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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18년 4월 22일 (일)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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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18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2131 굿뉴스 [goodnews] 스크랩 2018-03-30

 

 

2018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8)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 기쁨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신 거룩한 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스스로 빛이 되시어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있는 세상을 비추어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가득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과 은총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어둠과 혼란에 쌓여있었듯이 현재 우리 사회가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오시어 어둠을 이기고 혼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의 배반을 아시고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요한 20,20-21 참조)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에서 벗어난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용기를 얻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듯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들처럼 변화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빛을 청하기에 앞서 우리는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사회의 어둠과 혼란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 일변도의 사회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 욕심 때문에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특히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상처로 억눌려있던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치유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오히려 약한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상처를 치유해주어야 할 사제의 본분을 망각한 행태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교회, 특히 성직자들에게 회개와 참회를 통해 새롭게 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으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또한 교회 전체가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던 다윗이 하느님께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였듯이(2사무 12,13 참조) 교회가, 특히 성직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쇄신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교회 안에 현존하는 주님이 계시기에 신앙의 동료들이, 무엇보다 고통받고 상처받은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치유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부활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은 더이상 어둠 속에 머물지 말고, 믿음 안에서 희망과 사랑의 빛이 세상을 향해 비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을 증언하며 어둠을 물리치고 선하고 긍정적인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 모두와 함께하실 것 입니다.(마태 28,20 참조)

올해는 특별히 북녘의 동포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전해지길 바랍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의 물꼬가 트이며 이제 곧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됐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도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대화가 잘 진행되어 한반도에 더 큰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남북 정상이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하여 70년이 훌쩍 넘은 분단의 상처를 딛고, 소통과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가길 간절히 기도합시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도 반목보다는 평화의 여정에 적극 동참하여 한반도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폭력과 증오의 방식으로는 그 어떤 인류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2015년 11월 15일 삼종기도 훈화 중 프란치스코 교황)
다시 한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상처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천상의 한국 성인들과 모든 성인이 우리나라와 온 세상에 평화가 꽃 필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2018년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춘천교구]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태 28, 5-6)


     

주님의 부활로 이 세상의 온갖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옛 죄가 씻기고, 그분의 부활을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은총이 내립니다(『부활 성야 파스카 찬송』 참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생명이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늘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그분께 대한 모든 기대가 무너진 절망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들의 상실감과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런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주님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부활의 빛 안에서 그들의 눈이 열리고(루카 24,31참조) 마침내 그들의 절망은 희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 희망과 기쁨 안에서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부활과 참된 변화의 시작입니다. 사제는 사제답게, 수도자는 수도자답게, 그리고 신자들은 신자답게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부활과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출발지점은 잘못된 도착지점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가정도, 그리고 사회도 각자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내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자비로움으로, 차별을 공정함으로, 그리고 미움과 증오를 돌봄과 사랑으로 돌려놓읍시다. 

  물론 그러한 과정들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삶의 또 다른 십자가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무엇보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리”임을 알기에 용기를 내어 걸어갑시다. 
  이제 그 옛날 제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의 기쁜 소식이 들려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 5-6).  

춘천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님

 

 

 

 

  

[대전교구]

“그분께서는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사도10,42) 

 

 

  

