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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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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1-12-15 ㅣ No.12

4. 우리의 어머니신 마리아!

 

어느 한 고아의 입양수속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입양수속을 끝맺혔다. 고아원의 원장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인사드리렴! 이제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이셔!"

 

그 아이의 고개는 계속 떨구어져 있었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저분들이 저의 부모님이시지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주시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자식인 우리는 그분들을 부모님으로 안다.

 

그것은 바로 참으로 말로 표현할수 없는 머리로서의 생각이전에 존재 깊은 곳에 심어진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은 바로 하느님이 심어주신 사랑의 관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바로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며 이 세상의 사랑 중에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가깝다는 어머니의 사랑은 바로 모든 어머니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자식을 갖게된다.

 

그 어떤 어머니도 자식을 낳기전에 머리는 어떻게 인물은 어떤 형태고 성격은 어떻게 주문할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가 아니고 공장의 주인이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상하여 만들고 그 물건은 공장의 주인의 뜻에 따라 모양과 성격과 용도를 갖느다.

 

그러나 어머니는 태어날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에 대한 것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그 커다란 산고를 통해 사랑의 꽃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아름답게 핀 꽃을 보면서 "아! 저 흙속에는 저토록 아름다운 꽃의 씨앗이 묻혀있었구나!"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하느님다운 선물은 바로 "어머니"이시다. 모든 지식과 생각 이전에 사랑! 그 자녀가 악하건 못생기건 똑똑하건 상관하지 않고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보지 않고 사랑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

 

그 어머니의 사랑을 우리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인 자녀들을 어머니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씨로 심으신 이가 바로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중에 꽃이라는 시가 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4. 우리의 어머니신 마리아"는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깊은 묵상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예수님과의 다음과 같은 말씀, 즉 "이분이 네어머니시다." 그리고 "어머니! 이자가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는 마치 잘못이해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니 이제 어머니의 삶의 거처가 없어져서 제자들이 성모님을 모시길  바라는 사형수 아들의 효심어린 마음으로 알아들을수 있다.

혹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너무나 불쌍히 생각하시어 마치 부유한 가정의 어머니가 가난한 한 고아아이를 입양하는 예식을 치루도록하는 의미로 이해될수도 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전적으로 '우리의 양어머니'가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시다.  

 아들을 얻기 위해 모든 어머니들이 산고의 고통을 갖지만 더 큰 고통은 그 아들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죽는 것임은 틀림없다.

  성모님은 골고다의 그 언덕의 고통을 중에 우리의 양어머니가 아닌 생모로서 우리를 낳아주셨다.

 산고(産苦) 보다 더 큰 고통인 친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그분은 바로 다시 한번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명하셨다. 그것은 바로 이세상의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섬기게 되었다.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성부의 말씀을 순명하여 그리스도를 친아들로 갖게 된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시는 그 산고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안에서 이번에는 성자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명하여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의 태속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지만 탯줄로 연결되어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다. 세상에 난 이후에는 탯줄을 잘라 배꼽이 생기지만 육체적 분리이후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성모님의 얼굴을 직접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성모님의 사랑과 기도는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통해 전달되고 도움받는다. 우리는 성모님의 슬하에 늘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라고 복음은 기술하고 있다. 이 결론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마리아가 이제 예수의 모친으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집에 모셨다."는 표현은 단지 그의 집과 소유물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한 인간에 관련된 모든 관심사. 즉 정신적인 것까지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서신학에 있어서 요한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때'에 마리아를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즉 예수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 시작과 그 마지막에 마리아가 함께 하고 있다.

 십자가의 유언으로 통칭되어지는 성모님를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당부말씀은 바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구원사업이 완성되는 그날까지의 성모님의 신적인 모성을 나타내는 근거가 된다.

 은총의 계획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 부터-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뽑힌 이들의 수가 찰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을 조금도 감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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