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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언서 에제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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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43

 

 

 

구약 예언서 에제키엘 입문

 

 

-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구약성서 새번역'11, 임승필

 

 

 

    1. 이스라엘 역사의 대전환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함께 이른바 ‘삼대 예언서’를 이루는 에제키엘서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이라는 말로 시작한다(1,1). 이때 에제키엘이 계시를 받고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햇수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다 왕국의 요시아 임금이 종교개혁을 실시한 해(기원전 621년)를 기준으로 했다든가, 신바빌론 왕국 느부갓네살 임금의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2절에는 “여호야긴 임금의 유배 제 오년”이라는 다른 연대가 나온다. 이로써 원래는 1절의 말만으로 충분했는데, 이 예언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말마디가 빠졌든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해서, 2절의 설명을 보태야만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편, 3세기의 오리게네스 교부 때부터, 이 “삼십”이라는 숫자가 에제키엘의 나이를 가리킨다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추측이 제시되었다. 이 추측이 맞을 경우, 에제키엘은 25살 때 여호야긴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이 된다. 이렇게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대신 이국 땅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유배의 햇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시간의 기준이 된다. 1장 2절 외에도 8,1; 26,1; 30,20 등 곳곳에 ‘제 몇년 몇월 몇일’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마지막 40,1에는 “우리의 유배살이 제 이십오년 연초 초열흘날, 곧 성읍이 함락된 지 십사년째 되는 해”라는 가장 길고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에제키엘은 ‘유배 때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유배는 처음이면서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는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더 큰 유배를 예고해야 한다.

    에제키엘은 유배 제 오년에 “유배자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 있다가, “하늘이 열리면서 ……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보게 된다(1,1). “그발 강”은 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이다. 에제키엘을 위시한 유다인들은 “텔-아비브”라는 마을에 배치되어(3,15), 이 수로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특히 1장에서 24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 유배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틀을 이루지만, 안으로는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또 장차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관심의 초점이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바빌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유배자가 마음대로 장소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에제키엘의 활동 무대가 문제로 떠오른다.

    먼저 에제키엘은 바빌론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면서 유다가 멸망할 무렵에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이를 수정한 이른바 ‘두 무대 활동 가설’이 나온다. 에제키엘이 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후기에는 바빌론에서(또는 거꾸로 전기에는 바빌론에서, 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혹은 이 두 곳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에제키엘은 “네 동포 유배자들에게 가서 일러라.”라는 사명을 받는다(3,11). 그는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이다. 이 유배자들은 비록 한 지방에서만 살고 정해진 작업을 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경우에는 원로들이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집도 가지고 있다(8,1). 사람들은 이 유배살이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배자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조국의 땅을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이, 더 간절히 그리워하였다(시편 137 참조). 그 고국 땅은 격동의 혼란 속에 있다.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서로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예언자는 지금의 유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운명이 고국과 동족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배자들의 관심의 초점인 예루살렘에 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이렇게 유다의 운명적인 시간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처럼,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약한다. 예레미야는 유배자들에게도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예레 29장). 에제키엘 역시 편지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예언하였다.

    그렇다면 ‘첫째 유배’는 무엇이고, 다가오는 멸망과 더 큰 유배는 무엇인가?