사랑하는 대전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요한 20,2 참조)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요한 20,6-8 참조)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복음 선포를 곁에서 지켜보았으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빈 무덤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죽음의 의미를 새로이 깨닫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정했던 제자였지만 이제는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중심의 자리에 섭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삶의 의미를 바라보게 하는 창입니다. 부활신앙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참사랑의 눈이 열립니다. 이 사랑의 눈이 악으로 가득한 듯 보이는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로마 4,18)하게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와 뜻을 지금 여기에 실현하려는 열망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세 가득한 인간적 성공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나눔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오직 하느님의 이름과 뜻을 위하여 모든 것을 비우는 삶을 사셨습니다.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들을 뒤흔드는 예수님의 삶이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은 하느님이 온전히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우리가 그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이미 죽었다.”(콜로 3,3)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자신을 비우고 죽임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온전히 드러나시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기도와 절제로 순결과 진실의 누룩을 만들고 자신을 매일 새롭게 빚어지는 빵(1코린 5,6 참조)으로 세상에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택하셔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사도10,42 참조) 이는 교회의 원천적 소명인 선교와 복음화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복음과 희망은 십자가에 매달리고 돌아가셨다가 마침내 부활하신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욕망을 거두며 참 희망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바로 선교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라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며 골고타 언덕을 함께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십자가 행렬은 세상 사람들을 멈추어 서게 하고 되돌아보게 하며 마침내, 복음에 마음을 열도록 초대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행렬의 마지막에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하느님께서 온전히 드러나시는 부활을 바라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모든 진리와 정의의 기준이 되실 때 ‘지금 여기’에 진정한 평화와 선이 실현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비움과 죽음의 의미를 망각할 때, 죄로 가득 찬 모습이 드러납니다.이천 년 교회의 역사에서 숱한 어둠의 장면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며, 교회 쇄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진 사람들에 의해 성숙을 체험하며 오늘의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점점 짙어가는 어둠이 모두를 절망과 두려움에 빠트리는 상황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상과 정치라는 겉옷으로 가려졌던 야만과 폭력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배려와 포용보다는 배척과 자국 이기주의가 세계사를 지배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시작은 나약하지만 결코 꺼질 수 없는 희망의 불꽃’을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공동선을 위해 정화의 촛불을 든 양심이 그 희망입니다. 이같은 희망의 불빛이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의 일부를 드러냈고, 교회는 사회와 신자들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단 하나의 행위에 국한된 사죄가 아닌, 원천적인 변화를 통해 교회다운 교회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금년 부활은 한국 천주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인격에 상처를 주었거나 그로 인해 누군가 교회를 떠나게 했던 모든 죄를 반성합니다. 겸손하게 살겠다는 약속을 잊고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 했던 우리 삶을 반성합니다.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는 우리 주님,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며 참다운 변화를 이루어가겠습니다. 또한 묻히고 외면 받던 우리 내면의 소리를 시노드를 통해 외치고, 시노드를 통해 함께 반성하면서 변화를 모색하여 늘 쇄신하는 대전교구가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해 갑시다!

사랑하는 대전교구 자매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 악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 죄인인 우리가 이기심과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께 다시 나아가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모든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기원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가득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바라며, 그 은총이 여러분 삶 안에 가득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정수(精髓)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부활 신앙이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부활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시고,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54항)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삶을 믿기에 또 새로운 생명의 길을 알기에, 예수님과 함께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성사는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의 의미를 세례 안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모든 신자들이 자신이 받은 세례 때의 신앙을 되새기며,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롭게 탄생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또한 예비 신자들에게는 세례를 준비하는 교리 교육을 시키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신앙인으로의 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 토요일 파스카 성야에 세상에 죽고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며 우리는 다시 태어난 기쁨을 느꼈습니다. 곧 과거의 내가 아닌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고,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우리의 기쁨과 결심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세례를 단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게 했고, 그때의 나의 신앙을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신앙의 모습과 지금 나의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다시금 세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가 지속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자각하며, 우리 스스로 신앙을 무덤에 묻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헛되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찾듯이 우리의 신앙을 살고 맙니다. 때로는 내 생각대로의 예수님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요한 16,2)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삶을 찾은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음에 한없이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막달레나 성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무덤에 묻어버린 채 살고있는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려 슬퍼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자, 성녀는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라뿌니”라고 고백합니다.(요한 20,16) 그 순간 성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에 눈물이 가시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외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모습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오롯한 응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 때와 세례 신앙을 갱신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이 물음에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와 같이 주님을 향해 돌아서서 온 마음을 다하여 응답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진정한 새 생명의 원천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 은총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다시금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삶 안에서도 부활한 이의 모습처럼 강인한 신앙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신앙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을 향한 빛으로 퍼져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카 24,32 공동번역 참조)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 4)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신앙의 기쁨! 젊은이와 함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
   주님의 부활은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표지입니다(요한 11,25). 이미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여정에서 당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선포하셨지만(요한 6,35; 14,6), 주님의 죽음을 바라본 제자들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0,9).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몸소 나타나시어 이를 믿게 하셨습니다(요한 20,19-29).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제자들은 다시 살아나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참 생명이셨습니다.

2.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손상된 창조질서를 그리스도의 부활로 회복시키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다시 하느님의 것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로마 5,12-21참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죽음의 세력에 내던져진 피조물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자의 부활로 세상을 이긴 하느님께서 다시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본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생명체는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미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부여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과(창세 1,26)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복음의 말씀은(마태 1,23)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러 하느님의 사랑은 절정에 달합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낸 값진 것입니다.
  
