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44: 분단 후 처음 북한 땅에서 미사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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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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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44) 분단 후 처음 북한 땅에서 미사 봉헌
북녘땅에서 감격의 미사 봉헌… ‘민족 화해’ 한국교회 염원 모으다
“분단 40년 만에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 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집전으로 봉헌된 북녘땅에서의 미사는 평양 방문 3일째이자 한국순교성인대축일 주일인 지난 9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숙소인 고려호텔 3층 제1영화관에서 봉헌됐다.
분단 40년 만에 남한의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한 지학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가 순교하여 40년간 미사성제가 없었던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집전하게 돼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면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 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분단 후 북한 땅에서 첫 미사
1985년 9월, 남북 관계의 경직된 장벽에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방문단의 일원으로 당시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 역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실향민으로, 당시 북한 방문을 통해 누이동생 용화(당시 61세) 씨를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주일이었던 9월 22일 오전 7시20분경, 지 주교와 함께 15명의 고향 방문 단원이 함께한 평양 고려호텔 면담실 제1영화관은 임시 성전이 됐습니다. 여기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홍성철(미카엘) 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성숙(로욜라) 수녀, 가수 하춘화(체칠리아) 씨 등이 포함됐습니다.
지 주교의 주례로 거행된 이날 미사는 분단 이후 북한 땅에서 공식적으로 봉헌된 최초의 미사였습니다. 이날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었습니다. 불과 1년 전인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의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에 중단된 미사
가톨릭신문은 9월 29일자 1면에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어 7면에서 3박4일 동안 이뤄진 북한 방문 소식을 화보와 함께 전했는데, 특히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지 주교의 감격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한 지주교는 미사 중 본기도를 바치다가 눈물이 복받쳐 약 2분간 미사가 중단됐다. 이날 미사가 마침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 미사인 데다가 전날 37년 만에 누이동생을 상봉한 여운 때문인지 지 주교가 ‘순교자’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잇지 못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울어 미사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7면)
지 주교가 복받치는 감격에 소리 내어 울자 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흐느꼈고, 면담실은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지 주교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1백3위 한국 순교성인들과 무수한 한국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감격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남한 신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고, 민족 화해를 위한 교회의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 사건이 됐습니다.
교차 방문의 정치적 배경
감격적인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해빙된 남북 관계와 국내의 정치적 필요성이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1984년 남한에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이를 정부가 수용하면서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됐고 1973년 이후 중단됐던 남북 적십자회담이 재개됐으며, 이를 통해 교차 방문이라는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반도 긴장 완화가 절실했습니다. 나아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1985년의 교차 방문은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성과인 동시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와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남북한 당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 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7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멸공’에서 화해와 일치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분단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신학적 성찰이 심화됩니다. 북한에서의 첫 미사는 한국교회가 멸공에서 복음적 화해와 일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남한 교회는 분단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멸공의 이념을 취해왔습니다. 통일은 북한 정권의 멸망과 교회의 수복을 의미했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됐습니다. 특히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닌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을 얻게 됐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식 사목 방침으로 민족 화해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의 과정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미 1982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를 발족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북한선교부가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된 뒤, 북한선교회로 명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와 각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멸공을 넘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교회의 확고한 사목적 지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85년 북한 땅에서의 첫 미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의 민족 화해를 위한 노력은 더욱 담대해집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평양에서는 장충성당이 준공되고 당시 신부였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와 정의철(다마소) 신부가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10월 30일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지학순 주교와 달리 공식적인 교회 대표 자격으로 북한 땅을 밟은 두 신부의 방문은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5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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