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처럼 만의 재난봉사 휴무를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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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817 지요하 [jiyoha]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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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전을 갑니다. 잠시 후 6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우리 태안성당의 친화분과장 최종환 요셉 형제의 승용차로 갑니다. 명미순 글라라 여성분과장과 홍헌표 베드로 신학생이 동행합니다.
목적지는 대전 문창동성당이고, 목적은 우리 본당의 보좌신부로 발령 받으신 문창동성당 출신 이원화 요셉 새 신부님을 모셔오는 일입니다. 요즘 건강이 좋지는 않지만, 그 일은 당연히 본당 총회장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새벽 3시경 일어났는데, 원래 출타를 할 일이 있으면 집중을 요하는 일은 아예 하지 못하는 습성인지라, 인터넷 서핑이나 하면서 지난해 1월 22일의 '가족메일'을 올해의 같은 날인 오늘 내 홈페이지 '공동체' 주막의 '가족공동체' 방에 올려놓는 일을 하고 보니, 지난해 요즘의 슬프고 고달팠던 나날들이 아슴히 그리워지기도 해서, 일부분을 굿 뉴스 형제 자매님들께 소개하고픈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운 이해 바랍니다.
모처럼 만의 재난봉사 휴무를 이용하여
†. 사랑·평화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22일(화)
어제(21일/월/大寒)에 이어 오늘도 날씨 관계로 해변 기름제거 작업이 중단된 상태네. 오전에 눈을 맞으며 성당에 걸어가서 안산에서 오신 '동정성모회' 다섯 분 수녀님들을 돌려보내 드리고, 목포와 익산에서 오시기로 한 분들이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내일(23일/수)도 날씨 상황이 불투명하고 접수된 인원도 적고 해서 모두 오시지 않도록 전화 연락을 했네. 24일(목)에나 방제작업이 재개될 것 같네.10시경 집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충남예술> '표지인물' 원고 작업에 착수했는데, 일단 발동이 걸렸고 모처럼 만에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얻었으니, 오늘 하루 바짝 고부라지면 상당한 진척을 볼 수 있겠지만, 11시 30분쯤 다시 성당에 가야 할 일이 있어 그 동안에 '가족메일' 작업이나 우선 '해결'을 보려고 지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일세.
1980년대에 제3대 태안성당 사목회장 봉사를 하셨던 류병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씨(아버님 대자)에게서 12시쯤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모시고 자택으로 와달라는 전갈이 있었네. 신부님께서 두부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자매님이 집에서 두부를 만드셨다고, 곧 이임하시는 신부님께 두부로 점심 대접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었네.
사무장님이 성당에 출근을 했으면 나는 슬그머니 집에 앉아서 작업을 하고픈 마음인데, 기름전쟁 때문에 사무장 휴무 일인 화요일에도 계속 근무를 해온 사무장님이 날씨 덕분에 모처럼 만에 휴무를 하게 되었으니….
★21일(월)의 에피소드 두 가지
어제도 날씨 관계로 방제작업이 중단되어 집에서 쉬면서 작업을 좀 했는데, 어제는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었네. 어제 1월 21일이 아녜스 성녀 축일이어서 누님께 영명축일 축하를 하려고 아침에 댁으로 전화를 드렸네. 그런데 매형이 전화를 받으시더군. 매형께 오늘이 누님 영명축일임을 알려 드리고 축하를 전해 주시도록 부탁을 드렸네.그런데 매형이 나한테서 전화 받은 얘기는 쏙 빼고, 당신의 아내에게 영명축일 축하를 했다고 하네. 깜짝 놀란 누님이 자신도 모른 영명축일을 남편이 어찌 아는가 싶어 의문을 표하니 "남편이 자기 마누라 영명축일도 모르겠느냐"는 대답. 세상에 없던 일이라 거듭 놀라고 감격을 한 누님이 저녁때 친정 어머니 안부가 궁금하여 친정에 전화를 한 탓에, 내가 아침에 전화한 사실을 알았지 뭔가.
결국 누님과 나, 그리고 나로부터 얘기를 들으신 어머니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네. 시치미 떼고 난생 처음 아내에게 영명축일 축하를 하신 매형의 능청 덕분에 한바탕 배꼽을 잡고 웃었으니, 어찌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저녁 6시 성당에 가서 지하식당에서 가진 '형제사랑회'의 마지막 결산 모임에 참석했네. 2003년에 시작한 모임이 5년 약정에 따라 이날 결산 모임을 가진 것일세. 그새 5년이 흘렀다니…!
18명 회원 중에 5명이 부모님 타계로 재급을 탔고, 13명이 재급 미지급 상태. 남은 돈을 13명에게 배분하니 한 사람당 115만원씩 수령을 하게 되더군. 115만원이 든 봉투를 받아든 자리에서 즉시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네.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써야 할 돈이지만, 이 돈으로 성인상 값을 치러서 미납금 400만원을 300만원으로 줄여놓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렸네.