3.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생명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소중한 생명은 인간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잘 다스려야 하는 몫을 주셨습니다(창세 1,28).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생명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소유하고 착취하며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약자의 생명이 느끼는 수치심과 고통을 도외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생명을 짓밟았습니다.
   오늘날 생태환경 파괴, 동물에게 가하는 온갖 형태의 학대,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폭력이 갈수록 만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행하는 폭력, 곧 어린이 학대, 여성의 인권과 존엄을 해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 노인 학대, 이주민에 대한 착취와 폭력 등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생명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에 타인의 생명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은, 이러한 방식으로 다른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인간 본연의 도덕적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전통적 인간애의 가르침을 잊게 하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본능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삭막하고 무서운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앞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인간에게 참 생명을 회복하도록 명하십니다. 이 믿음을 간직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온갖 형태의 인권유린과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 그리고 그들에게 행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회피하고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시며 질책하실 것입니다.  

4. 생명 감수성의 부활을 희망하며
   ‘생명 감수성’이란 다른 생명이 느끼는 마음의 감정을 읽어내고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생명 감수성이 높은 사람은 잘 공감하고 배려합니다.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높은 생명 감수성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3). 비단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생명에 대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느끼고 배려하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믿는 이들 안에 부활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기꺼이 눈을 들어 생명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생명의 중재자이신 성모 마리아
   생명이신 주님을 잉태하고 낳으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과 인간 생명의 중재자이십니다. 성모님은 남다른 생명 감수성으로 주님을 낳고 기르셨습니다. 특히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성모님의 생명 감수성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첫 번째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요한 2,1-11 참조). 이렇듯 성모님은 항상 우리의 처지를 돌보시어 주님께 전구하시고, 지금 고통받는 모든 생명과 함께 아파하시면서 주님께 자비를 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다시 용기를 내야 합니다. 여전히 온갖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모든 생명을 돌보는 생명 지킴이가 될 것을 다짐하며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주님의 부활 대축일 교구장 메시지  

 

 

찬미예수님,

주님의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교우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기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지난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마음도 얼어붙었습니다. 이 추위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원죄’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자신을 살인범의 딸로 오해하고 있었던 주인공 요오코의 얼어붙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제 마음은 얼어 버렸습니다. 요오꼬의 빙점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다.’라는 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젠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 아이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이미 살아갈 힘이 없어졌습니다. 얼어붙어 버린 겁니다. 아빠, 엄마, 부디 루리꼬 언니를 죽인 제 친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 저는 지금까지 이처럼 용서를 바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용서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엄마에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제 핏 속을 흐르고 있는 죄를 ‘용서하겠다.’고 분명히 말해 주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도 ‘빙점’이 있습니다.
‘나도 당했다.’는 억울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비난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과 미안함으로 이제껏 걸어온 길을 떠났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혼돈의 틈으로 시기와 질투와 정치적 음모가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억울함이 또 다른 억울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우리 사회입니다. 
쇄신이 필요한 우리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회개가 필요한 우리 자신들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희망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희망합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하느님은 불의한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도 희망할 수 있는 분이심을 주님의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이 희망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 속에도 기쁨을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죽음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느님이 우리의 기쁨, 우리의 위로, 우리의 힘,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8년 부활대축일에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천주교 원주교구장

 

   

[의정부교구]

 

