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전기 문신 사숙재 강희맹 농학사상 연구(1)[브레이크뉴스/문화&이슈-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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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616 박관우 [pgu77]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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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문신 사숙재 강희맹 농학사상 연구(1)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잊혀진 다양한 인물들을 연구하였지만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을 연구하게 된 것은 처음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본 칼럼에서 사숙재의 농학사상(農學思想)을 중심으로 2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행촌(杏村) 이암(李?)의 행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가 행촌의 조카사위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이후 행촌이 원나라에서 1349년(忠定王 1)“농상집요(農桑輯要)”를 도입한 사실까지 알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농상집요”를 다시 공목공이 1372년(공민 21)“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로 재간행하는 과정을 연구하다가 강희맹을 알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강희맹은 1424년(世宗 6) 완역재(琓易齋) 강석덕(姜碩德)과 청송심씨(淸松沈氏) 사이에 출생하여 정확히 60세가 되는 1483년(成宗 14) 일생을 마치었으니 사숙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 덧 534년의 장구(長久)한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난지 5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필자는 2017년에 이르러서야 강희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강희맹이 “금양잡록(衿陽雜錄)” 제하의 농서(農書)를 편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가 농학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農學者)가 사숙재라는 놀라운 정보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사실만 놓고 볼 때도 그가 한국농학사(韓國農學史)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결코 작지 않다고 본다.
필자는 평소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편인데 강희맹이 농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우두의사(牛痘醫師)로서 우두접종(牛痘接種)을 통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던 박승석이 처음에 어떤 계기로 우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알기 위하여 오랜 세월 다각도로 추적하였으나 결국 규명하지 못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점에 비통한 심정 금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하여 강희맹 같은 경우 그 연원(淵源)을 설명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니 이런 사실을 통하여 기록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강희맹의 농학사상을 논하는데 있어서 사숙재의 증조부 공목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공목공은 서두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행촌 이암이 원나라에서 도입한 “농상집요” 제하의 농서를 고려에서 다시 “원조정본농상집요” 제하의 농서로 재간행하여 보급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공목공의 증손인 사숙재에게 선조(先祖)의 이런 행적은 농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소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부친 완역재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숙재가 찬(撰)한 완역재의 행장(行狀)에 문절공으로부터 완역재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완역재가 문절공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아 백가(百家)의 여러 서적을 통하여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이 완역재의 그러한 학행(學行)을 알고 관직에 등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통하여 당시 완역재가 문절공의 제자였다는 것을 시사하였다고 본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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