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8) 사도직의 열매 - 그리스도를 남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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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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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8) 사도직의 열매 : 그리스도를 남기는 삶
이탈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방학 때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자주 찾던 고요한 수녀원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베소쪼(Besozzo)에 위치한 ‘성십자가의 애덕 수녀회’(Le suore di carità della Santa Croce)였습니다. 이 수도회는 1844년 카푸친 수도회 테오도시오 플로렌티니 신부에 의해 알프스 부근의 외진 시골 마을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척박한 산악 지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치료받지 못하던 이들을 돌보는 교육과 의료 사업이 수녀회의 영성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오랜 시간 이 분야에 헌신하며 복음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머물던 시기, 수녀원에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수녀님들만 계셨고, 한 젊은 수녀님은 고령의 수녀님들을 돌보고 행정 업무를 감당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방학 동안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논문을 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식사 시간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젊은 시절 자신들이 하셨던 사도직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정을 가득 담아 들려주셨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픈 이들을 돌보며, 복음을 위해 평생을 봉헌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당신들의 젊음을 온전히 사도직을 위해 바치셨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도직’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어원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희랍어 ‘~로부터 떨어져’를 뜻하는 전치사 ‘아포’(ἀπό)와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텔로’(στέλλω)가 결합한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라는 동사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자신을 파견한 이에게 소임을 위임받아 파견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에게 부여된 직무와 사명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아투스(-atus)’가 결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아포스톨라투스’(Apostolatus), 즉 ‘사도직’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형성되었습니다. 한자어 사도(使徒) 역시 복음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은 사도직의 가장 깊은 원형
초기 교회에서 사도라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파견하신 열두 제자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면서, 사도직의 의미는 열두 제자의 범위를 넘어 확장되었습니다. 이후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사도직의 계승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도직을 단지 교계적 직무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 안에서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소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같은 하나의 사도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은 사도직의 가장 깊은 원형이십니다. 성모님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은 아니셨지만, 누구보다 깊이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첫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태에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셨고, 믿으셨으며,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품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머무르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그곳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고통을 없앨 수도 없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으며, 아드님의 죽음을 막을 수도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도직은 해결이 아니라 동반이었고, 설명이 아니라 머무름이었으며, 말이 아니라 사랑의 현존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도직도 이와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사도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필요한 것은 해결사가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 곁에 머무르는 것, 불안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넘어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 희망을 잃은 이에게 조용히 기도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사도직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마리아적 현존을 세상 안에 확장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사도직을 끝까지 살아가는 충실함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성모 신심이 레지오 사도직의 뿌리라고 말합니다.(5장) 레지오의 사도직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영적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지오의 활동은 기도와 분리될 수 없고, 성화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의 사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베소쪼에서 만난 수녀님들을 떠올리면, 사도직의 열매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녀님들은 더 이상 학교와 병원에서 소임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제 그곳의 활동은 국가나 사회 기관이 더 체계적으로 맡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수녀님들이 하지 않았어도 결국 누군가는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세상도 교육을 하고, 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그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유는, 세상과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기 위해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교육은 지식의 전달에 그치며, 그리스도 없는 의료 활동은 효율과 비용의 논리 안에 갇히고, 그리스도 없는 복지는 관리와 제도의 차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선한 노력도 귀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도직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단순한 대상이나 수혜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현존하는 고귀한 영혼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맡았던 직책도 사라지고, 우리가 세웠던 계획도 지나가며, 우리가 흘린 땀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 남고, 기도는 은총 안에 남으며, 사도직은 영혼 안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모님과 함께, 주님께서 맡기신 작은 사도직을 끝까지 살아가는 충실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물으실 것은 아마도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충실했느냐, 얼마나 그리스도를 품고 세상에 전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조용히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부족했지만 당신께서 주신 사도직을 위해 성모님과 함께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6년 8월호, 전인걸 요한 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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