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5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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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2-02-25 ㅣ No.144

제목:   5 대 5

 

 

 

 5 대 5!

 

 이것은 야구시합의 점수가 아니다. 오늘 미사 때 사제들과 신자들의 숫자이다.

 

주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사제 5명과 신자 다섯분!

 

이곳 뻬루지아는 주로 어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약간의 한국인 교민들이 있다.

 

한국인들을 위한 한인성당이 없으므로 이곳으로 유학온 신부님들이 돌아가면서 성당에서 한국신자들과 함께 주일미사를 봉헌한다.

 

이곳에서 주일 미사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지만 3주동안 신자들은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각 곳에 방(?)을 붙였다. 공책을 뜯어 대학교와 성당인근에 약도를 그리고 미사시간전 20분전에 성당앞에 나아가 혹시 신자분들이 오시다가 헤메지 않을까?해서 맞중을 나가 있었지만 오시는 분은 3주동안 한분도 없었다.

 

한 신부님은 다과를 한 신부님은 미사준비를 맡았고 나는 신자들의 마중을 맡았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한 십여명정도 오실줄알고 과자와 차를 많이 준비하였지만 신자들이 오시지 않자 그것을 미사후에 드시고 일주일간의 공통간식으로 하였다. 그간식의 맛은 조금 씁쓸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북적 거리던 성당과 달리 이곳 이태리의 주일은 무척 한산하다.

 

그만큼 한국의 천주교는 젊다는 것이리라.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신자분들이 성당에 오시기 전에 맞중이라는 것을 한번도 나가본적이 없다.

 

 으례 미사시간이면 많은 신자들이 오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미사에 늦는 신자분들이 싫었다.

 

3주간동안 사제들만 참여하는 미사를 드렸다. 허전하였다. 오늘 미사때는 신자들이 오시려나 기다리는 마음이 자연히 깊어갔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라는 이 말이 왜 그리 깊은 느낌을 주는지?

 

성당에는 당연히 신자들이 계시고 사제들은 그들 주위에 둘러싸여 있고 늘 바쁜 주일이 되는 것이 한국 상황이라면 이곳 이태리의 교회는 무척 다른 분위기다. 좋게 말하면 한산하고 차분하다고 표현할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외롭고 썰렁하다고 할까?

 

한국에서는 주일에 나는 신자들로부터 "신부님! 신부님! 안녕하셔요?"하고 인사를 한 수백명으로부터 수백번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3주간 나는 그 인사를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오늘 드디어 5분의 신자에게 2번 인사를 받았다.

 

 3분은 한국인 신자! 어머니 한분 그리고 중학교 학생 한명 그리고 유치원 학생 한명, 이태리 신자부부 두분!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한국에서 그 많은 신자들로 늘 주일날 바쁘고 북적되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미사를 보면서 우리는 서로 자기 소개를 했다. 사제들 모두 신자분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미사란 함께 하느님의 말씀과 몸과 피를 나누는 감사의 식사이며 제사이다. 어떻게 보면 함께 미사를 드리기 전에 당연히 이름이라도 인사라도 나누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리라.

 

나는 솔직히 한국에서의 주일이 짜증나는 하루가 된적이 많았다. 사제에 비해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미사는  사제에 비해 신자가 너무 작아서 다시 한번 한국에서의 사제생활을 감사하고 그리워 하게 되었다.

 

 오늘은 함께 생활하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신부님도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신부님은 나와 같은 나이에 사제가 되어서  본당의 보좌 신부님 생활을 하시다가 이곳으로 공부하러 오셨는데 그 신자수가 만명정도 된다고 한다. 나보다 더 바쁜 주일을 보내셨으리라. 그신부님은 미사를 주일에 3번드리는데 한번에 천명이 온적이 있다고 하였다. 수백명을 혼자서 성체분배를 할때는 팔이 너무아파서 일요일 저녁에는 팔이 저린다고 한다.

 

 그 신부님이나 나나 참 많은 신자가 있는 본당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보니 그래도 제일 그리운 것은 신자들인 것 같다.

 

 나는 사목을 하지 않으니 늘 신부의 상징인 로만 칼라를 하지 않고 자율적인 복장을 하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왠지 모르는 허전함을 느꼈다.

 

 이 허전함이란 무엇일까? 다른 종류의 여유일까? 한번은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일요일날 가족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할수 있을 텐데!

 

사실 현재의 불가능을 바라는 것은 자신을 향한 피해의식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여유를 접하면서 전에 생활에서는 발견못했던 감사함을 느낀다.

 

 신자분들은 다 나의 이름을 아는데 성당을 오시는 신자분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내자신이 너무나  당연이라는 한단어 속에 내자신을 묶어 놓았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하루였다.

 

 내가 아는 선배신부님중에 그곳 본당에 가면 임기 동안 카드를 매일 매일 신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자필로써서 보내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신자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임기내 까지 외우려고 노력하는 분이시다. 물론 그것이 다 기억되고 기억할수 있냐라는 가능성을 뒤에 두고 그 신부님의 그런한 노력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 신부님 말씀이 좋은 강론도 중요하지만 신자분들의 성함을 부르는 신부가 더 좋아 보인다면서 그분은 그 많은 신자분들의 이름을 외우려 노력하신다.

 

 

 

 얼마전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앞 성직자 숙소에서 몇일을 묵은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각 성당을 몇 번 간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하고 광활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광장과 성당을 보면서 저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이 처음으로 그 웅장함 만큼이나 외로워 보였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저 성당!

 

늘 나는 저 웅장한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척 마음이 달리 느껴진다. 어느 싯구에 이런 말이 떠오른다. "가슴이 넓은 마음일수록 사랑하는 이가 떠나면 더 외로움이 깊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참 마음에 와 닿는다. "그대 있음에!"

 

한국에 있을 때 어린이 미사를 하면서 늘 왜 아이들은 저렇게 철없게 떠들어 댈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성당에서 조용히 시키고 예절을 잘 가르칠수 있을까? 늘 궁리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이들 없는 성당의 적막감이 왠지 그리 좋은 고요함이 아닌듯하다.

 

미사가 끝나고 다과를 하였다. 대화의 내용은 얼마 없었지만 신부님 모두 신자들과 함께 미사드린 기쁨을 이야기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하느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그답은 바로 "그대 있음에!"인 것 같다.

 

하느님은 인간이 있음에 인간을 사랑할수 있고 인간은 이웃과 가족 친구가 있으며 서로를 사랑할수 있고 그리고 그런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할수 있다.

 

바로 사람이 기쁨이고 따뜻함인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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