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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5일 (월)연중 제34주간 월요일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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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21: 성 요한 23세 교황 (4) 공의회 첫 회기 중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 발표

69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2-10-31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21) 성 요한 23세 교황 ④ (제261대, 1881. 11. 25~1963. 6. 3)


공의회 첫 회기 중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 발표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 왼쪽부터 윤공희 주교, 황민성 주교, 라리보 주교, 나 굴리엘모 주교, 서정길 대주교,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5대 주한 교황사절, 초대 주한 교황공사, 초대 주한 교황대사), 노기남 대주교. 이탈리아 rai-TV국영방송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공의회 첫 회기의 시작은, 개막식 다음 날인 196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교황님, 유전적 가족 내력으로 위암 치료가 불가하다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초인적 정신력으로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현대 사회에 다가가고, 그 세상 안에 있기를, 갈라진 형제와 타 종교와의 대화와 일치를, 하느님 말씀인 성경의 영감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공의회 발표 후, “난 지금 죽어도 괜찮아요”라고까지 말씀하셨다니요! 그만큼 공의회가 절실하셨던 것이지요.

 

 

전 세계 교부와 신학자 2000여 명 참석

 

자, 공의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2000명이 넘는 교부들과 신학자들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더군요. 공의회에 전문가(Perito)로 참석한 32세의 젊은 독일 신학 교수였던 라칭거(베네딕토 16세 교황)는 “우리는 공의회에 참석하며 마치 새로운 성령(Pentecoste)께서 오시는 듯 가슴이 벅찼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부는 “제가 대성전의 문을 지날 때 마치 천국을 향해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밀라노대교구 교구장이었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열린 창문으로 느껴지는 정말 맑은 공기와 드디어 교회가 다른 현실들과 마주 설 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라고 공의회 첫날에 대해 훗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의 이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사도들과 함께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사도 15,6)

 

당시 언론들도 “공의회가 뭔가요?” 하고 어리둥절하였다는데 교황님도 아셨나요? 그 질문에 어떤 이는 “몰라요. 여는 거랍니다. 그냥 활짝 연대요!”라고 대꾸하며, 우왕좌왕하였다는 뒷얘기도 있었지요. 공의회는 라틴어로 통일해 진행되었으니 하루하루의 공의회 진행 사항을 정리해 활자화시켜야 할 언론들은 힘들었을 것이 당연했지요. 공의회 교부로 참석했던 전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1926∼2020)는 “사목에 관한 실제적 안건과 함께 우리 주교들은 머리를 맞대고 평화롭게 회의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로마 언론들은 주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서로 분쟁을 일으켰다고 기사화한 걸 보고 참으로 황당했습니다”라고 전하면서 “물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룹으로 회의하며 한 분 한 분 정직하게 배려하는 모습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참가자들과의 평화로운 회의 진행에 희망을 품었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 한국 교회에서 30대 중반에 참가했던 저의 교구장이셨던 나 주교님의 에피소드 하나 알려드릴까요? 나 주교님 옆에는 나이 드신 수염이 긴 프랑스 주교님이 앉아 계셨답니다. 오전 첫 시간이 끝나면 화장실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오는 게 오전 회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아 갈 무렵, 어느 날 일이 터진 것입니다. “어이, 젊은이! 제발 자리 좀 지키면 안 되겠나? 앉았다, 일어났다, 참 정신 사납군!”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기가 죽은 나 주교님이 바라본 프랑스 할아버지 주교님은 공의회 3년 내내 꼿꼿하게 자신의 자리를 흐트러짐 없이 지켰답니다. 아, 보석 같은 16개의 공의회 문헌이 이러한 교부들의 진정성 있는 참가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느님 진리를 위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요한 23세 교황이 자신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서명하고 있다. 이탈리아 rai-TV국영방송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평화를 바라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편지

 

공의회 첫 회기 중,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교황님을 진료하러 급하게 달려온 전문의에게 그러셨다죠? “아, 박사님! 저는 박사님께 제 몸을 맡깁니다. 박사님은 제게 당신 영혼을 맡겨 주시면 어떨까요?”라고 하시며 고통 중에도 당신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는데 정말인가요? 그가 무신론자임을 아셨던 당신의 위트에 진료를 마치고 나온 의사는 펑펑 울었다고 그러더군요. 공의회 개막 다음 해, 첫 회기가 진행되던 1963년 봄부터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지만, 당신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시기 불과 두 달 전인 4월 11일 성 목요일에 당신의 마지막 회칙인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발표하셨지요. 보통 회칙의 첫 시작은, 가톨릭교회 구성원인 주교단과 신자들을 호칭하는데, 여기서는 종교와 상관없이 지상의 평화를 바라는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셨지요. 당신은 이 회칙이 어디에 묵혀지는 걸 바라지 않으시고 정의와 사랑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죠. “평화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전임 교황 비오 12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60년 전에 당신이 ‘평화, 평화, 평화’를 그렇게 외치셨는데, 6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 선종

