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2주일(나해) 마르 9,2-10; ’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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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2-09 ㅣ No.5675

사순 제2주일(나해) 마르 9,2-10; ’24/02/25

 

 

 

우리 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 번 습관처럼 몸에 밴 버릇은 고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또 혹자는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다만 노력여하에 따라 정화될 수는 있다고 합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한 가지씩 다짐합니다. 여러분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변화되고 싶은 것을 정하셨습니까그런데 정말 변화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가끔 우리가 세운 결심이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사그라지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하려니까 잘 안 되는 것이고, 또 이미 틀이 잡혀진 기존의 삶의 구조와 흐름 속에,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니 힘들고,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기존의 삶에 안주하려는 육의 경향이, 우리를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그렇게 간절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못하니, 그럼 그냥 그렇게 포기하고 자기 신세나 한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우리는 우리의 결심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우리를 결심하도록 하게 한 바로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또 우리의 결심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후손을 강성하게 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100세가 다 되도록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00세가 돼서야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분통하고 억울해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천사를 시켜 말립니다. 그리고 자식 대신 숫양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당시 근동지방의 관습을 거부하시고, 아버지에게 자식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던 아브라함을 더욱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식 귀한 줄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당신 아들을 우리 인류의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크신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 라고 전합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 라고 청합니다. 복음사가는 그 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 라는 말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기 보다, 불편해 하셨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줍니다. 이어 예수님의 함구령이 내립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9)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사실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이유를 루카 복음사가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라고 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모습을 보고, 그 영광된 모습을 잘 지키고 걸맞게 모시기 위해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에 고개를 숙여 경배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화려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해야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실현하려고 하시기에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런 것을 기대합니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나의 편익과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진정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우리가 세례받은 주님의 자녀요 사도로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기여하고, 온 인류가 구원될 수 있도록 헌신하며,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킵시다.

어떻게 하면, 온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주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서 이룸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앞당깁시다.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주님의 사도로서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노력합시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여 주님의 말씀을 우리 삶과 활동 안에 실현하며 거룩해지기로 다짐합시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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