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오늘 이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인쇄

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1-23 ㅣ No.359

하느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고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 나거라!하시자 그래로 되었다. 이렇듯 창세기에서 말씀으로 하시자 그 뜻대로 즉각적으로 세상창조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대성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연중 제3주일)루가 복음1,1-4;4,14-21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창세기안에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위대성과 전능성이 나타납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바로 내일이 아닌 이시간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우리가 아닌 지금 우리가 듣는 가운데!

 

말씀을 통한 창조가 일어나는 새로운 창세기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창조신학과 구원론이라는 신학안에서 하느님나라와 구원은 바로 '지금.여기!"라는 테마를 갖게 됩니다.

 

왜하필 말씀으로 하셨을까요? 듣는 사람도 아직 창조되지않았는데?

 

우리는 말씀을 듣는자는 우리 인간만이라고 교만한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듣는자는 바로 우주 만물입니다.

 

세상 창조때에  무엇이 생겨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그말씀을 듣는 우주만물의 순명을 창조와 피조물의 탄생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이러한 위대한 위업을 창조행위와 그분을 창조주라고 합니다.

 

즉 창세기의 말씀자는 하느님이요 그것을 알아듣는 세상은 바로 피조물입니다.

 

말씀의 선포와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창조행위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창조행위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듣는 자는 바로  창조의 명령, 하느님의 창조의 성령을 받는 수여자임을 나타내며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한 자기 창조의 순간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인식한다는 것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듣지 않는다면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듣는다는 것은 순명한다는 뜻입니다.  순명(順命) 은 말씀  명(命) 을 존경의 마음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명(命)의 명자는 왕앞에서 수건을 머리에 쓰거나 손에 들고 예를 표하며 허리를 굽히는 자세로 이는 현재의 동작을 의미합니다.

이자세는 임금의 현존이 바로 내앞에 와있음을 나타냅니다. 지나간 왕에게 예를 표하는 동작도 앞으로 올 임금에 대하여 기다리는 미래의 동작도 아닙니다.

바로 왕앞에선 신하의 사진입니다.

거룩한 성(聖)자는 세가지 글자가 하나가 되어 의미를 만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바로 듣는것 

이(耳) 가 가장 먼저나옵니다.  그리고 입구(口) 즉 응답이 둘째입니다.

특히 전례안에서 복음선포의 의미를 우리는 깊게 묵상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봉독하려고 사제는 일어섭니다. 또한 신자들 모두 일어섭니다. 이동작은 단순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서를 낭독하시려 일어서시자!라는 말은 단순한 동작의 서술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일어서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지고지손하시기에 일어서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일어선다는 것은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동작이고 진취적이며 겸손한 솔선수범의 자세입니다. 늘 성실하신 하느님!

 

바티카의 성 시스틴성당의 천지창조의 그림에서 하느님과 아담은 서로 손을 내밀어 검지가 닿을랑 말랑합니다. 하느님은 적극적인 얼굴과 동작으로 다가가려 애쓰나 아담은 그리 적극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창조는 하느님의 역동성! 적극성! 겸손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창조의 방법은 바로 대화입니다. 즉 말씀선포와 응답의 구조입니다.

이런 대화로서의 창조방법은 우리주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시는 탄생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입니다.

성자의 탄생예고를 가브리엘 천사의 아룀으로 전해들은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이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지금 그대로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은  "오늘 이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의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응답처럼들립니다.

바로 예수님의 잉태는 마리아가 하느님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믿음과 예수님의 복음선포에서 "너희가 오늘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완악한 마음을 품지 말라"(히브7장)는 성서말씀을 지켜나가야겠습니다.

나의 오늘은 바로 하느님의 오늘입니다. 성모님의 오늘이 나의 오늘입니다.

오늘은 바로 창조의 역동성 구원의 신비가 가득찬 날입니다.

이젠 우리 모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의미없이 습관된 일어섬이 아니라 예수님과함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일어섬입니다.

하느님의 일어섬에 동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어섬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늘하시던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성전에 나가 기도하시고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셨습니다.이는 말씀의 생활화 말씀의 육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미사전에 성서를 얼마나 읽고 공부합니까?

그냥 미사에 와서 준비없이 한번도 묵상하지 않은 성서를 접하지 않은지?

영화를 무엇을 볼까할때 줄거리며 알바오벼 흥행성, 인기도 ,작품성등  그 영화평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과 미사의 전례적 의미를 미리 알아보는 수고는 그에 비해 적습니다.

어느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입구에 이런 말이 써있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들어오지 말아!" 

 

 

 



21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