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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살든지 죽든지 초연해지는 것이 믿음의 완성 단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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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시키시는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나중에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요한 20,28).>
2) 이 이야기의 큰 풍랑, 파도, 바람은 교회가 겪는 환난과 박해를 상징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각 개인이 인생살이에서 겪는 시련과 고난도 포함됩니다.>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것은, 그 파도 때문에 배가 침몰하거나 제자들이 죽게 되는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음을 나타냅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아무 걱정도 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항의하는 말을 합니다(마르 4,38). 그런 상황은 누구든지 겪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몹시 아프고 슬플 때, 나는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도, 주님께서 나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으신 것 같고, 내가 겪는 일에 대해서 아무 걱정도 안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가 바로 ‘신앙의 위기 상황’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일도 중요하고,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더욱더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리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약하다고 혼났던 사도들은 성령 강림 후에는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형집행 전날 밤인데도 아주 태평하게, 깊이 잠들어 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사도 12,6-8). 박해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사도들의 모습도 좋은 예가 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사도 4,13).” <최고의회 의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식하고 평범한 두 사도가 담대하게 신앙을 증언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완전한 믿음’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주님을 믿는다면,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믿음의 완성 단계입니다. <‘살든지 죽든지’를 ‘자포자기’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믿고,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자포자기’는 모든 믿음과 모든 희망을 버린 상태입니다. 따라서 ‘살든지 죽든지’와 ‘자포자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믿는 사람’은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스스로 하는 사람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믿는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5) 신앙생활과 인생살이에 풍랑도 없고 파도도 없고 바람도 없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즉 환난과 박해도 없고, 고난과 시련도 없으면,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텐데... 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편안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 편안한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한 때가 될 수 있습니다.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노를 젓는 것을 멈추고 경치 구경만 하다가, 항해의 이유를 잊어버리고 목적지를 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사는 것이 너무 편안하고 즐겁고 좋아서, 간절하게 기도할 일도 없고, 그래서 주님을 찾지 않게 되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고, 결국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믿음을 잃고 다 포기하는 것과 반대로, 사는 것이 너무 편안해서 믿음을 버리고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당한 시련과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하더라도 방심과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인생이 너무 편안하게 되는 것도 사탄의 유혹일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