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게시판

우리시대의 목자 고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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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숙 [hhhs6006]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1097

 

  

 할머니 추모수필을 수정하다가 잠시 쉬면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자막에 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보가 나왔습니다. 선종(善終)은 선시선종(善始善終)의 준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잘함'이라는 뜻입니다.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입니다.


 충남 연산에서 태어난 김수환추기경님의 이름이 순한이었는데 호적서기가 잘못 표기하여 수환이 되었으며 아호는 옹기(甕器)이고, 세례명이 스테파노였습니다.  

훌륭히 싸우셨고, 달릴 길을 잘 달리셨으며, 믿음을 지키시고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스테파노 김수환 추기경님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2 디모데 4 : 7-8)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시편23편 1절과 사목표어가 그 분의 묘비명에 새겨졌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이것은 아닌데, 이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길을 따르며 때론 도망치고 싶었다는 고백에선 고뇌가 전이되어왔습니다.  고뇌를 극복하고 개인을 넘어서 사랑과 믿음으로 숭고하게 87년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은 늘 유머를 즐기셨습니다.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시다가 기차여행을 하면서 계란을 파는 상인을 보고 삶의 해답을 얻으셨습니다. '삶은 계란, 삶은 계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은 나도 잘 모르는데요."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나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학생이 있으면  " 나도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영어, 일어, 독일어, 라틴어, 한국어 5개 국어를 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몇 개 국어를 하십니까? 라고 물었는데 추기경님이 오히려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특히 두 개 언어를 잘 하는 데 무엇일까요?

영어와 독어,  라틴어와 영어, 일본어와 독일어라는 다양한 대답이 나왔는데 참말과 거짓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초근목피에 허덕이는 교우들을 도우려고 영작을 하여 1000만원을 원조로 받아와서 안동 목성동 성당 교우들에게 주었다는 말씀을 듣고 영혼과 육체를 함께 살리려는 진정한 목자임에 고개가 숙연해졌습니다   

  
  김수희의 '애모'란 노래를 부를 땐,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는 울고 싶어라. (중략) 당신은 나의 친구여"라고 '남자'를 '친구'로 개사하여 부르셨습니다. 유쾌하게 들리던 '애모'가 오늘은 석별의 노래가 되어 슬프게 들리는 듯 합니다.
 

김 추기경님은 봄엔 주님의 농부셨습니다. 여름엔 파도가 넘실대는 넉넉한 바다이셨습니다. 또한 한여름엔 태양을 닮은 열정이섰습니다. 가을엔 붉은 단풍과 마음을 적시는 강물을 닮은 구도자이자 철학자이셨습니다. 겨울엔 따뜻한 위로자요 불의에 맞서 날카로운 화살을 쏘는 예언자이셨습니다 (사제수품 50주년 이해인 축시 중)

 

라만 아도 위안이 되고

면 힘이 되고

한 하늘아래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는 당신은 이 시대의 위대한 바보셨습니다.

박성규의 추모글에서 발췌(2009. 02. 19) 

 

추기경의 입관이 거행된 19일 오후 5시. 그 시각, 추기경 주치의인 이강우 교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남성모병원 내분비내과 에 근무하는 '도미니코'교수는 신앙의 씨앗을 심어준 추기경님과 인연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
 

법정 스님의 글 중에서 발췌(2009. 02. 20. 조선일보) 



 추기경님은 신학생 시절엔 "나같은 존재가 신부가 될 수 있을까? 신부가 꼭 되어야 하는가? 일생을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를 할 때도 있었으나 축농증 수술을 하느라 한 학기 쉴 때 <성인이야기>를 읽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연관짓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뒤에 박봉으로 어머니께 삼을 사다 드리셨는데 아마 어버이날 태어나서 효심도 그러한가 봅니다.



