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식과 지혜

인쇄

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1-03-06 ㅣ No.18

지식은 기억력에서 나오지만 지혜는 묵상에서 나온다.

 

따라서 지식은 머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고 지혜는 영적인 가슴에서 나온다고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성모님을 상지의 옥좌라고 하는가 보다.

 

 

 

요즈음 세상!

 

지식이 풍부하고 빠르게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

 

우리는 자칫 머리만 크고 가슴은 작은 기형아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한 자는 다음의 실패에서 하느님을 원망하지만

 

기도한고 실패한자는 그 실패가 인생의 발판이 되어 사다리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올라간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인간을 지식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비방해서는 안된다.

 

 

 

인간을 판단하시는 분은 유일하신 하느님 한분이시며 그 잣대는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다.

 

 

 

무엇을 결정하거나 남을 판단하기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잣대인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위한

 

가슴앓이 부터 해야한다.

 

 

 

한번이라도 그 가슴앓이를 해본 사람이면 오히려 하느님께 평가와 판단의 역할을 도리어 맡기어 드리려 할 것이다.

 

 

 

이제 로사리오 성월이다. 묵주를 보면 묵주의 중앙에 기적의 패를 단다.

 

그 패의 뒷모습을 보면 성모님의 심장에 칼이 꼿혀 있는 그림을 볼수 있다.

 

 

 

신앙의 지혜는 이렇듯 하느님께 대한 가슴앓이임을 말해준다.

 

 

 

희랍의 어느 철학자는 "흐르는 강물은 늘 그 강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강물은 늘 흘려 변한다. 우리가 어제본 강물은 지금의 강물이 아닌 것처럼 사람역시 늘 변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어제본 강물과 지금의 강물이 같다고 착각한다.

 

 

 

 사람들은 늘 가까운이들이 강물을 바라보듯 판단한다.

 

 

 

 인간은 실수할수 있다. 그러나 실수한 인간은 과거의 인간이고 회개하는 인간은 현재의 인간이며 부활하는 인간은 미래의 인간이다.

 

 

 

 

 

나는 반성문을 싫어한다. 이세상에서 없어져야할 것이 제일먼저 반성문인것 같다.

 

 

 

용서와 이해가 충만하다면 마치 늘 강물이 막히지 않고 정화되며 흐르는것 같은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우리세상은 늘 강물처럼 힘차고 맑을 것이다.

 

 

 

용서와 사랑은 예수님의  "그를 풀어주어 놓아 가게 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댐이 아니셨다. 그분은 남을 구속하는 율법주의라는 댐의 수문을 부수신 분이다.

 

 

 

 

 

 

 

 명언에 "배는 강을 건너라고 만들어진것이고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있는것이다."라고 나와있다.

 

 

 

참 평화는 은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내안에 흐르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댐이 된다면 다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나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물의 흐름을 막지 않고 작은 수로인 개울가가 된다면 작은 송사리며, 꼬마들의 쉼터가 된다.

 

 

 

지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나 인자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지자인경, 인자인애

 

 

 

 

 

용서와 사랑은 잘못을 집고 넘어가는 배상의 의미가 아니다.

 

 

 

 용서를 청하는 머리떨군 이들에게 미소를 짓는 것이 더 아름다운 가슴앓이이다.

 

 

 

그런 가슴앓이를 하는 힘을 얻기 위해 피정을 떠난다.

 

 

 

 

 

피정가는 길에 강물을 보러 청평에 들리리라. 오늘은 강에 나가기 좋은 날씨이다.

 

 

 

오늘따라 하늘물이 파랗다.  참 가을하늘은 높다.

 

 

 

 

 

              -- 기적의 패에 관해 묵상하고



13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