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
80565 배봉균 [baeyoakim] 2005-03-17
-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1
징기스칸의 후예(後裔)이며 대원(大元, 몽골)의 황제(皇帝) 쿠빌라이가 남송(南宋)의
정복(征服)에 한창 분망(奔忙)할 때, 고려출신(高麗出身)인 신하(臣下) 조이(趙彛)가
“고려의 동방해상(東方海上)에 일본(日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남송과 교역(交易)하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인만큼 남송을 고립(孤立)시키려면 일본을 초유(招諭)하여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진언(進言)함에 지원(至元) 2년(1265년)
초유사(招諭使)를 뽑아 일본에 정중(鄭重)한 국서(國書)를 보내 통교(通交)를 요구(要求)
했습니다. 그 국서가 비록 정중한 형식(形式)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그 골자(骨子)는 물론
일본에 대해서 복속(服屬)을 촉구(促求)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거부(拒否)하면 무력
행사(武力行事)도 불사(不辭)하겠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暗示)하는 협박(脅迫)의 내용
(內容)이었습니다. 6차에 걸친 초유사(招諭使)의 파견(派遣)에도 일본막부(日本幕府)가
말을 듣지 않자, 1273년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는 일본정벌(日本征伐)을 결심(決心)
하고, 고려에 동참(同參)과 협조(協助)를 요구(要求)하기에 이릅니다. 고려의 元宗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쿠빌라이의 “원과 고려가 서로 통호(通好)하지 않는 것을 어찌 일가
(一家)의 이치(理致)라 하겠는가, 병(兵)을 사용(使用)하는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누구에
게 좋으랴. 왕(王)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협박에 가까운 요청(要請)을 아니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여몽원정연합군(麗蒙遠征聯合軍)의 지휘부는 몽골 측에서 흔도,
홍다구, 유복형및 고려의 장수(將帥) 김방경(金方慶) 등 네명으로 구성(構成)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원정의 전략(戰略)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5천명의 자국병(自國兵)을 동원
(動員)했습니다. 여기에 1만 5천명에 달하는 고려군(高麗軍)과 합하여 4만 명에 가까운
병력(兵力)이었습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합포(合浦, 마산)에 도착
(到着), 그 일대에 집결(集結)했습니다. 드디어 몽골의 장수 홍다구(洪茶丘)가 고려의
공장(工匠), 역부(役夫) 3만여 명을 무자비(無慈悲)하게 닥달하여 건조(建造)한 군함
(軍艦) 900 척도 합포에 집결했습니다. 모든 준비(準備)가 완료(完了)된 것입니다. 출정
(出征)의 시기(時機)가 7월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출정을 바로 앞둔 6월 중순(中旬)에
원종 (元宗)이 재위(在位) 15년만에 타계(他界)했습니다. 그래서 世子(忠烈王)의 결혼(신
부는 쿠빌라이의 딸 薺國大長公主)과 즉위식(卽位式)까지 출정이 연기(延期)되었습니다.
제 1차 여몽연합원정군이 합포를 출항(出港)한 것은 1274년 10월 3일 이었습니다.
(정순태님의 여몽연합군의 제 1차 일본 원정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가미가제(神風)와 카이텐(回天) 2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