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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4년 12월 1일 (일)대림 제1주일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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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대림 제1주일 다해]

178085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08:08

[대림 제1주일 다해] 루카 21,25-28.34-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교회는 두가지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교회도 세상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모두가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겁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12월 31일에 끝나고, 그 다음 날인 1월 1일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지요. 이제 곧 많이들 잡으시게 될 연말 모임 약속들도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를 가리켜 ‘전례력’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전례력을 따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한가운데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됨을, 우리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가야 함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 전례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이라는, 우리 구원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두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지요. 그 중 하나인 성탄 전 4주간을 ‘대림시기’라고 부르는데, ‘대림’(待臨)이란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오늘이 바로 대림시기를 여는 날이자,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림은 두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세상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악에 물들어 멸망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표징으로 드러내셨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들을 기억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기억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소명을 다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기억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주’이신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에 넣을 기름을 따로 준비해서 혼인잔치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신앙의 등잔에 넣을 믿음, 희망, 사랑의 기름을 잘 준비한 채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다짐을 성실히 실천에 옮김으로써 아기처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살아있는 ‘구유’가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대림의 두 가지의 의미를 삶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이들은 죽음이나 멸망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이, 그리고 죽음 이후에 이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된 믿음이 우리로하여금 죽음이나 세상의 멸망을 담대하게 맞을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키워줍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세상 만물은, 작고 약한 미물에서부터 해나 달처럼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태어난 것은 죽고 생겨난 것은 사라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영원히 이어질거라 착각하며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붓기 때문입니다. 그러느라 참된 세상에서 살아갈 영원의 시간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로 종말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겁니다. 평소 예습 복습을 성실히 하지 않는 학생에게 갑자기 보는 쪽지시험이 청천벽력처럼 느껴지듯이, 영적으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는 종말이 내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재앙으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게 아닙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넘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살게 될 세상이 바뀔 뿐입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세상으로, 인간이 만든 상대적 기준에 얽매인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절대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단단히 차리면 살 길이 열리듯, 세상이 멸망해도 내가 종말과 심판을 제대로 준비하면 새로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말과 심판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십니다. 하나는 우리 마음이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방탕과 만취는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채우려드는 방종한 태도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또한 걱정은 자기 마음 속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는 마음이지요. 욕망에서 비롯되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로하여금 세상 것들에 얽매이고 집착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방해하지요.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로는 작고 약한 이웃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에, 사랑이라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채로는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나갈 수 없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당주의와 안일함으로 마음이 물러지게 하지 말고 단호한 의지와 결단으로 욕심과 집착을 끊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하느님께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분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참된 회개이며, 그렇게 회개한 이들에게는 종말의 그 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는 않을’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종말과 심판에 대한 준비로 강조하신 다른 하나는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느님으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주눅들지 않고 떳떳하게 서 있으려면 그분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나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이고, 그런 삶이 나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의 말을 따랐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지요.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주님과 그분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해 살고 있지만 정신과 영혼만큼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영원한 세상을 희망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내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설레고 기쁜 날이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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