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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5일 (월)연중 제34주간 월요일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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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

116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2-12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 (1)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의 위정자들도 세계사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처럼 백성의 희망과 행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들 역시 율법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 안식일에 알곡을 따 먹는다고 시비를 걸고, 아픈 사람 치유해 주는 예수님까지 비난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냉혹한 사람들일까요. 잡다한 율법 규정들이 무겁고 힘겨운 짐이라면(마태 11,28; 사도 15,10) 당연히 그 짐을 덜어 주는 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인데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위치에 있건, 누군가를 이끌고 가야 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강하고, 똑똑하고, 계산 잘하고, 말도 참 잘하지만, 사실은 자기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너무 많이 보며 살게 되는 터라,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 한마디가 더욱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지도자 대신, 오만함에 취해 전쟁과 폭력적 상황을 만들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지도자들이 넘치는 시대라, 내게 와서 쉬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과연 가능할까, 놀랍다 못해 낯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이천 년이 넘어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으로 현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당시 왕과 귀족들이 누리지 못하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마음은 오히려 더 퇴보한 것 같습니다. 에어컨과 보일러 상하수도의 편리함을 누리지만,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었던 이천 년 전보다 과연 더 행복해지고 더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요. 미디어의 발전으로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인 자취들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해 보려 하지만, 쓸데없는 자극이 너무 많아 그런 노력조차 쉽지 않습니다. 편리한 기계들, 화려한 매스 미디어, 인공 지능(AI)에 둘러싸여 살지만 정작 우리를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면서도 잘 가르쳐 줄 어른과 지혜로운 현자는 없으니 심정적으로는 마치 사막에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다시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들(마태 21,12-14; 마르 11,15-19; 루카 19,45-48; 요한 2,13-22)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셨던 것처럼 과연 우리도 내 안에 있는 욕심과 허영들을 뒤엎을 수 있을까요.

 

