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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5일 (월)연중 제34주간 월요일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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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저에게도 나병을 주소서, 환우들의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89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3-10-09

[허영엽 신부의 ‘나눔’] “저에게도 나병을 주소서, 환우들의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주시어 환우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환자들을 돌보던 다미안 신부님이 45세 때 자신도 결국 한센병에 걸렸을 때 드렸던 기도라고 합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Koekelberg)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다미안은 1840년 벨기에의 한 마을,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미안은 먼저 수도회에 들어간 형의 영향을 받아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해서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수학했습니다. 다미안은 하와이 선교단에 자원해서 1864년 하와이로 건너간 뒤 그해 5월 호놀룰루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당시 하와이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감염된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1873년 한센인 환자들이 사는 ‘몰로카이’로 파견을 자원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이 나환자 수용소 몰로카이섬에 갔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습니다. 젊은 다미안 신부님은 환우들과 전 세계의 교회나 구호단체 등에 편지를 보내 몰로카이섬의 참상을 알리고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신부님의 편지로 몰로카이섬의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구호의 손길이 전해졌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구호금으로 집을 짓고 수도 시설을 놓고 농사를 지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환자도 여전히 많았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나환우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고름을 짜주고 환부를 씻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척 냉소적이었습니다. 일부 나환자들은 “하느님 사랑이 다 무슨 헛소리인가!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를 이토록 썩어 문드러지게 내버려 둔다는 말인가? 그따위 사랑은 건강한 자들만의 사치한 잠꼬대야!”라고 빈정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고통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미안 신부님 자신도 나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섬 전체가 달라지며 저주의 섬이던 몰로카이는 기적처럼 평화의 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극도의 적대심과 경계심을 갖고 다미안 신부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환우들도 그를 믿고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정성과 관심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과로와 나병이 악화하여 결국 1889년 4월 14일 선종했습니다. 1889년 선종의 순간 다미안 신부님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환우들과 하나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몰로카이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그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섬에서 조국 벨기에로 이장되었습니다. 평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한 다미안 신부님은 주검으로 고국 벨기에로 돌아갔습니다. 벨기에 국왕은 그날을 국경일로 선포하였고 왕이 직접 나와 다미안 신부님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다미안 신부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리는 동상이 하와이 주 정부 청사의 광장 왼편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센인들의 대부로 불리는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님

 

우리나라에도 다미안 신부님처럼 한센인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분이 계셨습니다. “한센인들의 대부로 불리는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님입니다. 이 신부님이 성라자로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52년,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였습니다. 그 후에 1970년 7대 원장으로 다시 부임한 이후로 한센인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센병은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받는 천벌로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한센인을 가리키는 문둥이라는 말이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의 욕설일 정도로 옛날부터 공포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나환자 수용시설을 만들어 성라자로마을 초대 원장을 봉직하며 평생을 구호사업에 투신했습니다. 이경재 신부님은 40여 년간 한센인들에 대한 봉사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내가 이 신부님을 처음 만난 것은 신학생 때였습니다. 방학 때 성라자로마을에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견학을 갔었습니다. 그때 이 신부님의 첫인상은 인자하고 부드러운 단아한 신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성라자로마을 곳곳을 안내해주시고 성당이나 식당을 보여주셨고 한센인들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때 이 신부님께서 한센인들을 친 가족처럼 아주 스스럼없이 대하시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이 미사 때 우리 신학생들에게 하신 강론 말씀이 오랫동안 마음에 울렸습니다.

 

“한센인들의 진짜 고통은 손이 문드러지고 발가락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격리되어 천벌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받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강론 끝에 이 신부님은 우리에게 한센인었던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라는 시 한 편을 읽어주셨습니다. 우리 신학생들은 그 시를 들으며 감동하여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 찌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 고무로 바닥 창을 하고 질긴 천으로 만든, 공사장 인부 등이 주로 신는 양말 같은 신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0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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