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사랑도 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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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6-17 ㅣ No.413

 

 

<사랑도 빚입니다.> ... 윤경재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7,36-50)

 

 

  지금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고 있는 거리의 여인들은 예수님 당시에는 불가촉민(不可觸民)이라 하여 누구도 접촉할 수 없는 죄인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거의 나병환자 정도로 배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부인이 월경 중에 손댄 물건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따지고 들었던 바리사이들에게 이 죄녀와 같은 여인이 한 장소에 같이 있다는 것마저 불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는 그래도 교양 있고 분노를 속으로 삭일 줄 아는 관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기꺼이 초대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죄녀가 집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구태여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귀한 손님을 모시고 속 좁게 실랑이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이 죄녀가 어떻게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아무 설명이 없지만, 그녀는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그 절망은 다름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흔히들 인간이 사랑을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합니다. 특히 여인들에게는 자신의 사랑을 베풀고자하는 본능이 더 깊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주고 싶은데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고통은 바로 지옥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미움이 되고 증오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죄녀에겐 사랑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배출하는 욕망을 처리하는 하수구라고 여기고 씻을 수 없는 자괴심이 늘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랍니다. 우리는 애초에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지복직관을 얻을 수 있는 동반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게 제한해 놓았으니 그녀에게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 죄녀는 예수를 만나뵙고 나서 자신이 지닌 사랑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아무 가감 없이 받아주실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한 여인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만으로도 소박맞고 죽을죄가 되는 사회에서,  죄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무모하게만 보이는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맞아죽을 각오로 보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녀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다른 경우와 달리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직접 죄녀에게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칼 라너는 “인간은 본래 외로운 존재로 창조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이 인간 본성의 일부이거나, 외로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은 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인가에 사랑을 쏟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 라너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것 즉 명성, 부, 권력, 섹스, 향락주의 등등에 그 사랑을 쏟을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 성령 안에서의 기쁨, 의로움, 아가페적인 사랑에다 쏟을 것인지 선택할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칼 라너는 인간이 세상적인 것에 사랑을 쏟는 것에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바꿀 때 연옥체험이 일어난다고 언급합니다. 그때 고통이 수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주는 연옥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복된 탓이여”라는 말의 진의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죄녀는 이 세상에서 연옥의 고통을 예수님을 통해서 겪어 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곁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뜨거운 눈물이 분수처럼 솟구칠 것입니다. 그녀는 난생처음 자기의 사랑을 누군가에게 내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서러웠겠으며, 얼마나 기뻤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눈물로 발을 씻을 만큼 많이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입니다. 슬픔의 눈물일 수 없습니다.

 

  이제 그녀도 사랑을 할 대상이 생겼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예수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갈바리아 언덕, 십자가 밑에서도 자리를 지켰고, 주간 첫날 새벽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바리사이 시몬은 사랑을 할 줄 몰랐습니다. 사실 그는 관용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랑을 베풀 수는 도저히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지켜서 하느님께 나갈 수 있으니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채무자의 처지를 전혀 이해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왜 인간이 빚을 져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듯이 열심히 살아간다면 빚을 지는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다보면 아무 낭비도 하지 않았는데도 빚을 질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병으로 사고로 빚보증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8절에서 “사랑도 빚”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기워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겸손 되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죽기까지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그대여 나의 울음 받아 주세요

  꼭두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지고 나서도

  소쩍새 우는 것은

  사랑해 달라고 기억해 달라고가 아닙니다

  그저 들어 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내가 당신을 아끼고 있는 것

  막지만 말라는 부탁입니다

  아주 가끔

  정말로 어쩌다가

  휘파람 한 번 불어 주신다면

  아니 돌멩이만 던지지 않으신다면

  아니 울게끔만 놓아 두신다 해도

  나의 평생 당신께 바쳐도

  행복하겠습니다.

 

 

 

 

 

  The Power Of Love - Vienna Symphonic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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