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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19년 10월 18일 (금)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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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사도신경열두번째/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133105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19-10-11

열두번째 (2019.10.11)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1고린 15: 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흡족하게 도와주고 계십니까 아니면 욥의 고백처럼 에 계신가 하여 돌아보면 거기에도 안계시고 에 계신가 하여 그리로 돌아보아도 계시지 않는 무관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멀고 먼 절대 타자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까 솔직히 하느님이 잘 인식이 안되죠 희망 없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힘을 빼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가지도 갉아 먹는 무서운 힘이 있는 거에요 실험용 쥐들을 빚이 전혀 들지 않는 항아리 속에 가두면요 30분에서 3시간 안에 다 죽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항아리 속에 실험용 쥐를 넣고 항아리 뚜껑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을 뚫어 주면 사흘 이상을 살아요 절망이라는 건 그런겁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절망속에서 나와서 절망을 살다가 절망속에서 죽어요 반면에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성도에게는 희망정도가 아니라 번복될 수 없고 확정된 희망 소망입니다 희망과 소망은 달라요 희망 사항은 번복될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 수도 있어요 중도에 실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달라요 소망은 확정된 희망을 소망이라고 그래요 성경은 성도에게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망을 가진 성도는 절대 절망이 주는 쓴 잔을 들고 독설과 원망에 아리아를 불러서는 안되는 거죠 그런데 왜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그렇게 자주 하느님을 향한 원망의 아리아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그건 우리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도가 가져야 하는 소망에 정체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은 바로 그 소망, 성도가 절망에 현실속에서 그 현실을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에 정체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소망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을 한마디로 축약하여 제시를 해요 오늘 본문 12절과 19절을 보세요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성도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거죠 만일 이 세상에 삶이 끝이라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시험등은 성도를 우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죽고 싶게 만들어야 맞아요 그런데 이 땅에 삶이 끝이 아니라 이 땅의 삶과는 비교할수도 없는 영원한 삶이 존재하며 그 영원 속에서 살수있는 신령한 몸이 성도에게 새로 주어지게 된다라는 부활신앙이 성도에게 있는 한 성도는 이 땅에 어둡고 암담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라는 거에요 이 땅에 삶이 끝이 아니니까 만일 現世의 현실로 모든게 끝이 난다면 그렇게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며 사는 성도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이 맞죠 뭐가 있는줄 알고 손해도 감수하고 희생도 감수하며 살았는데 이 세상이 끝이야 제일 불쌍한 인간들이죠 우리가요 現世가 끝인데 왜 참고 삽니까 現世가 끝인데 왜 당해줘요 왜 용서를 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내걸 찾아 먹어야죠 내 이익을 챙겨야죠 이 세상이 끝인데,

여러분은 정말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에 몸으로 살아나 영원을 살게 되는 그 새하늘과 새땅에 존재를 믿으세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육신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배우고 훈련하며 실습하는 장일 뿐임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반드시 그 새하늘과 새땅에서 부활하실 것을 믿으세요 막연하시죠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그동안 엉뚱한 것만 배워 오신거에요 오늘 그 부활소망을 확고하게 붙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 부활소망을 확고하게 붙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교에 케리그마를 아주 짧은 문장으로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1절에서 4절까지에요 한번 볼까요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 .