    이때 근동의 패자는 신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이다. 그는 이미 기원전 605년 왕자의 신분으로 근동 전역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경쟁국 에집트의 느고 파라오를 쳐부순 적이 있다. 이로써 이 지역의 양 축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종주국도 바뀐다. 그러나 느고가 609년에 왕위에 올린 유다의 여호야킴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예언자까지 죽이면서 자기의 안락과 호사만을 좇는 이기주의자이면서 동시에(예레 22,13-17; 26,20-23), 국제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우둔한 군주였다. 그래서 이 폭군은 기회를 엿보다가 601년에, 드디어 대제국에 반기를 드는 무모한 모험을 단행한다(2열왕 4,1).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유다가 비록 조그만 왕국이기는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저항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유다를 징벌할 여유가 없어, 이웃 여러 나라를 시켜 유다로 쳐들어가게 한다. 이 와중에 여호야킴이 전사하고, 열여덟 살의 여호야긴이 그 뒤를 잇게 된다. 마침내 598-597년에는 느부갓네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면 공격을 단행한다. 즉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그리하여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왕궁과 성전의 기물들을 앗아가고, 임금을 비롯하여 모후와 왕비들도 잡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도층 인사들도 많이 끌어간다. 그 가운데에는 사제 가문의 출신 에제키엘도 끼어 있었다. 이것이 ‘제1차 유배’이다.

    충격적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태는 이제 내리막길을 달린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한 인사들은, 우유 부단한 시드키야 임금을 끼고 반바빌론-친에집트 정책을 편다. 그들은 에집트의 사주를 받아, 독립을 쟁취할 뿐더러 바빌론에 빼앗긴 기물들을 되돌려 받게 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예레미야 예언자만이 이러한 정치적, 특히 종교적 오판, 광신적 민족주의에 맞서 고군분투한다(예레 27장 참조). 그러나 예레미야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고, 유다 왕국은 끝내 바빌론에 다시 반기를 든다. 결국 기원전 587년 8월에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왕자들은 처형되고, 임금은 눈이 뽑힌 채 귀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약탈을 당한 궁궐과 성전은 불에 타 파괴된다. 유다 왕국이 망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성전은 이교도들의 손에 의해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보다 더 큰 충격과 비극은 있을 수 없었다.

 

    2. 민족 비극의 한가운데에 선 예언자

 

    에제키엘은 조국과 동족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이 큰 불행을 유배지에서 바라보며, 그리고 이 운명적인 587년 이후에는, 폐허가 된 조국과 뿔뿔이 흩어진 동족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모아진 에제키엘서는 상대적으로 긴 책이면서도, 그 안에 이 예언자 개인에 대한 사항은 별로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에제키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제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는 또 혼인까지 했는데,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즈음에 부인이 갑자기 죽는다(24,18). 유배를 당해 끌려간 그는 또 자기 집에서 원로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환시를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1,1.4 이하; 3,10-15; 3,22 이하; 37,1 이하 등). 그는 많은 상징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 증세와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자기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 이런 특이한 현상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으로는 에제키엘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는 내적 긴장 상태의 사람이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몸이 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경 쇠약에 걸린 것은 아니다. 그는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세계와 그분의 계획에 깊이 관여된 인간이다. 여기에서부터 내적인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심리적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에제키엘은, 어떤 학자가 지적하였듯이, 가슴 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규범과 규정 속에 사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예언자이다. 또한 정열적인 설교가이면서,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차없이 멸망을 선포하는 사자이면서, 구원을 예고하는 예언자이다. 그는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또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심사숙고하고, 꿈꾸는 듯한 이상주의자면서 현실적이며, 냉정하면서도 동정심 많은 인간이다.

    이러한 극단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소명이다. 그리고 이 소명은 대전환기의 소명이다. 그는 멸망해 가는 세계와 새롭게 일어나는 세계의 중간에 선 예언자인 것이다.

 

    3. 에제키엘 예언서

 

