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요한 18,1-19,42; '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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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3-10 ㅣ No.5708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요한 18,1-19,42; '24/03/29

 

최상훈 유스티노 신부님 강론

 

누군가에게 앞으로 가고 싶어하는 길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물으면, 당연히 많은 이가 이왕이면 안락하고 풍요로움이 따르는 길을 바란다고 답할 것입니다. 설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왕이면 작았으면 좋겠고, 고통이 있다면 가능한 피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네 인지상정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답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주하고 있는 오늘은 그렇지 못해 보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써도, 삶의 거친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잘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두고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참으로 좋으시다는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시다는 분께서 왜 이런 시간을 우리 앞에 놓으셨는지 따져묻게 됩니다. 하나 그분께서는 시원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치워주지도 않으시고, 아픔도 그대로 놓아두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답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닌, 하느님을 놓치는 실수를 종종 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전례 안에서 기억하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다가오십니다. 물론, 그 고난과 아픔의 길이 당신께 던진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고,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십니다. 그 길 위에서 그분은 우리가 겪는 그 무엇보다 더한 모욕을 받아내시고, 보다 더한 배신과 고독을 감내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십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바로 우리를 위한, 보다 더 정확히는 우리 각각이 겪었던, 겪고 있는, 겪게 될 시련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를 눈물로 받아들입니다. 그 안에서 위로를 받고, 사랑을 누리며, 삶에 감사할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의 배움으로 이제 우리는 가고자 하는 길의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 길의 끝에 놓인 것을 보고 바랄 줄 알게 되었습니다. 힘들다 하더라도, 설사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이시며, 스승이시고, 또 친구이신 그분과 함께하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더 이상, 마냥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 마음 안에 새겨진 십자가를 깊이 간직하며, 주님의 사랑을 삶 안에 담아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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