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보 신부님의 성서 자료실

신약성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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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66

 

 

신약성서의 의미

 

 

-박영식, 성서를 읽기 위하여, 성바오로 출판사, 1999, 125-129; 132-138 참조

 

 

 

1. 구약의 완성인 신약

신약성서(혹은 '새계약')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해 준 것이며, 그분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된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가 신약성서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백성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알아들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자신 안에 갇혀 있었다.

  히브리인들은 위대한 인물, 힘있는 승리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여 다른 모든 민족에게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왕국을 세울 인물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하게 살고 교수형을 받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왕국과 물질적인 능력에 관심을 집중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반복해서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일깨워 주셨다고 말했다.

  첫번째 약속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해줄 구세주였다. 전체 성서가 항구한 주제로 말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이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단지 세상의 것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일 수 없다. 요한 복음의 첫머리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시다(요한 1, 1-4).

  사실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신 그분의 평화를 이룩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을 실현하기 위한 이상적이고 완전한 중재자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임을 계시하신다. 그분은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자기 현시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을 계시하시고, 당신 자신은 구세주요 스승이며,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밝혀 주신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히브리 백성들은 범신론을 따르는 다른 모든 백성들 한 가운데에서 유일하신 하느님, 영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했으나, 하느님은 그들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계시해 주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이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 이를 범신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통이 죄에 대한 벌이라 여겼다. 욥과 토비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죄없이 고통을 받아야 할 경우를 당하면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한 시험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는 대단히 많았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점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몸소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우리가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값으로 이를 신성하게 만들어 주셨다(루가 2, 26-32).

 

2. 신약성서 구조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도 행전은 초기 교회의 모습을 그리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편지들 특히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풀이해 준다. 사도행전은 많은 상징들을 동원하여 교회의 현재와 미래 역사를 예고하고 종합한다. 교회는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과 함께 악을 거슬러 싸우게 되는데, 결국 마지막 승리자는 하느님이 되신다.

  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이어 사도들의 편지들이 나온다. 사도들의 편지들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특정한 교회와 수신자들을 위해 씌어졌다. 대부분의 경우 당시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작성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더욱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이하고 보충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가장 길고 많은 편지를 쓴 사도는 바오로이다. 그는 13개의 편지를 썼고, 열네번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협조를 구하면서 자기가 계획한 로마 방문에 앞서 자신을 소개하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미리 알리기 위해 쓴 편지이다. 사실 그는 로마로 가서 사도직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었다. 이 편지는 57-58년경 고린토에서 씌어진 것이다.

  고린토 전후서는 고린토 교회에 생긴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바로잡고, 그곳 신도들이 보내온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쓴 것이다. 고린토 교회 신도들은 파벌과 분열, 그리스교 성윤리, 신도들 간의 송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 등으로 분쟁을 빚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인들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강요하였고, 바오로의 사도적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의 사도적 권위와 가르침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반대자들의 그릇됨을 반박하고 참된 교의를 알려주기 위해 에페소에서 이 편지를 썼다.

  그 다음에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 이 편지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처럼 감옥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옥중서간'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위대한 신비가 모든 신자들에게 밝혀지고, 그들의 신앙과 사랑이 견고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저술했다.

  계속되는 두 편지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자에서 바오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필립비의 신도들과 함께 신앙의 기쁨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나누고자 한다. 후자에서 바오로는 당신 골로사이 교회에 팽배해 있던 이단설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심오한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이어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가 소개된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그곳 신도들에게 시련을 잘 극복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에 정진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며, 둘째 편지는 신도들 사이에 물의를 빚고 있음을 알고 그곳 공동체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에게 엄한 경고와 훈계를 내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와 더불어 '사목서간'이라 불린다. 그 까닭은 바오로가 이 편지들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회의 직분, 교계제도와 조직, 이단에의 대처 등 제반 사목 문제에 관하여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바오로의 서신 중에서 가장 짧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개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형제적 사랑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넌지시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편지로 여겨진다. 이 편지의 시대적 배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유다이즘으로 빠져들 위험이 컸고 이방인 신자들에게서 초기 그리스도교적 열성이 식어가고 있었으며, 박해의 위험 때문에 배교의 가능성이 컸던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시며 종결이시라는 사상을 줄곧 강하게 설파한다.

  계속해서 다른 사도들의 편지들이 소개된다.

  먼저 야고보의 편지 저자는 구약의 지혜문학 형태를 취하여 이 편지를 쓰면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나 시련에 처해 있는 신도들을 격려하고 올바른 도덕 생활을 장려한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1, 1)가 저술했다고 밝히지만, 베드로가 직접 저술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첫째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받는 박해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편지는 당시 교회에 만연하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고, 신앙과 희망에 관해 조소하는 무리들을 바로 잡기 위해 저술한 것이었다.

  이어서 요한이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세 통의 편지가 소개된다. 본문 자체에는 요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첫째 편지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을 요약, 설명하고 신자들에게 바른 윤리생활을 제시하는 윤리서이며, 당시 교회 안에서 발생한 이단을 경계하는 호교서이다. 둘째와 셋째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에 속지 말 것과 형제들끼리의 사랑을 권고한다.

  유다의 편지는 25절 밖에 안되는 짧은 편지이다. 이 편지의 저자는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이단의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자, 그리스도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교리와 나쁜 표양으로부터 영신적으로 오염되지 말 것을 훈계한다.

  예수님을 역사의 종착점으로 제시하는 묵시록을 끝으로 성서 전체가 막을 내린다. 묵시록은 매우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이 세상과 사탄의 힘이 하느님의 업적에 도전하지만, 결국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들의 승리로 끝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나자렛 예수님의 말씀과 언행을 정확히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복음서를 쓴 까닭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요한 20, 31). 따라서 그들은 뚜렷한 신학관점 아래 예수님에 관한 설교나 구두 또는 문서로 전해지는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이용했다. 성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본질을 전해 주지만,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여러 차원의 증거를 들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면에 대해 말할 때는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이 같은 표현을 쓴다.

  엔티엔 샤르팡테에는 '사진현상소'라는 표현을 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위격에 '감동을 받았다'(impressed). 이 감동을 받았다는 말은 사진 용어에도 사용된다. 즉 어떤 물체를 찍을 때 필름이 감광되어(impressed) 찍히게 된다. 찍힌 영상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름을 '현상액'이라는 특수산액이 든 통에 담가야 한다. 제자들도 예수의 위격, 이를테면 그분의 사는 모습, 말씀 그리고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 삶을 깨닫지 못했고 오순절 후에도 모든 것이 검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분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영상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여러 공동체의 생활이라는 현상액 통에 담겨야 할 것이다.

  사진은 감광 시간이나 제작 시간에 따라 다소 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상은 그 영상의 '계시자'나 그 영상을 대하게 될 공동체들, 혹은 제시되는 문제들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 수년 동안의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그리스도의 여러 공동체들은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에 대한 다양한 영상들을 드러내 보이도록 부추기는 무한히 큰 하나의 사진 현상소에 비길 수 있다. 그 영상들이 다른 것은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어떤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교인이 된 옛 유다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공동체들은 이방인들고, 무산계급과 노예들로, 상인들, 공인들, 기술전문가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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