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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성모신심묵상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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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2-02-09 ㅣ No.16

1. 성모 신심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

 

이성(理性)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참으로 위대하고도 본질적인 힘이다. 이로써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 능력을 통해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이성과 함께 신앙도 주셨다.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상호 조화와 협조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영혼의 활동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관찰해 보면, 이성만으로 믿음의 영역을 설명하고 분석하려 할 때 많은 오류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앙으로부터 이성적 세계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오직 감성(感性)에만 치우쳐 세상을 염세적으로 판단하거나, 영적(靈的)인 요소만을 강조한 나머지 육적(肉的) 요소들을 무조건 평가 절하하는 경우, 신앙은 오히려 인간의 현실과는 괴리(乖離)된 이단(異端)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성모님을 이해하고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성과 신앙이 함께 하는 조화로운 상태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교본 제6장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에서는 무엇보다도 다음 구절이 우리 단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께 의존하게 되는 현상은 우리들의 이성이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마련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대로 존속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섭리를 깨닫고 성모님께 의식적으로 다가간다면 성모님과의 일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질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위의 문장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성모님께 의존하게 되는 현상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 의존하거나 새가 공기에 의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본은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올바른 성모 신심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로 체득할 수 없다. 이제 위의 교본의 내용을 '하느님 섭리'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성모 신심을 해설해 보고자 한다.

 

자녀들은 어떠한 이유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무조건 친밀감을 느끼며 의지하게 될까? 아마도 이것을 이성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녀를 조건 없이 헌신적으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를 미리 연구하고 깨우친 후에야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데는 이성을 통하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성만으로 섭리를 온전히 식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성 역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물론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의식하는 영역과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 전체를 그 범위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해도, 유한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섭리가 온전히 이해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 성서의 요셉의 경우이다.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구덩이에 빠진 그는 에집트로 끌려가 노예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에집트에서 재상이 되고, 기아(飢餓)에서 허덕이는 에집트와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 구하는 위대한 인물이 된다. 그러나 성공이 있기까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선상에서 그가 겪은 순간 순간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예견하여 대처해 나간 시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과 믿음을 통해서 성장한 고통과 인내의 시간들이었다.

 

신약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구원 섭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하필 하느님은 처녀의 몸에서 당신의 아드님을 잉태하게 하셨으며, 왕궁의 왕자로서가 아니라 마굿간에서 탄생하게 하여 구유(말 여물통)에 누이게 하셨을까? 바오로 성인은 그의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인 십자가의 희생은 지혜를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그리고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다.

 

비단 수 천년 전의 성서 속의 위대한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고통과 어둠의 순간을 오직 믿음과 기도로써 인내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끈에 끝끝내 의지하며 겸손하게 생활하는 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가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님의 사랑일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다음의 이야기는 믿음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느 가난한 지게꾼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늦둥이 하나를 두었으나 아내는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고, 그 아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시장에서 묵묵히 지게를 지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공부를 잘하는 어린 아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었고 생의 전부였다. 아들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의 지게꾼 생활에서 얻은 병이 깊어져, 결국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식을 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유품은 너무나 초라했다. 작은 지게 하나와 지게 지팡이 하나, 그리고 피우던 담배 한 갑과 다 헤진 작업복 한 벌! 아들은 아버지의 지게를 장 속에 정성스럽게 보관해 두았다. 몇 년이 지나 아들은 좋은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다 옮긴 후 지게가 보이지 않아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가 그 지게를 버렸다는 것이었다.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간 아들은 여기 저기 쓰레기통들을 뒤지며 지게를 찾아 다녔다. 그러는 동안 검사인 아들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늘 지게를 지시면서도 아들만 바라보면 연방 흐뭇한 웃음을 보이시던 아버지!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지게에 업혀 다니는 것을 좋아하다가, 사춘기가 되어 지게꾼인 아버지가 창피해서 학교에 오시지 못하게 했던 철없던 자신의 모습! 그런 일이 있은 후, 등에 지신 지게가 더욱 무겁게만 보였던 늙으신 아버지! 아들을 등에 업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하셨던 말씀처럼,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다니신 것이 아니라 평생을 자식을 등에 업고 다니셨던 것이었다.

