의 빗줄기를 떠올려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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