세상을 개혁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세속적 어두움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온유한 예수님이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거만한 이들, 도시들에게는 가차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두려워 하는 것이 그 답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라고 예언하신 대목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예언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티로, 시돈 같은 도시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뉴욕, 도쿄, 파리 같이 번성해 화려한 도시입니다. 나자렛, 갈릴래아 같이 가난한 시골 마을하고 대비가 되는 곳들입니다. 그런 땅들이 앞으로 지옥처럼 변한다니요. ‘거짓말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유적지들을 자주 다니신 분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폼페이 유적들, 둔황의 신전들, 그들 유적지 앞에 감탄만 하지 말고, 그 찬란한 도시의 현재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상상해 보면 뉴욕과 파리, 도쿄와 서울의 미래가 어찌 될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지방 소멸의 시대라면서 걱정합니다. 대도시들의 집값은 그대로지만 작은 시골 마을은 버려진 집들의 황량한 폐허가 되는 것도 실제로 많긴 합니다. 도시로 이사 갈 수 없는 노인들, 농촌 일손을 돕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다면, 이미 많은 지역이 텅 빈 황무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래서 앞으로 몇 년 후면 어느 지역에는 결국 아무도 살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한데 정말 그렇게 되는 게 최선일까요. 또 만약 그런 상태가 된다면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자살률, 특히 노인과 청소년들의 높은 자살률과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면 지방은 소멸하고 도시는 번성하고, 빈자는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 부유하게 되는 전망은 우리 모두에게 해로운 미래인 것 같습니다. 국가가 망해가는데 나 혼자 부자이면 뭐하나요. 베트남이 망했을 때 대부분의 부자들은 기껏해야 보트피플이 되어 남의 나라 땅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그랬습니다. 부유함과 권력을 자랑하며 화려한 궁궐과 성전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착취한 재물들을 창고에 쌓아 두었던 헤로데 왕가, 가짜 사제들, 총독 일가와 로마에 빌붙었던 이스라엘 귀족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불과 몇십 년 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망해 버리고, 빈부와 권력 여부를 떠나 이스라엘 전 세계로 떠도는 난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로 이주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다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옮겨옵니다. 왕국이 망하게 되는 조짐이 보이는 시점입니다. 정치적 불의는 경제적인 쇠락도 함께 몰고 옵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빈부 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권력층은 멋대로 불의를 저지르면서, 되지도 않는 영웅심으로 평화보다 전쟁을 도발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이 한반도 역시 당시 팔레스타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와 지금이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월간 빛, 2024년 2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 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 (2)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마태 21,12; 마르 11,15; 루카 19, 45-48; 요한 2,13-17)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을 때의 모습이 어쩌면 그런 상황을 막고 다시 평화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열쇠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 복음서에 이렇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광경은 많지 않습니다. 성전을 다시 되살리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지, 상인과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예수님의 일갈을 성경은 아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한 로마인들과 왕, 귀족들의 억압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리 일해도 병들고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성전에서 물건을 내다 파는 이들 역시 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쩌면 바로 그런 소소한 이기적인 선택들이 모이다 보면 우리 공동체 전체가 타락할 것이라고 예견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뒤엎으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주조한 화폐들의 유통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도 물질주의로 흐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나 화폐는 개방, 세계화, 자유 경제와 무역 등을 상징하는 표상들이었던 것입니다. 기도와 성서읽기로 성스러워야 할 성전을 이런 것들로 오염시킨 사람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현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을 알아들을 귀와 머리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진실과 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투사했습니다. 예수를 질투하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열혈당,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료들, 왕족과 귀족들은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부추겼습니다. 당시의 불의와 불공평한 사회의 모순들을 예수라는 인물을 죽임으로써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까지 계속되었던 마녀사냥이 당시 부패한 지도층들에 대한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렸던 장치였던 것과 마찬가지였겠지요. 각성하지 못했던 대중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어리석은 군중심리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 시대에도 불행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시스템을 정의롭게 차근차근 정비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죄를 물으면 마치 자기들의 책임은 다한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권력의 사주를 받는 검찰, 경찰, 군대 등 총칼을 가진 이들이 공포 정치를 하게 되는 기저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구조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가짜 지도자들에게 세뇌되어 우상을 섬기면서 살게 됩니다. 명철한 이성과 따뜻한 사랑으로 힘든 이웃을 포용하는 대신 ‘누군가를 감옥에 넣어라, 사형시켜라.’ 같은 살벌한 언어들만 난무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답답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유다인들과 우리가 같은 이유입니다. 꼭 몇몇 정치 지도자들만의 문제라고 단순화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우리보다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함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가해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면,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기 보다는 일단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아주 미숙하고도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가 아닐까요. 내가 누리는 행복과 즐거움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도시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아닐까요. 약한 사람, 힘든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할 크고 작은 지도자들이 각자도생, 적자생존 법칙, 우월한 유전자 같은 말들만 입에 담으면서 힘센 사람에게는 더 힘을 보태어 주고 약자는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별다른 보호장치도 없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울까요. 그리고 그런 이들이 많은 사회가 과연 부자들에게 안전할까요. 강도당할까 봐 개인적으로 총을 사고, 보초를 세우고 담벼락을 높이는 미국, 필리핀, 중남미의 부자들만 봐도 그런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큰 재난이 되는 선택인지 자명해 보입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아프고, 가장 헐벗은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 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좋은 유전자, 편안한 성장 과정과 교육 환경, 훌륭한 스승과 제도 덕으로 성공했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일군 줄 착각하는 “능력 제일주의”를 외치는 냉혹한 현대인들과 비교가 됩니다. 굳이 왜 나를 비천한 것들과 비교하냐며, 자신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이들도 한 번 떠올려 봅니다. 그들의 생각이 아무리 비합리적인 착각이라고 말해 봐야,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처럼 전혀 인정하지 않겠지요. 성전에서 화를 내시던 예수님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며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을 바쳐 무지한 우리를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선택은 여전히 제대로 알지도 닮을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참된 지도자와 지혜로운 스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철저하고 명확하게 보여 주셨지만,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못된 우리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월간 빛, 2024년 3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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