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성토요일 부활 성야 미사(나해) 마르 16,1-7; ’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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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3-10 ㅣ No.5709

성토요일 부활 성야 미사(나해) 마르 16,1-7; ’24/03/30

 

 

루치펠(루시퍼)이라는 대천사가 있었답니다. 루치펠 대천사가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느님이 사람을 구하시는 방법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느꼈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가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잘못하면 사랑으로 용서해 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꾸 용서를 해주면 해줄수록 , 나는 죄를 지어도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어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고 죄만 더 커지지 착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무서운 벌을 내려, 다시는 죄지을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루치펠은 대천사에서 악마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봅시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살면서 이러저러한 불평 불만은 있어도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 있고, 일가친척이 있으며, 내 가족과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어제 자면서 오늘 아침 일어나 다시 숨쉬며 살아갈 것을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리고 또 어제를 근거로 하여 오늘 다시 살아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요, 오늘 다시 살아날 정도의 상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눈 뜨고,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충만하게 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세상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모르거나 또는 싫어서 죄를 짓습니까?

우리의 눈과 마음과 생각은 우리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도 모르는 새, 옳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 속에 그런 것들을 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향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불편해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루치펠 대천사의 지적처럼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듭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때는 우리가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여 내가 먼저 취하기 위해, 나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편의를 위해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 홀로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을 헤쳐나가야만 하는 인간 조건 속에서, 나만이라도 내가 처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죄를 짓고, 나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죄중에 계속 머무르게 되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악의 노예가 되고 내가 아닌 악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사도 성 바오로도 말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5.17.24)

 

하느님의 입장은 우리와 사뭇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들을 용서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욱 더 큰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악마의 굴레 속에 더욱 더 깊숙이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의 영광이 점점 그 사람에게서 사그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 진선미를 향하게 하는 하느님의 의지를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들이 그만큼 사그라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도 점차로 잊혀져 가고, 대신 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츰 죄악의 노예로 변화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 세계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영영 다시 찾아볼 수 없고, 사람들은 죄악이 이끄는 절망과 파멸의 길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결실로 생겨난 자유롭고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들의 인격과 품위가 손상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 자체가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참으로 하느님의 본성을 파괴시키는 심각한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민하셨습니다. ‘과연 상처받고 손상되고 죄악으로 물들어 훼손된 사람과 세상을 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생성된 사람과 세상이 손상됨으로써 그만큼 파괴되어가는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복구하시기 위해 하느님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삼위가 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제2위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사람들을 구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외아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세상이 그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랑의 진실을 가르쳐주시고 또 기적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씻기 위해 봉헌하는 제사인 속죄제희생제를 드릴 때, 잘못한 사람 대신 동물들을 번제물로 바치듯이,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일찌기 야훼 이레에서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고 다시 그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께 돌려주셨습니다. 아버지가 극진한 사랑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시는 그런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죄악에 빠진 인간들의 죄를 씻으시는 희생제를 봉헌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희생제사를 봉헌하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아들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4)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 증인이십니다." (사도 5,31-32) 라고 전합니다.

 

주님 부활을 맞이하는 오늘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살리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희망을 간직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콜로 2,12-13)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마르 16,3) 하며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의 근심 앞에 선 천사의 말마디가 오늘 우리에게 진실한 희망과 위안을 가득 안겨줍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6)

 

그리고 천사는 제자들에게 일러줍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들과 이방인들의 도시 갈릴래아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7)

 

십자가상의 패배로 절망감과 패배감으로 쳐져있던 제자들은 갈릴래아, 곧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공생활을 시작하셨던 그곳, 제자들과 처음 만났던 그곳, 가난한 이들과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셨던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던 그 때 그 순간을 기억해 봅시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어려운 이들 안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을 떠올려 봅시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봅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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