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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21주일 다해]

184381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5-08-24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봉성체를 나갈 때면 늘 마지막 순서로 들르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사시는 ‘율리아’ 할머니는 참 쾌활하고 활동적인 분입니다. 당신 집을 찾아오는 구역장 반장 봉사자들을 허물없이 대하십니다.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봉성체 날이 되면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하십니다. 그러다 자주 넘어져 다치셔서 극구 말려도, 예수님이 오시는데 더러운 집안 꼴을 보일 수 없다며 고집하십니다. 그런 할머니가 최근 몇 달 사이 몸이 급격히 야위셨습니다. 입맛이 없어 제대로 드시질 않으니 자꾸만 살이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겁니다. 그런 모습은 비단 율리아 할머니 뿐만이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면, 아무리 풍채 좋던 어르신도 바짝 마르고 몸이 굽어 참으로 작아지십니다. 무슨 일이든 당신 능력으로 척척 해내시던 분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조차 버거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로 데려가시기 전에 우리를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마치 갓난 아기처럼 작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당신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어떤 사람이 그분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숫자를 바탕으로해서 대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세상의 관점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것들은 참으로 화려하고 좋아보입니다. 너무나 재미있고 가치있어 보입니다. 그것을 소유하기만 하면 재물은 물론이고 명예와 인기까지 내 것이 될 것 같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점입니다. 아주 넓고 화려한 문을 열어놓고 누구나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처럼, 그리하여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하지만, 결국 그 문을 통과하여 좋은 것들을 누리는 이는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를 이해했기에, 그 나라에 들어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도 적으냐고 물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 질문에 예수님은 ‘동문서답’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겁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무를 자리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는 ‘정원 제한’은 없고 ‘자격 제한’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긍정적인 부분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는 것도 잠시, 다음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음이 허탈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정원제한’이 없다기에 나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들어갈 거라고 낙관했는데 그게 아닌가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의 희망을 꺾어 놓으시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 자신을 작게 만드는 것이 그만큼이나 힘들고 어렵다는 점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희생을, 큰 인내를, 큰 포기를 요구합니다. 또한 큰 사랑과 용기도 요구합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포기하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 이렇게나 크고 많으니, 그 문이 좁게 다시 말해 들어가기 힘들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겠지요. 더구나 ‘하늘나라’가 내 구원과 행복에서 갖는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포기하고 감당한 것들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억울한 마음도 들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온 이들은 하늘나라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잘 알기에, 그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포기하고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좁은 문’이 그저 좁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는 힘든 과정도 ‘하늘나라’의 일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정원제한은 없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언제까지나 마냥 열려있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는 ‘종말’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이 닫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불러주셨을 때 이것 저것 재고 따지면서 미적거려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건네주시는 십자가를 어떻게든 안지거나 최대한 늦게 지려고 버텨서도 안됩니다. 나의 그런 태도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더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 좁아진 문을 통과하려고 낑낑대는 사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를 놓치면, 그분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히고 그렇게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나라로 불러주시는 그 절호의 기회를 꼭 붙잡아야겠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어떻게 해야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내가 귀로 들은 주님 말씀을, 내가 머리로 이해한 구원의 진리를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을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기회가 생기면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안된다며 나중으로 미루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생기면 자기는 능력이 없어서 안된다며 남에게 미루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주님 뜻을 실천하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지요. 그러다 갑자기 ‘종말’의 때가 다가와 주님 앞에 서면, 내가 생전에 당신 뜻을 따르기 위해 이런 일을 했노라고 보고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는 것, 본당 신부님이 하는 강론을 나름 열심히 들었다는 것 밖에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정도 노력으로는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은 ‘불의한 자’가 되어 멸망하는 세상과 함께 버려지게 될 뿐입니다. 그 때 가서 울고불며 후회해봐야 한 번 내려진 심판을 되돌릴 수는 없지요.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 뜻과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는 그분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오늘’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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