어머니를 위해 가입한 상조 모임이고, 당연히 어머니께 드려야 할 돈이기에 우선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얻으려는 뜻이었네. 어머니는 당연히 두말없이 찬성을 하셨는데, 옆에서 그 통화를 들은 최병석 재정분과장이 이런 말을 하더군.
"정말 참 효자시네요."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런 대답을 했네. "효자 되기도 쉽고, 효자 소리 듣기도 참 쉽구만." 이 말을 하고 나니, 다음 순간, 정말로 효자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 그 사실을 절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네. (허, 묘하게 은근히 내 자랑을 한 것 같구만!)
지난 14일(월)부터 어제 21일(월)까지 일주일 동안의 내 생활 메모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가족메일'을 마치겠네.
그럼 이만….★21일(월)
아침부터 눈이 내림. 아침에 안양 누님께 아녜스 영명축일 축하 전화를 했으나 매형이 받음. 대전 큰처남께 처남 댁 1주기 위로 전화를 함. 오전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되고, 군청 재난대책본부로부터 휴대폰 문자 메시지와 음성 메시지로 작업 중지 통보가 옴. 9시경 버스 터미널에 가서 마누라를 서울 남부터미널로 보내주고, 성당에 감. 수도원에서 온 수사님들이 바다에는 갈 수 없는 사정에 따라 성당 언덕길 눈 치우는 작업을 함. 교육관동 현관에서 10여 명 수녀님들께 들려주시는 신부님의 말씀을 잠시 듣다가, 사무실과 재난봉사본부 상황실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오전 11시경 집으로 옴. <대전일보> 류용규 문화체육부장에게서 전화가 옴. 어제 보낸 글을 지면 변경에 따라 1850자로 늘려서 다시 써달라는 부탁. 오후에 그 일을 해결하고, <충남예술> '충남의 예술인' 원고 작업 착수. 오후 6시 성당에 가서 지하 식당에서 여는 '형제사랑회' 마지막 모임에 참석. 신부님도 오시게 함. 미지급금 115만원을 수령하여 100만원을 성인상 값으로 지출키로 하고, 박원현 6대 총회장에게서 6년근 홍삼 엑기스 1병을 사고 50만원 중 20만원을 지불함. 재난봉사본부 상황실에서 봉사단원들과 잠시 환담을 나누다가 8시 30분경 귀가함.
*<시사저널> 여기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23일(수) 재난봉사 취재 및 인터뷰 약속을 함.
*마누라가 종합 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 '보라매병원'에 3일 예정으로 입원. 우선 4가지 검사를 받았다는 전갈.★20일(주일)
서울 신림4동 성당, 화양동성당, 인천 청학성당, 경주 성동성당, 전주 팔복동성당, 대구 가톨릭성모병원 등 500명 정도 작업을 함. 작업 주선을 해주고 곧바로 성당으로 올 생각이었으나, 먼저 대구 가톨릭성모병원 버스 2대를 안내해 간 윤길상 전례분과위원장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돌아올 수가 없어 현장에 머물게 되어 또 주일 교중미사에 참례치 못함. 사리 만조가 된 오후에도 인천 청학성당과 서울 신림4동 성당 등 일부 인원은 3시경까지 작업. 수녀님들 도움을 받아 서류 발급 작업 후 모든 차량들을 차례로 배웅해 드리고 오후 4시경 성당으로 돌아옴. 인근 육군 부대들에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저녁 위문 봉사를 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함. 그리고 다시 성당에 가서 저녁미사에 참례하고, 미사 후 잠시 사무실에 머물다가 9시경 귀가함.★19일(토)
서울 노원성당, 김포성당, 인천 송현성당, 수원 율전성당, 구미 송곡성당, 전주 팔복성당 등에서 무려 1200여 명이 태안을 찾음. 내가 1차 안내를 한 다음, 점심 급식 차량, 가재용 관리장, 조호식 총무 등이 차례로 안내를 함. 연병장에 차량이 가득 찬 관계로 일부 버스는 다른 장소에 주차를 했고, 잘못 찾아온 감리교 차량 세 대를 건너편 부두로 보냄. 샛길로 갈 수 없는 버스 한 대는 내가 직접 승차하여 안내함. 많은 인원으로 작업 준비가 매우 부산함. 그 부산함에 비해, 오후 2시까지 밀물이 계속된 물때로 인해 작업 상태는 만족스럽지 못함. 점심식사 후 너무 일찍 떠나는 버스들로 더욱 혼잡. 일찍 떠나려는 이들을 제지하기도 함. 김포성당, 율전 성당, 노원성당, 송현성당, 팔복성당 등은 오래 남아서 작업을 함. 군청 직원 최기홍 청년이 중학교 동창 최상엽씨의 장남이고 소년 시절에 영세한 내 대자(빈첸시오)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암. 그때부터 그를 대자로 부름. 김포성당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과 김영호 암브로시오 총회장님과 재회하고, 2001년 오마이뉴스 지면에서 깊이 알게 된 팔복성당의 최종수 신부님을 처음으로 만나 무척 반가워함. 최종수 신부님과 소주 한 잔으로 반가움을 나누고, 내 차에 부산 금정동성당 청년, 서울 대치동성당 아가씨 2명과 우리 성당 여고생들을 태우고 오후 4시 성당으로 돌아옴. 서울 노원성당 보좌신부님과 청년 신자들, 인천 송현성당 보좌 신부님과 청년 신자들이 우리 성당(대성전)에서 오후 3시와 4시, 차례로 미사를 지냄. 성당 봉사자들의 저녁식사 자리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집에 들렀다가 다시 성당 경유 신부님 사무장님과 함께 한식음식점 '비원'으로 가서 최근 개업한 '효성한방병원' 최정호 모세 원장, 수사 출신 오병근 베드로 의료실장과 함께 저녁식사. 9시경 귀가하여 일찍 취침.