내 상처를 만져 보시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거룩한 사순시기를 보내고 오늘 기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선물은 평화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삶의 모든 의미와 희망을 잃고 불안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였습니다.  이 말씀은 스승을 배반하고 떠났던 제자들에게는 용서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부활로 향하는 사순시기에 우리 민족을 가련히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한반도에 평화가 움트는 희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동안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켜있었고, 단단한 얼음처럼 녹지 않을 것 같던 한반도, 전쟁의 어두운 구름마저 끼어있었던 한반도에 드디어 평화의 봄이 올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역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을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처럼 우리 손에 쥐어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평화라는 ‘유리그릇’이 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주변에는 우리가 묵상하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할 영적인 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보물들이 부활을 이야기하는 성경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하셨습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파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만져볼 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고, 때로는 상처를 입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상처들을 바라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만져보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람만이 제자들처럼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흔히들 우리 민족의 아픔인 분단을 표현할 때 ‘분단의 상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분단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상처입니다.  분단이 된 계기도 형제들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전쟁을 했기 때문이고 분단으로 가족들을 잃고 생이별을 하고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분단의 긴 세월 동안 남북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서로 헐뜯고 미워하였고 때로는 형제가 굶주려 있을 때도 모른 체하며 지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상처가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너무 긴 세월 서로의 상처를 외면하며 지냈기에 평화의 주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긴 세월 평화를 미루어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평화를 위해 기도해왔고, 주변 강대국들의 저마다의 속셈들을 인내하며 대화를 끊임없이 외쳐왔기에 평창 올림픽 같은 평화의 발걸음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긴 분단을 통해 남북이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도 예수님의 상처 안에서 바라보도록 합시다.
  이제 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을 나날의 삶에서 맛보고, 부활의 선물로 우리 민족에게 찾아온 평화가 결실을 맺어 나가는 평화의 여정에 함께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과 평화의 여정을 가로막는 돌들을 치워야 합니다.  부활 새벽에 천사들은 예수님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들을 치웠습니다(요한 20,2).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평화의 여정을 가로막는 돌들을 먼저 치워야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에 깊이 박혀있는 죄악과 악습의 돌을 치워내야 합니다.  때마침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의 악습들을 과감히 청산하고자 하는 운동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솔선수범하여, 우리 삶에 박혀있는 어둡고 깨끗하지 못한 돌들을 치워 나가며 이 세상 안에서 부활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함께 나누며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 갑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2018년 부활절
이기헌(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수난과 모욕을 겪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음을 맞으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철저히 당신 뜻을 따르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여야 다시 산다는 것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자연을 보면 부활의 신비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겨울, 우리는 유례없이 혹독한 추위를 겪었습니다. 폭설과 겨울 폭풍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습니다. 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딱딱한 가지만 남아 찬바람을 맞으며 죽은 듯이 겨울을 납니다. 죽음의 세력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린 것 같은 겨울이었지만, 어김없이 따스한 봄날은 찾아오고, 죽은 것 같던 나무도 조금씩 물이 오르고 새순이 돋아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봄꽃도 일제히 피어 봄이 왔음을,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부활(復活)”의 계절입니다. 모든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부활 사건은 “희망”이 됩니다.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의 십자가길, 그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우리는 주저하거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 너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 우리의 구원이 있음을 압니다.

  근래 교구는 많은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내고 회개와 쇄신을 이루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죽음의 세계와 이 세상을 가로막고 있던 무거운 돌이 치워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어둠의 세력이 막아 놓은 무거운 돌을 치우고 무덤 밖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와 쇄신입니다. 교구 내의 모든 사제단, 모든 신자 공동체가 쇄신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여 회개하는 것만이 쇄신으로 나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교구는 새로운 백 년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맞았습니다. 올해 저는 사목교서 “새로운 서약, 새로운 희망”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드망즈 주교님의 원의를 이어 성모님께 다시 세 가지를 청하고 약속했습니다. “교구의 쇄신과 발전”, “성소자 발굴과 사제 양성을 위한 은총”,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의 기쁨이 충만한 본당과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말입니다. 사목교서 실천의 첫 해로 우리는 올해를 “회개의 해”로 삼았습니다. 잘못된 부분을 철저히 자각하고 주님께로 향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쇄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사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이날, 저는 교구장으로서 우리의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모욕과 모함, 수난과 고통, 죽음을 감내하고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나에게 주어지는 시련들을 잘 이겨 내고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옛것을 죽이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겸허한 대지처럼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자신을 낮추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지는 겸허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 서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아래 있고 짓밟힙니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썩고 죽은 것까지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대지는 부패와 죽음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밑거름으로 삼아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아멘.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작은 부활의 삶이 큰 부활에 이르게 합니다.

 

 

 “저는 다시 살아나, 여전히 당신 안에 있나이다. 알렐루야!”(오늘 미사 입당송).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우리는 시편 139장의 환호로 시작합니다. 2018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날, 예루살렘과 그 주민들은 이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하늘처럼 믿고 따르던’ 스승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충격과 실망과 두려움에 떨면서 죽지 못해 사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리셨고, 직접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그들의 충격은 기쁨으로, 실망은 커다란 희망으로, 두려움은 용기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제1독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 우리는 오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환호와 기쁨, 희망과 용기를 다시 체험하고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비록 우리 신앙인들이 뜻하지 않게, 생각지도 않은 큰 불행을 당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부활에서 옵니다. 하루하루 연속되는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도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그 희망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고, 때로는 웃음도 지을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이번 부활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부활이란 어려움을 희망으로 이겨내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것이지만, 이 지상의 삶에서 날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활들을 체험하고 실현함으로써, 큰 부활, 영원한 부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부활들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누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바로 일상의 작은 부활입니다. 내가 성실히 노력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기도와 전례와 미사를 통해서 내가 영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것, 이웃과의 갈등과 불화를 해소하고 화해하면서 마음의 고통을 더는 것, 오랜 병고에서 조금씩 털고 일어나는 것,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랑으로 아이를 낳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작은 부활’입니다. 그 이외에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부활들이 하나둘 모이고 쌓여 결정적으로 주님 가까이 갈 수 있는 ‘큰 부활, 영원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을 찾고, 부활을 터득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고난이든, 고통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고통과 죽음이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이기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구원의 보증 때문에 서로서로 축하인사를 하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알렐루야”(시편 118).

