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샤를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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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1-07 ㅣ No.353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사하라 사막의 불꽃 - 샤를 드 푸코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신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양친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버리게 된다

.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투입되어,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큰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 후 군대를 스스로 떠나 학자로서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 곳의 이슬람 교도들이 깊은 신앙 속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다시 가톨릭으로 귀의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수도원 생활을 거쳐

 

그의 나이 43세 되던 1901년 신부 서품을 받은 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되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그리고 그 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가? 
진정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가?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진정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부족함이 없는 신앙을 갖고 있는가?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나는가?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난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한다. 
겉모습은 똑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면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는다.
오직 결정적일 때에 드러나는 법이다.
깨어져 나갈 때, 바로 이러한 순간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信仰人) 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샤를 드 푸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느님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들여다보면 탄식 밖에 더 나오겠는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극대화하여,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 비참한 사람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는 피해망상에 젖는다면 
절망 외에 무엇을 더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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