 

아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드디어 지게를 찾아냈다. 검사는 아버지의 지게를 자신의 등에 진 체 버스에 올랐다.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너무나 밝아 보였다. 마치 아버지를 등에 업어 모시는 것처럼 느끼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 지게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요! 이 지게로 등에 굳은살이 생기고 손에는 끊임없이 물집이 생겼다 터지면서도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내셨소! 이제 이 지게는 더 이상 아버지의 등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오늘 나는 아버지를 엎어드린 것 같아 너무나 기쁘오! "

 

그 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약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가는 참 인간이 되었다. 그는 그의 봉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던 그 일로써 제 아버지를 등에 업어드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일을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진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어린 저를 위해 한 평생 사랑으로 저를 업어주신 제 아버지께 조금이나마 보답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치면 그때마다 아버지의 지게를 꺼내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게를 지었으니 당연히 무거운 것이다.' 지게를 지시면서 항상 저를 생각하신 아버지이셨으므로, 저 또한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려 함입니다."

 

수 년 전에 나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이스라엘의 한 초라한 동굴을 찾아갔다. 흔히 성당에서 성탄절을 맞이하여 만들어 놓는 구유는 추워 보이지도 않고 대개는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유럽식으로 마굿간을 형상화한 것일 뿐, 실제로는 동굴이었다. 동굴의 안쪽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이 잠을 자고, 입구 쪽으로는 소와 말 등의 가축들이 있었다고 한다. 통풍은 말할 것도 없고 청결 상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고 어지러웠을 것이다. 그곳에서 말의 밥그릇에 아이를 낳아야 되는 한 처녀이자 어머니가 될 산모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성모님의 입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신세 타령이라도 절로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닌가? 더욱이 얼마 안 있어 듣게 되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예언은, 성공과 영화가 아니라, 남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니 그 어머니의 마음은 칼에 찔린 듯 아플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물건으로서의 지게와 젊은 변호사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지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장식물로서 목에 걸린 십자가와 성물(聖物)로서의 십자가의 의미는 매우 다른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알려주시고, 그것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당신과 같아지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경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거나 밝혀낸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직 그것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이웃들의 고통을 보게 된다. 어떤 때는 "과연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만큼 처절한 삶의 현장을 만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이 약해지고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이 의심스러울 때일수록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와 악과 질병의 고통을 통해서, 사령관이신 성모님께서 그러셨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는 순간들을 쌓아가야 한다.

 

그것을 신학적인 언어로 '어둠의 순간'이라고 한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시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 모든 역경과 신비를 아무 번민도 없이 참아내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올바른 레지오 활동을 위해서는, 성모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실천 사항이다. 교본이 이것을 의무 사항으로 제6장 1항에 매우 긴 문장으로 제목을 삼은 이유는 활동에 나서기 전의 깊은 묵상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는 단원들의 활동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성모님을 통하는 길이다. 또한 성모님으로 하여금 교회의 모든 지체(肢體)들을 돌보도록 정하신 분도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다.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자연스럽게 성모님께 의존하게 되는 현상! 이 현상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맛이 바로 레지오 활동을 통해서 알게되는 맛이다. 사랑은 마음 속에서만 느끼는 의무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충만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실현되므로, 사랑의 실천과 행위에 선행되는 진지한 묵상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해야 할 도구는 묵상이라는 눈이고, 그것을 내 삶 안에서 살아서 이웃들에게까지 실천하는 행위는 곧 성모님의 겸손된 신심을 늘 바라보고 따르려는 신앙인의 생활 속의 노력이다. 따라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성모님의 겸손을 늘 진지하게 묵상하여야 한다.

첨부파일: 완성 6장 1- 성모신심의 묵상.hwp(3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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