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답답함과 두려움과 아름다운 감사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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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6-09-30 ㅣ No.319

예로니모 성인은 당시 희랍어로 쓰여졌던 성서를 당시 대중의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하여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성서를 읽고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신 대학자 이십니다.

 

그 분은 단순히 희랍어 성서를 라틴어 성서로 옮긴 성서 번역학자이상의 성인이셨습니다.

 

그분의 상본을 보면 늘 해골 바가지에 손을 얹고 깊은 묵상에 빠져 성서를 바라보시는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이 그림은 참으로 깊은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존경하던 스승은 그에게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는 순간 교만에 빠지게 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책인 이 성서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십자가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죽거든 예모니모에게 나의 해골을 전하여 주어라!"하였다고 합니다.

 

예로니모의 책상위에 있는 그 해골은 바로 다름아닌 스승의 것이었고 스승은 예로니모에게 성서를 대하는 겸손의 징표로서 자신의 해골을 선물하였던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묵상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답답함과 두려움 그리고 아름다운 감사!

 

우리가 성서를 접할때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어색한 단어나 문장 상황을 만날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특히 오늘날 처럼 우리의 문화와 사회가 바쁘고 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이때 명확하고 계산이 바로 나오고 분석되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로니모 성인은 우리가 성서를 대할 때 그리고 기도할때 우리의 답답함은 바로 겸손이며 하느님은총의 초대장이라고 합니다.

 

성모님도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였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갈때  그 사람의 말와 마음을 늘 명확하고도 신속하게 모두 이해할수 없습니다.

 

처음 엄마와 아빠가 되었을 때 아이가 울었을 때 당황하고 답답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양육합니다.

 

내자신안에서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속의 평가로 보았을 때 답답함은 무엇인자 풀리지 못해서 느끼는 심리적인 불편함정도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열의안에서 다가오는 답답함과 지루함은 바로 그분께 올바로 그리고 겸손하게 다가가기 위해 천사를 보내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성당에서 성서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참으로 저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 답답함과 모호함을 신학교 강의실에서 학문을 통해 도움받고 다시 강의실에서의 답답함을 성당에서 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묵상노트가 신학강의록이었고 신학강의록에 저의 묵상을 적어놓았습니다.

 

성서 공부 없는 성서묵상, 성서묵상없는 성서 공부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상호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단계는 두려움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늘 해골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만지면서 성서를 묵상하면서 결국 이렇게 작은 존재인 흙으로 될 해골바가지인 내자신이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자체가 커다란 두려움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다는 그 사실!

 

성서를 읽을 때 어떤 두려움이 든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천사의 아룀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두려움은 도둑이 경찰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헤아릴수 없는 사랑에 대한 벅찬 감동입니다.

 

그 다음은 바로 아름다운 감사입니다.

 

성서를 묵상하면서 시간의주인이신 하느님! 만물의 주재자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자신이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간을 지내고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어두가운데서도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으로 아름다고 복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계약을 지키시는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올 5월달에 저는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은 바로 예로니모 성인이 성서를 번역하였던 동굴이었습니다.

 

그 동굴에서 참으로 불편하고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정말 하루종일 어디에 정신을 쏟고 사는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 성서를 하루 24시간중에 얼마나 생각할까?

 

판단이나 감정을 처리할때 성서를 떠올리는가?

 

오히려 이  불편한 동굴에 있었던 예모니모보다 성서를 떠나 세상의 가치라는 동굴에 있는 우리자신의 영혼이 더 불편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굴을 떠나면서 저는 예로니모 성인에게 진정한 불편함 진정한 답답함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 이스라엘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것이 아니다. 마실것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이 야훼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아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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