    예언서를 통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방식, 곧 사건별이나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제키엘서도 다른 예언서들처럼 일종의 ‘선집’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같은 주제가 직접 관계가 없는 여러 갈래로 전개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말씀들이 선택적으로 일관성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34장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주제들이(예레 23,1-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1장에는, 서로 잘 부합되지 않는, 분명 중복되는 요소들이, 또는 문법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덧보태진 세부 사항들이 뭉쳐있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한 큰 책임은 에제키엘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논리성에는 별 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스승의 신탁들을 토막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3,22-27; 4,4-8; 24,15-27과 33,21.22는 계속되는 한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때로 서로 직접 관련이 없는 신탁들을 인위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21장에서는 “칼”이 서로 무관한 단락들을 잇는 ‘연결 낱말’로 쓰인다. 곧 주님의 칼(6-12절), 잘 갈아 날이 선 칼(13-22절), 바빌론 임금의 칼(23-32절), 암몬인들을 치는 칼(33-37절) 등이 그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같은 신탁을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인다. 예컨대 ‘주님의 의로운 길’에 대한 생각은 18,1-32와 33,10-20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에제키엘이 이 책의 이러한 현재 상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에제키엘 자신이, 자기가 이미 쓴 문장들에 갖가지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리고 기존의 장들에 갖가지 단락들을 때로는 너무 많이 채워넣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애초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환시 이야기라든가(1─3장; 8─11장) 예언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4,4-17) 보충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문법적 문제들이 이 예언서를 읽기에, 그리고 우리말로 옮기기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에제키엘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간단한 구조로 정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루살렘 멸망 이전

        (1) 환시와 소명: 1 - 3장

        (2)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 4 - 24장

    2. 이민족들에 관한 예언: 25 - 32장

    3. 예루살렘 멸망 이후

        (1) 구원 예고: 33 - 39장

        (2) 새 예루살렘: 40 - 48장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 에제키엘서는 전체적으로 첫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은 곧 심판의 예고에서 약속의 예언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일대 비극적 사건이 그 경계를 이룬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 비극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유다 왕국에 불행을 끼치고 슬픔에 빠진 유다인들을 조롱하는 민족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다.

 

    4. 에제키엘의 가르침

 

    에제키엘의 삶과 자세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느님 영광의 현현으로서, 이것이 사제인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만든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서, 이것이 멸망의 선포자 에제키엘을 구원의 예고자로 변화시킨다.

 

    (1) 하느님 영광의 현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힌다. 이 영광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1,28; 3,23; 8,4; 10,1; 43,2), 그때마다 에제키엘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대경 실색하며 실신 상태에 빠진다(3,15).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구름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불이 보이고,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난다. 이 날아다니는 네 생물은 궁창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어좌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좌에는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인 채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다. …… 이것이 주님 영광의 모습이다(1,4-28).

    결국 에제키엘은 자기의 대선배 이사야가 본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이사야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 환시를 보게 된다. 이사야는 주님의 초월성, 온 세상의 임금이신 분의 영광에 대한 숨막힐 듯한 계시를 받는다(이사 6,3). 그런데 온 세상의 임금이시라는 점이 에제키엘의 원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들어있지 않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원초적 직감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면들을 첨가시킴으로써, 이 진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로써 바빌론의 동물 신화에서 따온 환상적인 짐승들에 대한 긴 서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언자는, 바빌론인들이 우주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이 짐승들을 주님을 섬기는 존재로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킬 듯한 바퀴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도 나름대로 주님의 영광이 어떤 곳으로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계시로 압도당한 에제키엘은 자기의 왜소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의 영광 앞에서,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는, 서있을 수조차 없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다(1,28; 2,2; 3,14-17.22-23). 그러한 그에게 주님의 손이 무겁게(3,14) 내리시고(1,3; 3,22; 8,1; 33,22; 37,1; 40,1), 또 그분의 영이 내리시어(2,2; 3,24; 11,5) 그를 들어올리신다(3,12.14; 8,3; 11,1.24; 43,5).

