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성요셉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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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6-12-18 ㅣ No.344

구원역사안에서 성서안에서 꿈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요셉 모두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꿈을 통해 운명이 바뀐 의인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으로 부터 온 꿈의 내용은 이 두요셉에게는 이해할수도 없는 매우 난처한 내용이었고 자칫 하느님을 원망할수 있는 원인제공 사건이었다.

 

구약의 요셉은 다른 형제들이 자기를 경배하는 꿈을 꾸므로써 형제들에게 질투심을 사서 결국 에집트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은 신세을 한탄하기보다 늘 하느님안에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였다.

 

신약의 요셉 예수의 양부 목수인 그는 시골처녀 마리아가 혼인전 임신을 알고 고민하다가 믿기 어려운 꿈의 천사의 설명을 받아들여야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예수의 양부인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 참 많은 신앙인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제시해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탄의 영성을 조화롭게 하기위해서 사과의 비유를 들고 싶다.

 

사과에서 씨는 바로 예수님이다.  열매의 힘은 늘 씨에서 나온다. 그리고 영양분을 담는 살은 바로 성모님 그리고 요셉은 이모두를 덮고 있는 보호막 껍질이다. 사과에 껍질이 없다면 30분도 안되어서 사과가 산화되어 쭈굴쭈굴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성모님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성령으로 앞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보내셨고 그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운 동의를 받았다는 데 우리는 신비와 존경을 아낌없이 성모께 드리는 것에만 무게 중심이 실린 나머지 예수의 양부 성요셉의 꿈의 가치를 너무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대축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교황이라면 난 오늘 복음서의 내용을 참으로 대축일의 복음으로 선포하면서 '성요셉영보축일'이라고 정하였을 것이다.

 

만약 성모님만 예수잉태에 대한 천사의 아룀에 동의하시고 요셉은 믿지 않고 파혼하였다면 아마도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미혼모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것이다.

 

성모님은 생시에 영예로운 보고를 천사로 부터 받았지만 성요셉은 자신의 배필의 임신사실을 알고 이미 다 파혼하기로 한 후 꿈을 꾸고 나서 그것을 믿고 다시 파혼을 철회한다.

과연 어떤 쪽이 쉬울까? 요셉은 혹시 바보가 아닐까? 꿈의 내용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믿을 까?

우리는 그답을 그가 꿈을 꾸기전의 내용에서 알수 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셈은 의로운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전하였다."

 

인간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보복하려는 본능이 있고 비밀을 폭로하고 다른이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욕구를 강하게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또 주책없게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어둠을 떠벌인다.

 

요즈음 언론을 보면 그리고 사람들을 보면 너무 피할이 많다 무분별하다. 무조건 정보는 다공유하여야 하는지 난 왜그런지 모르겠다.

 

요셉은 매우 고민하였을 것이다. 사랑했던 마리아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나서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남모르게 파혼하려하였다.

 

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이 야속하다. 요셉이 파혼하기로 마음먹기까지 왜기다리실까?

 

그전에 오해를 풀도록 하시지!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인간의 생각인것이다.

어쩌면 이런 요셉의 고민이 훗날 마리아와 성가정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랑을 너무 편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미화를 감정적으로 하지는 않는지?

 

모든것에는 바로 밑거름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때 지우게의 사용없이 한번에 그리는 밑그림이 가능할까?

 

우리는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말을 곱씹어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관상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내에서도 본당이나 교구 수도회 홈페이지에 가끔 서로를 비방하고 잘못된것을 알리는 글들이 올라온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참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한다.

 

진리는 선포되는 것이지 폭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알리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미래과학을 발효과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발효란 잘 썩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헤아리고 헤아리고 헤아려준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헤아림은 이성으로 헤아리는 것이아니라 신앙으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겸손으로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얼마나 참을성이 부족한지?

 

이러한 믿음의 힘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일치할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셉을 성령의 사람 성령의 벗이라고 부른다.

 

성요셉이 그렇게 헤아리고 헤아리고 헤아리고 사셨기에 교회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요셉을 늙은 장부로 표현한다.

 

젊음이 넘치는 것이 생명이고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트렌더속에서 마굿간 구유곁에 계신 성요셉의 얼굴은 사뭇 주름이 간 얼굴이라 어쩌면 재혼한 아버지 (?) 연배라고 생각할수 있겠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그 마음이 어쩌면 사랑하는 마리아를 위한 사랑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꿈속의 천사의 말을 너무나 반갑게 여기고 꿈에서 깨자 마자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집이 가난하였을때의 어느 성탄절 우리 부모님과 우리 형제가 돼지갈비집에 갔을때

우리에게 한점이라도 더 먹이시라고 당신들은 거짓말을 하신 그때!

 

어제 군부대 미사를 가서 점심때 어머니께서 평소 드시지 않는 소주를 두잔이나 비우시며 돼지고기보면 그때생각난다며 ........

 

진리는 가끔 아름다운 거짓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하는 아픈 사랑안에서 더 극적인 만남이라는 축복을 준다.

 

내가 교황이 될 확률은 지극히 적지만 난 성요셉영보대축을 꼭 오늘로 정하고 싶다.

 

요셉 그분은 진정한 사랑의 실천가였다.

 

마굿간에 성가정을 볼때 우리는 너무 아기예수와 마리아만 본다.

 

성요셉의 그 주름!을 우린 올해 경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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