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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43: 가톨릭농민회, 소몰이 시위

199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4-02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43) 가톨릭농민회, 소몰이 시위


생존권 넘어 민주화의 보루로…가톨릭농민회, 농심을 한데 묶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압축적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억압적 통치가 맞물려 사회 전반에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파열음을 내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이래 국가 주도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 속에서 농업 부문은 철저히 소외됐고, 저곡가 및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접어들어 신군부 정권이 물가 안정과 산업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농축산물 수입 개방을 본격화함에 따라 농촌 경제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가 극적으로 폭발한 것이 1985년 전국 농촌 지역을 강타한 ‘소몰이 시위’였습니다.

 

- 1985년 7월 1일 안동교구 다인본당 각 공소의 신자 농민들이 소값 폭락에 항의하는 소몰이 시위에 참여했다. 소 등에 올려진 ‘개값’이라는 글자가 농민들의 분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재벌은 돈 밭에 농민은 똥 밭에”

 

1985년 7월 17일, 전남 함평 우시장에서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 마양분회 회원 김영천 씨가 2년 동안 키우던 소를 망치로 때려눕혔습니다. 105만 원에 사서 2년 10개월을 키운 소가 산 값의 절반도 안 되는 45만 원에 값이 매겨졌습니다. 분을 견디지 못한 그는 철물점에서 망치를 구해와 소의 머리를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그해 7월과 8월, 전국을 휩쓴 소몰이 시위는 일부 이익 집단의 생존권 투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사정권의 기만적 농업정책, 국제 자본의 통상 압력 그리고 정권 실세의 부패가 결합해 농민의 인간다운 삶을 수탈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1978년 2월 ‘수입자유화기본방침’을 확정한 데 이어,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인플레이션 억제와 독점 자본의 임금 상승 압력 완화를 위해 저물가 정책을 펴면서 농산물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350여 종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외국산 농축산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상황을 극단적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정부의 기만적 정책이었습니다. 정부는 ‘복합영농’을 장려하면서 소 사육을 권장했습니다. 빚을 내 비싼 값에 송아지를 입식한 농가가 120여만 호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뒤에서 싼값의 외국산 쇠고기와 생우 수입을 방조했고, 결국 소 한 마리 값이 개 한 마리 값보다 못하다는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천문학적 리베이트와 이권 탈취로 막대한 이익을 본 권력층의 거대한 범죄 카르텔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부패의 정점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전경환이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시위의 전국 확산과 2만 농민의 합류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1985년 4월 기독교농민회(이하 기농)가 서울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농축산물 수입 요구 반대 규탄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농민운동이 국가 권력과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가농과 기농이 지역 단위로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는 가운데, 경남 고성에서 7월 1일 처음으로 소몰이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실내 집회와 달리 소와 경운기를 몰고 거리로 진출했고, 경찰도 소가 날뛸 것을 염려해 함부로 최루탄을 쏘지 못했습니다. 쉽게 경찰 저지선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고성에서 시작된 소몰이 투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7월 12일, 충북 음성군 무극읍 무극성당 앞에 집결한 가농 회원들은 세 차례에 걸친 경찰의 저지를 뚫고 음성군청까지 행진했습니다. 100여 명의 농민과 8마리의 소, 경운기 7대가 함께 한 시위 행렬은 200m나 됐습니다.

 

7월 19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300여 명의 농민과 100마리의 소, 경운기 20대가 참가한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습니다. 막아선 청소차를 밀어내고 경찰차 3대를 언덕 밑으로 굴려버렸습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경찰, 십자가 탈취 손상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전국에서 전개된 소몰이 시위는 모두 22건, 시위에 참가한 농민의 수는 2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농민 문제의 심각성을 전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는 계기였고 전두환 정권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광주 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집권 세력은 소몰이 투쟁이 격렬해지자 위기를 감지하고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습니다.

 

소몰이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7월 28일 전북 완주에서는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이 가농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가톨릭신문 1985년 8월 11일자는 7면에서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전주 농민회 경찰과 충돌 - 소값 폭락에 대한 농민들의 소몰이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7월 28일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주관으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행해진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평화적 십자가 행렬’을 경찰이 제지하는 과정에서 십자가가 경찰에 의해 탈취돼 손상되고, 교육국장 문규현 (바오로) 신부 및 농민회 회원 세 명이 크게 다쳤다. … 농민회 회원들은 이를 종교 탄압으로 보고 저녁 8시 전주 가톨릭센터에 집결해 ▲ 신부를 폭행하고 십자가를 손상시킨 경찰 색출 ▲ 구속 농민 석방 ▲ 수배자에 대한 수배령 철회 ▲ 소값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며 8월 3일까지 농성했다.”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는 해외교포 사목 방문을 위해 출장 중이었습니다. 총대리 김환철(스테파노) 신부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소몰이 시위나, 이와 관련된 시위 행위는 잘못된 농업 정책에 대항한 농민들의 당연한 생존권 행사”라고 규정하고 “가톨릭 농민회는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농민운동의 대전환

 

1985년 7월과 8월을 뜨겁게 달궜던 소몰이 시위는 9월 23일 가농이 주최한 전국 농민대회, 그리고 9월 25일 가농, 기농, 가톨릭여성농민회가 공동 주최한 ‘소값 피해보상운동 진상보고대회’를 통해, 전국 단위의 결집된 목소리로 수렴되며 1단계를 마무리했습니다. 완전한 피해 보상을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사와 농민운동에 거대한 지각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투쟁의 과정에서 가농은 파편화된 농민들의 분노를 하나의 정치적 구호로 결집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명서 발표와 성당이라는 물리적 성역 제공을 통해 농민들을 탄압에서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나아가 가농은 이후 도시 노동자 및 학생 운동과 연대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족 자주, 평화 통일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핵심 주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종교의 지지를 넘어서 한국 농민운동 사상 최초로 전국 단일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을 1990년 창립해 정치 세력화함으로써 농민운동의 대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3월 29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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