    그러나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본다(11,22.23).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거처인 시온을 떠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듯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결별의 동기를,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땅의 풍토병과 같은 이 악의 중대함과 만연함과 깊이를 밝혀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이 죄는 폭행이며 사람들의 피를 쏟는 범죄 행위이다(7,23; 9,9; 16,36; 18,10 등). 이러한 죄를 예언자는 적어도 한 번, 하느님에 대한 불경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36,18). 에제키엘이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14,1-8). 그는 이 불경이 이스라엘 땅의 모든 언덕 위에서, 모든 큰 나무 밑에서(6,3.6.13; 16,16; 20,28.29) 자행되는 모습을 본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8장). 그는 성전의 안뜰 대문 어귀(3-6절), 뜰(7-13절), 북쪽 대문 어귀(14.15절), 안뜰 성소와 제단 사이(16절) 등 곳곳에서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표시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또한 백성이 일상 생활에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과 부도덕이기도 하다. 이것을 예언자는 성소에서 사용되던 죄의 고백 형식을 빌려 서술한다(18,5-9; 22,3-12.23-30).

    에제키엘은 죄가 역겨운 짓이며 혐오스러운 짓이라고(6,9; 16,22.52)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것은 배우자를 배신하는 부정이고 간통이며 창녀짓이다. 예언자는 이 주제를,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버려진 아기의 비유’에서 전개시킨다. 이 여자 아기는 받아주고 좋아해주는 이 없이 피투성이로 들판에 버려지지만, 주님께서 발견하여 살려주시고 양녀로 받아들이신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리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종국에 가서 “뻔뻔스러운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16장). 에제키엘은 오홀라(북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오홀리바(남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라는 두 자매, 몰염치한 창녀짓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 두 여자의 역사로써, 이 주제를 되풀이하여 설명한다(23장).

    결국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빠져버린 이 추잡한 부정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소돔의 이방인들(16,49-50), 띠로의 임금(28,2.5.17), 에집트인들(30,6.18), 그리고 파라오들이(32,12; 35,13) 저지른 죄이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만하는(16,15.56) 아내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이기도 하다(7,20.24; 33,28). 이는 또한 당신 뜻에 따라 당신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저버린 유다 임금이 저지른 죄악이다(21,30-31).

    한편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고 어머니는 헷 여자로서, 이교도적인 배경에서 생겨났다(16,3.45. 3절의 각주 참조). 예루살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배신은(20장)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손을 들고 맹세하시면서,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하고 당신을 알려주셨지만(20,5), 이스라엘인들의 이 에집트 체류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곧 이스라엘인들은 그뒤 그 무엇으로도 포기시킬 수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이다(20장).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과 함께,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 예언자로 내세워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음식처럼 예언자 안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단맛으로 그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3,2.3). 그러나 그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라고 외칠 때마다(3,11),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2,6 참조).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사실은 유배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리 반항한다 하더라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2,5).

    이런 에제키엘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이다.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악인이 자기의 악한 길을 버리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인에게 생명을 지키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해야 한다(3,16-21). 이는,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18,1), 죄를 지은 자만 죽고,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8,4-20). 의인이든 악인이든 저마다 자기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혼자 책임을 진다.

    그러나 예언자가 만일 악인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하면, 적절한 질책이 없어 죽어가는 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3,18). 예언자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이라는 집단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예언자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영감만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예언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이들은 벽에 균열이 생겨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는데도, 거기에다 회칠만 하는 미장이와 비슷하다. 백성의 죄악을 치유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만 공포하는 예언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13장).

 

    (2) 예루살렘의 멸망

    백성의 죄악은 무서운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이 심판이 다가옴을 보고서는, 말과(7; 9 - 11장) 행동으로써(4 - 5장) 그러한 사실을 지칠 줄 모르고 예고한다. 이 예고는 어떤 사람이 와서 불행이 완료되었다고, 곧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그 슬픈 아침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에제키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이다. 자기의 고통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분부를 받기는 했지만(24,15-27), 그는 동포 유배자들이 겪는 것에 결코 못지 않는 아픔을 느낀다. 사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33,10), 그리고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기에 이른다(37,11).