총대리 손 삼 석 주교

 


  

[청주교구]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 증언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실제 사건입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빈 무덤 사화(史話)와 발현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 여전히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신 발현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증언하는 복음 선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서에 기록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고을의 과부의 외아들이나, 베타니아 마을에 라자로의 경우처럼 단순히 목숨이 되살아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전능으로 다시 살아난 이들은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46항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근원이요 토대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죽어야 할 숙명을 지닌 우리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으며, 천국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단지 예수님께서 홀로 불사불멸의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아가 우리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을 뜻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우리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생명에 이미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들이 삶의 새로움 안으로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 생애를 하나의 길로 이해하고 있던 사도 바오로는 세례로 다시 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전의 악습과 죄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길을 걸어가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부활을 믿으며, 부활을 되새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길,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새 생명의 길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둠을 밝히는 ‘빛의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8년 사순시기 담화문을 통해 우리가 어둠에서 비롯되었던 악한 행실을 벗어버리고, 회개하여 죄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부활 성야 미사 중, 우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파스카 초에서 빛을 받아 자신의 초로 불을 밝혀 듭니다. 이 불은 바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뜻합니다. 사제는 파스카 초에 불을 붙이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님, 이 빛으로 저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4. 최근 우리 사회는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사회 각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충격과 함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여성 인권 유린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교회 역시 이러한 부끄러운 일들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접하며, 세상의 그릇된 가치와 풍조, 권력과 지배의 경향이 교회 안에도 이미 퍼져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편협한 이기심과 독단적 사고에서 비롯된 다른 이들에 대한 비방과 멸시는 우리 사회를 대립과 분열로 몰아가는 현실입니다. 어렵게 이루어진 남북 대화에 대해서도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내는 디딤돌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보다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의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은 바로 회개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먼저 그릇된 행동에 대한 깊은 반성과 참회, 그리고 악한 행실을 벗어버리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반성과 성찰 위에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의 길,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은 모든 이들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참된 생명의 길이며,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또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며, 지배와 권력보다는 나눔과 섬김의 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갈 때,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빛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우리의 구원이요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새 생명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8년 4월 1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2018년 주님 부활 대축일 담화문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목자로서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며 양들을 껴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을 떨쳐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요 근래 교회 안에서까지 벌어진 기막힌 모습에서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끼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도 다시금 기쁨을 허락하시고 용서를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시리라 믿으며 희망합니다.

 

 

육신의 부활

 

우리는 부활 축제를 위해 사순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는 부활의 생명은 사순절을 통해서만, 특히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사건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목요일에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 먹어라.”하시며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팔아먹고 배반하고 도망칠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몸을 쪼개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성금요일에 주님께서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받으며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성토요일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어두운 땅에 묻혀 썩게 하셨습니다. 

그 몸이, 당신의 몸을 쪼개신 성목요일의 몸,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절규하며 숨을 거두신 성금요일의 몸, 회칠한 무덤 속에 누인 성토요일의 몸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사멸할 몸은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하여 내놓을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이를 통해 부활의 빛을 발하는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썩어 부패한 몸이 다시 생기를 얻어 그전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이 몸이 부활의 빛을 발한다는 것을, 썩어 없어질 이 몸으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죽어 없어진 몸만이 부활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몸을 쪼개고 비운 사람만이 부활의 경지에 든다는 말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몸이 다른 이를 위하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놓을 수 있는 고귀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초대

 

지금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미투 운동’은 우리의 몸에 대해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운동이 “나도 당했다.”를 벗어나서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 먹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나도!”하고 응답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면 하고 희망해봅니다. 우리의 몸이 근원적으로 다른 이를 위하고 섬기기 위해 있다는 것을 깨치는 운동으로 말입니다. 상대의 몸은 내가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약자를 힘으로 눌러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리기 위하여 쪼개고 희생시키기 위해 있습니다.