★18일(금)
오전 9시 성당에 가서 2008년 1월 교무금 25만원을 사무장께 드림. 서울 역곡동성당, 대구 대안동성당, 대구 지산동성당, 대구 가실성당, 서울 성가소비수녀회 등에서 오신 350명이 모항2리 해변에서 작업. 작업 시작 후 11시쯤 태안 읍내로 나와서 읍사무소와 하나은행과 태안신협을 들르고, 서산 가야기획을 들른 다음 홍성 외환은행엘 갔으나, 마누라 도장을 잘못 가져간 탓에 미국 누이에게서 온 돈을 찾아 생질에게 송금하는 일을 하지 못함. 황당함. 오후 2시 40분쯤 모항2리 해변으로 돌아가 자원봉사자들의 작업 마무리를 도와줌. 대구에서 오신 독일인 신부님과 성가소비수녀님들께 책 선물을 함. 4시 30분쯤 본당으로 돌아와, 군부대 위문 담당자들이 나를 기다리다가 4시쯤 출발했다는 최병석 재정분과장의 말을 들음. 타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도 많이 계신 모항2리 작업 현장에 태안성당 총회장으로서 끝까지 머무르며 배웅을 해드려야 할 필요성을 최병석 형제 등에게 얘기함. 성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게 되어 6시경 귀가, 모처럼 만에 가족과 저녁을 함께 하고 8시경 마누라와 함께 성가대 연습에 참여.
(아침에는 서울 역곡동성당 신자들 수십 명을, 오후에는 서울 성가소비수녀님들 10여 분을 사제관으로 데리고 가서 사제관 안의 기념이 될만한 물품들을 모두 가져가게 하시는 신부님을 보면서 '무(無)'를 추구하는 가톨릭 사제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는 한편으로 신부님께서 곧 우리 본당을 떠나시게 된 사정을 다시 떠올리며 애틋한 슬픔을 느낌.)
*오후 1시 태안읍 신터미널 인근에서 태안군 유류 피해민들의 '특별법 제정을 위한 대정부 촉구대회'가 열림. 행사 진행 도중 태안 읍내의 횟집 주인 지창환씨가 음독 후 분신을 시도함. 생명이 위독한 상태.
*모항2리 해변에서 성당으로 돌아올 때 대전일보 류용규 문화체육부장으로부터 긴급 원고 청탁 전화를 받음.★17일(목)
부산교구 해변사목, 청주 수곡성당, 부천 소사성당, 서울 중계동 성당, 서울 성가소비수녀회 등 250명을 모항2리 해변으로 안내. 모두 작업장에 투입해 놓고, 먼저 만두로 이른 점심을 들고, 12시경 태안 읍내로 나옴. 홍성 외환은행 김한미 대리와 통화한 후 농협 군청출장소를 다녀와서 어머니 모시고 태안신문사와 우체국에 들렀다가 태안의료원에 가서 건강 체크. 어머니를 집 앞에 내려드리고 곧바로 모항2리 해변으로 달려감. 작업을 마치고 나오기 시작한 신자들과 수녀님들과 운전기사들께 봉사활동확인서, 세금공제를 위한 기부금확인서, 고속도로통행료 면제송장 등을 떼도록 안내하고, 부천 소사성당 신부님으로부터 구호금을 받고, 신자 일부를 배웅해 드리고, 4시경 서강대 대학원생 한 명과 인천에서 별도로 온 자매 두 분을 내 차에 태우고 옴. 성당 지하식당에서 봉사단원들과 함께 저녁식사. 큰 아귀로 끓인 아귀 탕이 별미. 저녁미사가 없어 일찍 귀가한 덕에 밤샘 작업으로 <충남예술> 원고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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