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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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요한 15,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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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4-30 ㅣ No.17201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5)

몇 년 전 마음먹고 친구와 함께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오르세미술관전>을 관람했었습니다. 관람전의 부제로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을 넘어, 보이지 않는 빛을 표현하려고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저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귀로 들으려 하기보다는 눈을 통해 비춰오는 빛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풍경을 마음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15,5)라는 표현이 마치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저에게 보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엄마와 아기’에게서 발산하는 빛은 마치 부활 첫날의 빛처럼 화사하고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그 따뜻함과 포근함은 곧 사랑에서 발산되는 평화요 안식의 빛일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듯, 엄마 등에 업혀있듯 상관없습니다. 그 빛을 넘어 느껴지고 보이는 것은, 두 상징, 곧 ‘나무와 가지’ 그리고 ‘엄마와 아이’ 사이의 포근하고 따뜻한 사랑의 일체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결합의 조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를 그림으로 상상하면서 바라본다면 어떤 빛을 보고 그리고 빛을 넘어서 무엇이 여러분에게 보입니까?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의 밑그림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5,1)라는 말씀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나무가 땅 깊이 뿌리(=하느님의 구원계획)를 내리도록 돌봐주고, 그렇게 해서 끝까지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생명과 사랑)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신 분이시기에 예수님 또한 아버지께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두 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전제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5)라는 말씀이 파생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을 때 단지 젖만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생명을 먹는 것이라 봅니다. 물론 아기는 젖이 필요하지만 단지 젖만이 아니라 젖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젖을 물린 주체인 엄마라는 존재 자체일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먹는 아이에게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런 엄마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의탁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은 가장 평화스럽고 안정적인 완전체라고 봅니다. 단지 살과 살이 맞닿아 있다는 것 이상으로 마음과 마음이 영과 영으로 하나가 된 존재 사이의 사랑의 관계성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가 아닐까, 상상합니다. 

엄마와 어린아이의 관계처럼, 이해타산이 아닌 곧 젖을 물린 어머니와 젖을 빠는 아이 사이의 사랑으로 생명의 하나 됨과 결합처럼,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밀접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생명으로 연결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고 붙어있으면, 분명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통하여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쳐 올 것입니다. 그럴 때 가지인 우리는 말씀 혹 성령으로 ‘쳐 내치지 않고’ 오히려 ‘깨끗이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로11,20.18)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가지인 우리를 쳐내시지 않은 것은 우리가 나무와 그 뿌리인 주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갸륵함이 열매 맺도록 필요하지 않은 육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인 잔가지를 깨끗이 손질해 주셔서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심을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주님께 매달리고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토록 절절한 사랑의 고백을 어느 누가 하겠는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이 간절한 사랑의 표현 ‘제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내 곁에 내 안에 머물러 있어다오.’라는 외침을 듣고 맛보아야 합니다. 사실 주객이 전도된 입장 아닌가요? 

이를 위해 복음은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와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심적인 어휘가 바로 8번이나 반복된 ‘머물다.’라는 표현입니다. ‘머물다.’라는 표현은 우선 일차적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 (15,4)는 표현처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만이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는다, 는 의미입니다. 이차적으로는 붙어있지만 않고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을 때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될 것이며 그때야 비로소 참으로 ‘머물러 있다.’하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잘려서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고 불에 태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15,2,6) 나무가 가지를, 가지가 나무를 서로 믿고 의지할 때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며,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15,8) 예수님 안에 밀접하게 머무는 믿은 이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머물다, 는 표현은 ‘상호 친밀한 관계’로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관계’를 표현하는 은유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관계의 표현입니까?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유다에서 내려온 사람들 사이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15,1) 라는 문제로 분쟁과 논란이 생깁니다. 이는 곧 ‘구원의 본질이 무엇이며 누가 구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갈등이었고, 이를 계기로 직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는 무척 당황스런 상황이었지만,  중대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원로들과 상의해서 해결하려는 지혜로운 처신과 함께 겸손한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야기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을 복음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인 예수님 안에 항구히 머물러 있을 때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복음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15,5)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기에, 모세의 율법도 아니기에 ‘누가 구원받을 수 있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구원입니다. 성가가 기도라는 사실을 새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노랫말은 아마도 성가 35번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혼을 다해 기도를 대신해서 바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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