    이러한 절망 속에서 에제키엘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들고 나온다. 그는 우선, 불행에 처한 이스라엘인들을 빈정거림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든 나라들에게 징벌을 예고한다. 이스라엘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언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괴이한 말과 어려운 언어를 쓰는 많은 민족”이, 이스라엘보다 말을 더 잘 들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예감한 바 있다(3,6). 그러나 이제는 이 민족들이 하느님의 심판정으로 소환된다(25 - 32장). 그 가운데에서 에집트가 으뜸 피고이다(29─32장). 에집트는 유다 왕국의 임금 시드키야가 맹세와 계약을 저버리고(17,19)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도록 유인함으로써(17,15),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한편, 띠로는 적군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에 대해서 부당한 뜻을 품은 것으로 드러난다(26,2). 그리고 팔레스티나 땅에 있는 이웃 민족들, 곧 암몬, 모압, 에돔, 그리고 불레셋, 모두가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움을 품는 잘못을 저지른다(25장).

    그런데 지금까지 불행의 “예표”로서(12,6)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해야 했던 예언자는, 이제 구원의 선포자로 변모한다. 이미 이전의 신탁들에도 위로의 말마디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곧 심판과 멸망에서 살아남을 “남은 자들”의 주제가 여러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언급으로 그치기 때문에, 그것이 부차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철저한 멸망을 암시하는 에제키엘의 상징 행동(5,1-2)은 12-13절에서 설명되지만, 예언자가 말하는 의도에 잘 들어맞지 않으면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5,3-4절의 상징 행동에 대해서는 뒤에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 구절이 원래의 신탁에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반면에 9장에서는 이 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것이다(9,4).

    그래서 유다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멸망 뒤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6,8-10; 9,4-8; 11,13; 12,16; 14,22.23). 그러나 이들은 보잘것없고 약할 뿐더러(11,3 참조), 어쩌면 예루살렘에 쌓아놓은 시체들에 불과한 자들이었다(11,7). 그래서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만으로써는, 유배자들이 지니던 그나마 가냘픈 희망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의깊은 “파수꾼”인 예언자 에제키엘은 결국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올라선다(13,5 참조). 폐허 위에 올라서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선포한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다. 바로 바싹 말라버린 해골들이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장면이다(37,1-14).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가 줄어들고 또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생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해골더미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이다.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시는 주님께서(12,25.28; 17,24; 22,14; 36,36; 37,14)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리라.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들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이러한 이상적인 삶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이제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실현된다(37,15-28). 이 새 왕국의 백성은 더 이상 자격 없는 지도자들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다(34,1-10). 주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어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신다(34,11-16). 그리고 전에 임금으로 갖가지 특권을 누리던 다윗의 후손들은 그저 백성 가운데에 있는 한 제후가 될 뿐이다(34,24).

 

    (3) 궁극적 전망

    예언 활동을 마치면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그는 이 백성이 “마지막 때”에(38,8) 모든 원수들에 게서 승리를 거두게 됨을 본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스라엘과 맞선 적군 앞에는 호전적인 마곡 땅의 곡, 곧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 제후”가 서고,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 서있다. 이스라엘은 이들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멸망시킨다. 그리고서는 그들의 무서운 무기들을 땔감으로 쓴다.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들의 시체들을 맹금과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준다. 그리고 시체가 이스라엘 땅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시켜 일곱 달 동안 적군의 주검들을 찾아 땅에 묻게 한다(38 - 39장).

    끝으로 에제키엘은 이렇게 승리한 이스라엘이, 역시 새롭게 된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리라고 예고한다. 이 땅은 엄격히 수학적으로 경계가 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분할된다(47─48장). 그리고 생명에 가장 중요한 물은 이 땅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성전에서 흘러나온다(47장). 이 성전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서, 바로 이곳에서, 성전으로 돌아온 주님의 영광을(43,1-12) 찬미하는 전례가 모든 규정에 따라(40; 46장) 거행된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제부터 이 새로운 백성이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중심이 된다. 그곳이 어떤 신비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자기 예언서의 마지막 말, 곧 “야훼-삼마(야훼님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표현으로밖에 엿볼 수 없는 그런 신비이다(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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