 곰인형을 늘 침대 맡에 둔 것으로 보아 순수함이 짐작되며, 왼쪽으로 비뚤어진 입이 있는 장애인이 그려준 초상화를 아끼셨습니다.  삭발례 때 가장 큰 영적인 기쁨을 체험한 추기경님은 1969년 세계의 136명 중 최연소 추기경(47세)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prince of church (교회의 왕자)임에도 빈자와 약자편에서 그리스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2005년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사건 후 심경을 묻는 인터뷰에서 아무말씀도 않고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과학자 한 사람의 윤리문제가 아닌 총체적 사회구조의 문제로 봐야 한다시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동안 '정직'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 버렸다고 안타까와하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추기경님은 이제는 직접 하느님을 뵈었을 것입니다. (욥기 42, 5)
 참되자. 부즈런하자. 최선을 다하자. 최연소 추기경, 최다, 최장기, 3다 기록을 가진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떠나셨어도 판화에 새겨진 진실, 근면. 최선을 다하자는 추기경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며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하셨다 합니다.  
 

고통과 고난이 올 때마다 추기경님은 이것만 없으면 더 좋겠는데... 라고 하시다가 곧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아니다. 이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내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므로 이것도 감사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김수환은 OOO다."라는 빈칸 채우기 질문에 스스로를  "바보야"라고 채우시고  자화상을 그리셨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빛나는 진주같은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유한한 삶을 "무한한 삶"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세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진실한 이웃이 되셨으니까요.

 

 

   

일제치하에 다니던 신학생 시절에 황국신민선서를 쓰라는 기말 시험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라고 답을 써서 김수환 추기경님은 장면교장선생님께 불려갔던 장면이 가장 감명스러웠습니다. 부바르디아꽃의 꽃 말은 나는 당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인데 김수환추기경이야말로 하느님의 온전한 포로가 되셨습니다. 2008년 추석에 못다한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엔 못다한 일은 다 적을 수 없이 많으며 꼭 해야할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70평생을 회고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책을 두 권 내셨습니다. 여생을 돌아보는 2년 전의 글은 숙연하게 합니다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66년 전인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돼야 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걸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김추기경의 선종을 지켜본 김영균(프란치스코,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죽음을 의연하게 맞을 준비가 된 분이라 그런지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노환은 진단명이 아니지 않느냐? 내게 오래 입원할 진단명 하나 붙여 달라"고 농담을 건네며 의연하게 투병하셨다고 정인식(루카, 강남성모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전했습니다.

1969년 3월 29일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난 기자회견에서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린다"면서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쁘다"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내가 한 첫말은 '임파서블(impossible, 불가능한)'이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고 회고하셨습니다

우리시대의 세계적인 목자 김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순수, 소박, 소탈하게 모든 이의 밥과 빵이 되고자 숭고하게 이 땅을 살다 가셨습니다.

 

 

 말을 아끼고 책을 가까이 하라. 노점상에서 깎지말고 웃음을 생활화 하라. 텔레비젼을 가까이 하지말고 성내지 마라. 기도로 녹슨 쇳덩이를 녹이고 이웃과 등지지 마라. 자기를 낮춤으로 선을 행하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사랑이 내려오는데 70년 걸렸다는 인생덕목 열 가지를 남겼습니다.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안구까지 기증하고 가셨으니 넉넉한 아버지요, 넉넉한 할아버지로 역사와 함께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복음(25 :40)을 진정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장열한 애도의 대열은 추기경님이 세계의 목자였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그가 어떠한 인간이냐에 있습니다."(「사목 헌장」 35항)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외와 순서없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대신해줄 수 없는 죽음을 누구나 경험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시던 우리시대의 진실한 목자였습니다.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나도 언젠가 맞이해야 하는 대 명제 앞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성찰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 우수雨水 >는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대동강물도 풀리게 합니다

풀과 나무의 싹과 벌레들을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우수를 이틀 앞두고 가신 님이여

봄의 전령사 버들강아지도 눈을 뜨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가슴에 봄비를 내려주고 가신 무소유의 성자여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도 녹여 주시고 용서와 사랑, 나눔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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