 

아, 당신의 병세는 암 덩어리가 위를 뚫고 나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파파 부오노의 병세를 알게 된 수많은 신자가 광장을 메우기 시작했으며 눈물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 머리맡에 걸린 고향 소토 일 몬테의 사진을 바라보며, 당신 부모 형제들을 떠올리셨겠죠. 일찍이 당신 형제들을 바티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비오 10세 교황께서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당신도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더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 당신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들려오는 신자들의 기도에 감사의 축복을 보내시고는 옆에 있는 이들과 이별을 하셨습니다. 슬픔에 겨워 울고 있는 돈 로리스에게 “돈 로리스, 정말 고마웠네. 아, 소토 일 몬테가 그립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돈 로리스는 “교황 성하, 꼭 제가 그곳에 가서 살겠습니다” 하고 답변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후에 그 약속대로 돈 로리스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그날 당신이 하느님의 집으로 가던 그때 첫 기적이 일어났다고요.

 

1963년 6월 3일 저녁 8시 30분께, 하느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미워하던 밀라노의 한 대학생이 집으로 가던 길에 온 시민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파파의 마지막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뭐, 돌아가시면 다른 교황이 나오겠지” 하고 말하였답니다. 집으로 다다른 대학생은 집에서 들리던 어머니의 통곡소리와 함께 동네 친구가 달려와 자신을 부둥켜안으며 “돌아가셨어, 파파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말하며 엉엉 우는 그 친구의 말에 그 대학생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며, ‘이미 파파는 내 마음에 자리하고 계셨음을, 앞으로 내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그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교황님, 제가 신문지상에 당신을 언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람된 일인지 송구스럽습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반성도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사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공의회 정신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하느님 백성인 저 자신부터 희망을 품고 성숙해지겠습니다.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2차 바티칸 에큐메니칼 공의회이니, 오늘의 레시피는 유다-로마식 소고기 음식인 스트라코토(Stracotto)이다. 기원전 161년 무렵 로마에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의 마카베오기(1마카 12,16; 14,18 참조)에 나올 정도로 로마의 유다인 공동체는 유럽 안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유다인 공동체는 1만 50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로마시에서도 매력적인 곳에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레시피 : 소고기 스트라코토(Stracotto di manzo)

 

▲ 준비물 : 소고기 목심 400g, 양파 1개, 샐러리 한 줄기, 당근 1개, 토마토 2개(씨를 빼고 썰어놓은), 적포도주, 소금, 후추.

 

→ 큰 볼에 양파, 당근, 샐러리를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 담는다. 세 가지 채소에 쇠고기를 넣고 버무린 다음 고기가 잠길 정도로 포도주를 붓는다. 뚜껑을 덮고 냉장고에 6~7시간 마리네이드(조리 전에 식재료를 술이나 산, 향신료 등에 재우는 것 또는 그 액체)한다. 고기를 꺼내어 약간 약한 불에 올리브유를 두른 깊은 팬에 고기를 넣고 겉면이 바삭해질 때까지 굽는다.

→ 거즈에 천연 향신료 로즈마리와 통후추를 같이 넣고 새지 않게 묶어둔다.

→ 마리네이드한 채소를 포도주에서 건져 고기가 구워지는 팬에 소금을 넣고 같이 익힌다.

→ 남은 포도주와 거즈에 싼 로즈마리, 후추와 토마토를 넣고 약한 불에 대략 4~5시간 고기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익힌다. 고기를 꺼내 접시에 담은 다음, 팬에 남은 채소 소스를 갈거나 그대로 고기 위에 얹어 낸다.

 

▲ 모니카의 팁

 

유다인들의 휴일은 토요일이다. 휴일에 먹는 스트라코토는 천천히 오랜 시간을 익히는 섬세한 맛의 유다인 요리이다. 물론 좀 다른 조리법의 스트라코토도 이탈리아 북부 쪽에는 있지만, 돼지고기를 안 먹는 유다인들의 소고기 스트라코토는 아직도 로마시에 있는 그들의 게토 주변의 유다인 식당에서 인기 높은 메인 요리이다. 미리 만들어 놓고, 그 다음 날에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슬로우 푸드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0월 30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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