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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76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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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다해] 루카 10,1-12.17-20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많은 신자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천주교에서 가르치는대로 따르면, 세상의 거센 풍랑에 사정없이 휘둘려 시끄럽던 내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질거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고 찾고 얻어야 할 ‘참된 평화’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벌레 한 마리만 빠져도 흐트러지고 깨지는 일시적 안정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의 태풍이 불고 두려움의 파도가 몰아쳐도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는 굳건하고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하지요. 그런 마음은 오직 주님께 대한 깊고 단단한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오기에, 주님께서 당신 평화를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평화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고, 적으로부터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는 상태를 ‘샬롬’, 곧 ‘평화’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재화는 한정적인데 비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무언가를 더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전쟁과 싸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여 모두가 마음이 흡족한 상태가 되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태평성대’가 올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평화를 가져다 주시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불충과 배신을 저지른 벌로 그들의 도성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황폐해졌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밀려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던 예루살렘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상징하는 ‘희망이 도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오늘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약시대의 평화와 구분하여,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평화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선물처럼 주어진 풍족하고 충만한 ‘결과’라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평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듯이, 힘들고 어려운 과정 없이는 영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십자가라는 중요한 소명을 맡겨주셨음에 감사하며,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십자가를 받았음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세상 사람들은 눈엣가시같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의 눈으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스스로를 세상에 못박아 함께 멸망해가는 딱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말하는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 슬픔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포기하기 싫은 욕망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자기가 행복해지지 못한다고 여기기에 멀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메고 가신 사랑의 멍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고통의 잔이라도 기꺼이 들이키시는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을, 건강보다 질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희생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자랑하며 기꺼이 지려는 그의 모습이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지만, 주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를 굳게 믿은 바오로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고 구원의 ‘진리’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통해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룬 이들만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소명을 맡겨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곱씹어볼수록 참으로 난감한 말씀입니다. 기왕이면 ‘이리 떼’가 없는 곳으로 보내주시고,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내 목숨을 노리는 ‘이리 떼’를 없애주신 다음에 보내주시면 좋겠는데,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편안히 받아서 누리기만 하라고 뽑힌 게 아니지요. 그런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특권’이지 우리가 따라야 할 ‘소명’은 아닌 겁니다. 우리는 불의와 부정으로 가득한 세상에, 욕망과 고집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써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지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실행해야 합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필요 이상의 재물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친목을 다지는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취향과 기호에 맞는 것을 고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에도 사람에도 기대지 말고 철저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것이 제자답게 사는데에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음으로, 꼭 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차려주는 음식을 투정하지 말고 감사히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능력을 바탕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행동과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품지 말고 그에 대한 심판을 온전히 주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싹트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써의 소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 손에 맡겨진 도구일 뿐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 자체에만 집중하면, 그 능력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에만 신경쓰다보면,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소홀히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헛심을 쓰게 되지요. 주님의 제자로써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채 부질없는 것들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것들에 신경쓰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이루려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당신 나라에 받아주신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가 구하고 바라야 할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놀라운 신비는 우리를 그분 사랑으로 물들이고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마음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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