교회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데도 우리 사회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가 자기의 몸을 쪼개지 못해서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내 몸이다. 내 피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미 투”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합니다. 내 몸에서 진정 부활의 빛이 발하기를 바란다면, 부활 시기에 나누는 기쁨이 진심이기를 바란다면 온갖 지식과 유식한 말로 현혹할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쪼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부활의 삶으로 초대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자만이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가톨릭 성가 489)하고 노래하였습니다. 못 박히신 주님, 매달리신 주님, 못에 뚫린 손과 발, 뼈 드러난 손과 발, 창에 뚫린 심장, 거기서 흐르는 선혈, 싸늘하게 숨지신 몸을 보는 자만이 부활한 주님의 몸을 만나 뵐 수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힘없는 이, 고통받는 이, 눈먼 이, 외국인 노동자들, 죄로 인해 아파하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의 슬프고 아픈 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만이 부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가 그들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쪼갤 때 우리는 ‘큰 사랑’을 세상에 선사하며(요한 15,13 참조) 세상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놓고 쪼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결심이나 결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결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뜻을 헤아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당신 자신을 맡기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쪼개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부활 축제는 성령 강림 축제로 이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삶이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겸손되이 의탁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18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의 삶’을

 

 

 

‘쇄신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묵시 21,5)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쇄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그리고 또 ‘쇄신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되살아나는 “새로운 삶”(로마 6,4)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사는 ‘쇄신의 삶’이 부활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묻혔습니다.(갈라 2,19; 로마 6,4 참조)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 5,24)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데,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죄에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따라야 할 첫 번째 조건으로 금욕생활과 참회생활을 통해 죄의 결과와 우리 안에 새겨진 그 죄의 흔적들에 죽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두 번째 세례인 고해성사를 통해 날마다 범하는 죄에 있어서 다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그분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생명의 중심에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세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합니다. 전례적으로 부활 대축일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탄생의 이 신비를 다시 살게 해줍니다. 사순절의 참회와 부활 판공성사로 우리가 죄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죄에 죽어야’하는데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어떤 죄이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죄’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에 죽는다는 가장 적극적인 의미’는 형제를 위하여 죽을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의 기준으로도 ‘형제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 가운데 하나를 당신과 동일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죄에 죽는다는 것’은 형제를 위해 죽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고, 베풀며 사랑하는 모든 행위를 ‘죄에 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목마른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이주민들과 난민들, 헐벗은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 억울하게 갇히거나 죽은 사람들 등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최근에 ‘미투(Me Too)’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하는 일, 그리고 70주년을 맞는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아픔에 함께 하며 그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 되새기는 일도 ‘형제를 위해 죄에 죽는 삶’, 곧 ‘형제를 사랑하는 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초대되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본당의 쇄신’이라는 슬로건 아래 각자 처해진 처지에 따라 ‘쇄신의 삶’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의 삶’을 새롭게 살고자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본당의 쇄신을 위해 어떠한 ‘쇄신의 삶’을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되는지를 각자 한 번 찾아봅시다. 무엇보다도 본당 공동체를 참 ‘친교의 집’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제를 위해 ‘죄에 죽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세상의 쇄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사는 ‘쇄신의 삶’으로 부활의 축복과 은총을 맘껏 얻어 누립시다.

주님, 저희 모두가 ‘쇄신의 삶’을 살아 본당의 쇄신을 이루게 하소서. 아멘

2018년 4월 1일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셨으니, 이 사랑이 세상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알렐루야!

“오, 놀라워라,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자비.”

