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화석과 빵부스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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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5-08-18 ㅣ No.181

 

제목: 화석과 빵부스러기!


요즈음 종교 방송에서 불교와 개신교 방송의 시청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냉담률의 증가는 둔화되기 보다는 높아지고 있습니다.


“천주교 전례의 활력이 없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전례는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말씀은 개신교 방송의 설교를 듣고 요가를 하면서 명상을 하는 칵테일식 종교생활!


우리가 우리의 천주교의 신앙생활, 전례생활안에서  그 의미를 차츰 잊어버리고 생동감을 잃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미사안에서 그리고 기도문안에서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우리의 언어들을 발견합니다. 정말 이 언어의 담긴 뜻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느껴지는 공감(共感)의 언어인가?

그리고 이 말속의 뜻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만들어 졌고 이 말을 만든 사람과 배경은 어떤 것인가?

 전례의 언어는 바로 복음의 언어 성서의 언어 그리고 믿음의 언어이며 삶의 언어였습니다.


 전례용어의 화석화!


미사와 성사 그리고 기도때의 용어들 심지어 복음 속의 사건과 말들이 이제 너무나 느낌없이 그러려니! 하는 얼렁뚱땅하는 듯의 무의성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미사를 시작하며 참회하는 이 전례문장은 형식적이며 도식적인 기원문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들린 이방인 가나안 여자 한명이 부르짖고 계속 간청했던 말에서 기원을 따온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방인 여인이 과연 예의바른 모습과 경건한 톤으로 예수님께 간청하였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급박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며 가난하였기에 그리고 그 아이의 병은 깊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크고 톤이 높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보호하고 이렇게 소란 스러운 분위기가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그 간절한 마음과 처절한 상황은 그녀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오직 사랑하는 딸의 치유만이 목적이었기에

그는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고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처럼 사랑하는 그 누구를 위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지에서 소리를 지르며 군중과 제자를 뚫고 그리고 예수님의 면박도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예수님의 은혜를 얻어보신적이 있습니까?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경지가 바로 이 어머니의 경지입니다.

오늘 바로 이 이방인 여인이 울부짖었던 그 소리가 미사의 처음 그것도 우리자신의 죄와 허물을 반성하고 부당하지만 주님을 만나 생명을 얻고자하는 우리 영혼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서의 문장은 바로 전례의 문장이 됩니다. 성서의 문장은 지어낸 기도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던 이들의 언어이며 상황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서의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 전례안에서 하나되는 기도안에서 만남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전례의 능동적 참여라고 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능동적 참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배워야하며 느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알기”때문입니다.

 오늘 이방인 여인은 바로 예수님의 변박에도 올바로 믿음을 갖고 대답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말을 깊이 묵상하면 이 여인은 이제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이신 그분의 위대함 전능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주인의 상에서 부스러기 하나만이라도 먹게 되면 곧 아이가 나으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성체포라는 것이 늘 제대에는 있습니다. 바로 성체의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다 나누어 주면 성합에는 늘 성체의 부스러기가 있고 사제는 이것을 정성을 다해 모아 영하고 물로 헹구어 마십니다.

그리고 어쩔때는 이물을 처리할때 절대로 하수구에 버리지 않고 작은 화분이나 정해진 땅에 버립니다. 이것을 sacrium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지요! 왜냐면 주님의 작은 성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2000년전 그 어머니는 이 성체성사에서 나누어지고 지극히 작아지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저는 예수님의 작은 부스러기가 된 몸을 마지막에 영하는 사제로서 참으로 미사 전반에 흘러야 하는 저 어머니의 정성된 간구를 하는 열정으로 미사를 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사제는 땅에 떨어진 작은 성체를 주워 영하는 이요!

가장 큰 성체를 영하며 동시에 가장 작은 성체를 영하는 사람이지요!

화석과 같이 굳어지고 의식없이 참여하는 전례에서 빵부스러기 속에서도 커다란 믿음을 담아낼 수 있는 여인의 외침이 들리는 미사를 주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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