  부활성야 미사 때, 온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파스카 찬송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얼마나 고맙고 가슴 벅찬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밤은 거룩한 힘으로 
              모든 죄악을 몰아내고 모든 허물을 씻어 주네.
              죄인들에게 깨끗함을 돌려주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찾아 주네. 
              미움을 물리치고 화합을 이루며 권세를 누르네.”(파스카 찬송)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십자가 고난을 겪고 부활하심으로써 죄로 얼룩진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놀라워라,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자비. 
               오, 크시어라,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파스카 찬송)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우리 모두는 이처럼 놀랍고 엄청난 사랑을 무상으로 받았지만, 아직도 하느님의 이 큰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그 사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만 살려고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이용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만의 삶을 즐기는 데 깊이 빠져들어 다른 이들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현시대에, 한데 어울려 웃고 나누는 따뜻한 사랑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끝없는 경쟁과 무자비한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을 찾는 일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배타적, 수직적, 위계적 갑을관계로 빚어진 인간관계의 간격을 이어줄 인격존중과 평등의 다리를 놓는 일을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해방과 은총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잡혀가고, 눈멀고, 억압받는 이들과(루카 4,18-19 참조), 어쩔 수 없이 경쟁의 노예가 되거나, 자기세계 속에만 갇혀 살거나,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의 숨결이 꼭 필요합니다(창세 2,7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그리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마태 6,10 참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선행과 업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호의로 주신 거저 받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그분께서 선사하신 하느님 나라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회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1요한 4,10)을 깨닫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회개는 자신의 이기심을 철저히 포기하고 하느님의 기준대로 살기 위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태 6,33 참조). 그러므로 세상의 거짓되고 냉혹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돈과 명예, 권력과 폭력의 헛된 우상을 추종하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마태 4,1-11 참조)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회개의 징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한국 평신도 희년

  우리는 지금 ‘평신도 희년’(2017.11.19.-2018.11.11.)을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진심을 다해 이 희년을 경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그 첫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평신도의 헌신과 희생을 제쳐두고 생각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남북이 분단된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일상생활이 펼쳐지는 사회 곳곳에서 쇄신과 변혁을 위하여 평신도들이 쏟은 열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언급한 평신도에 대한 헌사는 글자 그대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을 위한 헌사로 여겨도 과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남녀 평신도들, 자신들의 일상생활과 활동 속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때로는 너무 멀어 잘 보이지도 않고 결코 세상의 갈채를 받지 못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사람들, ... 하느님 은총과 능력을 확고하게 신뢰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역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겸허하고도 위대한 건설자들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17항)

  평신도 희년 동안,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평신도 희년을 경축하며, 다양하고 풍요롭게 평신도들의 노고를 기억하기를 권고합니다. 아울러 희년의 정신이 그 본래의 취지에 맞갖게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확산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북의 화해와 일치,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희년으로 구체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고, 모든 이의 인권과 존엄성을 존중함으로써 더욱 품위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희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의 징표이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알렐루야!  

2018년 4월 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축제를 지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뚫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한분 한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빕니다.
기쁨이 넘쳐흐르는 오늘, 우리는 부활절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중요한 부활절을 우리는 참된 기쁨 없이 하나의 행사로만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봅시다. ‘부활절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물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어서 각자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부활의 의미가 명확해지고 또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제가 깨달았던 부활절의 세 가지 의미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부활절은 저에게 믿음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 곧 요한에 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참조)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빈 무덤과 아마포를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빈 무덤은 달리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곧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갔거나 훔쳐갔다고 설명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직접적인 증거 없이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신 하느님의 권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하셨던 예수님을 마냥 죽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무덤에 들어간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뒤늦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사도 2,24 참조)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의 권능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로마 4,17)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믿음의 축일로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다지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1사무 2,6 참조)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에 의해 그리고 그분을 향해 살기로 다짐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둘째, 부활절은 저에게 희망의 축일입니다. 어떤 희망인가요? 우리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리라는 희망입니다. 인류가 역사 시초부터 간절히 추구하여왔던 이 희망은 구약에서 약속의 형태로 점점 구체화되었지만 미완성의 상태였습니다. 그 희망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모든 창조물이 기다리던 희망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의 가장 오래된 증인은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는 코린토 공동체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19-22)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고, 그래서 우리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 이루어질 이 희망의 방법은 우리에게 아직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희망의 축일로서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그동안 등한시했던 궁극적인 운명을 직시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직시는 현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현세를 소홀하게 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현세를 정의와 사랑으로 가꾸려는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열려진 새롭고도 결정적인 미래를 희망하며 현실의 변화를 위해 역사적인 실천을 다짐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절은 저에게 사랑의 축일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로마 5,8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신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우리를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온전히 순종하여 목숨을 바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요한 10,17 참조)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로마 4,24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사랑의 축일로서 사랑이 때때로 어리석고 약하게 보이지만 어떤 권능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날입니다. 모든 것 위에 군림한 죽음을 마침내 사랑이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려고 결심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올해 사목교서에서 교구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의 첫 여정으로서 신앙의 쇄신을 요청하며,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2) 하고 호소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활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 삶이란 하느님의 권능을 분명히 믿고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사목교서에서 제안한 다섯 가지 요소를 꾸준히 실천하심으로써, 일 년 내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축제를 지내시길 빕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사도요한)

 

 

 

  

[제주교구]


 

  

 

 

  

[군종교구]

2018년 부활 메시지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I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공경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위험을 무릅쓰고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훗날 예수님의 이 부활을 우리 믿음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써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라고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함께 마음을 다해 “주님이신 예수님, 당신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며 부활절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II

저는 이 뜻깊은 부활 대축일을 맞으면서, 교회의 기도서인 ‘성무일도’의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인 사르데스의 멜리톤 주교님의 부활 대축일 강론을 다시 읽었고, 이 주교님이 주님의 입을 빌려 서술한 다음과 같은 주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다. 나는 죽음을 멸하고 원수를 눌러 승리하였으며 지옥을 발아래 짓밟았고, 강한 자를 묶고, 인간을 하늘나라의 정상으로 올렸노라. 나는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죄로 더럽혀진 너희 모든 백성들아, 자 오너라.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아라. 나는 바로 너희의 용서이며 구원의 파스카이고 너희를 위해 도살된 어린 양이다. 나는 너희를 씻어주는 물이다. 너희 생명이고 부활이며 너희 빛이고 너희 왕이다. 나는 너희를 하늘나라 정상으로 데려가려 하고, 너희를 부활시키며 너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주고 나의 오른손으로 일으켜 세우겠노라.”

저는 이 강론이 주님 부활의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죽음을 멸하시고 원수인 마귀를 눌러 이기신 승리이며, 지옥을 짓밟으시고 강한 자를 묶으시고 우리 인간을 하늘나라의 정상으로 이끌어 올리신 의미, 곧 인류 구원의 대과업을 이루신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저는 여기에 추가하여,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주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어,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확신을 갖고 복음을 살아가고 또 전파할 수 있게 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굳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어서 멜리톤 주교님은 주님의 입을 빌려 부활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죄의 용서를 받으라고 이렇게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더럽혀진 너희 모든 백성들아, 자 오너라.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아라. 나는 바로 너희의 용서이며 나는 너희를 씻어주는 물이다.” 예수님 자신이 용서이시고 씻어주는 물이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죄의 유혹을 받으며 유혹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에게 지극히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인 성적 욕망과 재물, 권위, 명예 등의 소유 욕망을 통해 마귀의 유혹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범하는 죄들을 이렇게 열거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1-22)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기에 포함하지 않으셨지만 어떤 면에서 가장 심각한 죄로 여기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위선의 죄’입니다. 

주님께서 열거하신 죄들 가운데, 성적 욕망의 남용으로 인해 올 수 있는 죄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바로 불륜, 간음, 방탕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신 이 죄들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쉽게 그리고 자주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조심해 피해야 하는 죄이며 인간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죄입니다. 재물, 권위, 명예 등을 찾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도 마찬가지로 남용되면, 역시 무서운 비극을 초래하게 되며, 우리는 이미 이런 예들을 많이 보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에 떨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다음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욕심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이것은 잘못이다.’ 혹은 ‘이것은 죄다.’ 이렇게 느끼기 시작할 때에,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단호히 결단을 내려 중지하거나 거기서 떠나야 합니다. 그대로 머물며 즐길 때, 이는 큰 불행을 맞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는 이 결말에 대해 “죽음을 낳는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저는 구약의 위대한 성조 요셉이 자신의 주인 아내가 유혹해 올 때 “제가 어찌 이런 큰 악을 저지르고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창세 39,9)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일을 되새깁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하느님 앞에서의 죄의식’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유혹을 이기게 하며, 이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축복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갖게 되는 이 ‘죄의식’이 우리 인간의 영적 성장과 인격 성장에 큰 도움이 되고, 이것이 많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죄의식’을 ‘복된 죄의식’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에 더하여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을 갖는 것 역시 ‘복된 죄책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 세관장 자케오가 지녔던 이 ‘죄의식’과 ‘죄책감’이 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일으켰고, 이 욕망을 아신 주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이 만남이,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보속을 결심하여 주님께 말씀드렸고, 이 회개, 이 변화에 감동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케오 혼자만이 아니고 그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받게 하는 놀라운 축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III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우리의 믿음을 더 굳게 더 확실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이 믿음이 회개로 이끌어 주기를 희망하도록 합시다. 우리 함께 부활 찬미가를 노래하면서 부활절을 지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8년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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