이게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핵심)에요 바오로의 케리그마입니다 성경 전체를 줄이고 줄이고 줄이고 줄이고 요약하고 요약해서 한문장으로 딱 줄여놓은게 이 부분이에요 그게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입니다 너무 간단하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이 성경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 이걸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 길래 이걸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라는건 믿어요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음은 예수님에 살아나심 그 부활까지가 복음이에요 그 부활은 여러분의 부활도 함께 함의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부활 이후에 삶을 소망하며 사는 거에요 그걸 성도라 그래요 그런데 그 부활까지를 믿지 않고 반쪽짜리 그냥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어 난 구원받았어 할렐루야 그런데 뭐요 이 땅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에 도움을 얻어서 잘먹고 잘살고 성공하고 번영하겠다 라는거 아닙니까 그게 복음입니까 아닌것입니다 여러분 이 간단한 한줄짜리 케리그마도 우리는 다 이해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걸 배우는 것입니다 이 한줄을. 지금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타락을 한 건 부활신앙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기복주의 신비주의 성공주의 번영에 신학 고지론 이 모든 것들은 다 부활신앙에 실종의 결과물들이에요 부활을 아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이 땅에서의 번영과 성공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교인줄 알아요 예수의 부활은 진정한 대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에 제사가 완전한 제사였음이 인정된 거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제일날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가 온전하지 못하면 그 제사장이 살아서 못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그게 완전한 거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지성소에서 살아 올라오신 것입니다 부활의 첫번째 의미는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예수님에 완전한 십자가에 제사로 그 안에 연합된 예수님에 형제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가 될 것임을 공포하는 사건인 거에요 그게 예수님에 부활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고백안에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라는게 굳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 전체에 부활에 대한 보증서나 확증서 같은 것이였던 거에요.

고린도전서 1520-22절 보세요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걸 믿으시냐구요 부활의 삶이 여러분에게 약속 되있다라는 그 사실을 믿으시냐구요 그 삶은 영원이에요 그 영원으로 가기 위해 잠깐 과정으로 거치는게 現世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목숨걸고 있잖아요 그건 부활신앙 갖고 있는 사람아닌거요 사도바오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첫 열매라 칭하는 것을 주의깊게 보셔야 되요 그 첫 열매라는 단어는 제사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여러 절기를 지켜야 했죠 그 중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가 과월절 맥추절 수장절이에요 과월절은 어린양 예수의 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구원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맥추절은 하느님에 은혜로 약속에 땅에서 열매로 추수가 될 하느님 백성들에 종말론적 상태 그 상태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에요 그 맥추절을 오순절이라고도 하죠 그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탄생했죠 교회가 추수된 것입니다 그래서 맥추절과 오순절을 혼용해서 쓰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하느님의 은혜로 풍성한 하늘의 풍요를 기업으로 받게 될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그 교회의 풍요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에요 추수한 것을 창고에 쟁여놓은게 수장절이거든요 그러나 그 모든건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걸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그 풍요의 절기인 수장절을 광야의 천막속에서 보내게 하신 거에요 그 수장절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천막치고 살아야 되요 광야의 천막 그래서 초막절이라고도 하죠 씨앗 하나 뿌릴 수 없는 광야를 살던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추수와 저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에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꼭 기억하며 하늘에서의 풍요 또한 온전한 하느님에 은혜로만 말미암는 것임을 기억하고 인정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고 초막절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가 오신 이후에는 모든 절기 지킴이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오로가 아직도 절기나 월삭에 집착하고 있느냐 그러면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전히 지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까지 이야기를 한거죠 그중에 과월절 사흘 후를 첫 이삭드리는 날로 드리게 했어요 초실절 하고는 달라요 첫 아삭드리는 날인데 그 날에는 이스라엘이 그해의 최초로 거둔 이삭을 하느님 앞에 드려서 제사를 지냄으로 해서 자신들에게 허락된 그 모든 이삭 모든 열매 앞으로 자신들이 거둘 모든 이삭 모든 열매는 전부 하느님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했어요 그게 첫 이삭 드리는 날이에요 그 절기를 머리속에 두시고 예수님에게로 한번 가보자구요 예수님은 과월절날 돌아가셨습니다 어린양이 되셔서 돌아가신 거에요 도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 첫 이삭드리는 날 부활하셨어요 그걸 바오로가 첫 열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첫 이삭 드리는 날 드렸던 첫 열매가 상징하는게 나머지 열매가 전부 하느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라는거예요 그러니까 첫 열매가 함의하고 있는 한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신 그 예수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이 열리게 될 교회 그 교회가 바로 이 예수처럼 부활하여 하느님에 것이 될 것입니다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첫 이삭 드리는 날 부활하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따라서 예수님에 희생으로 열매가 된 우리 성도는 예수님에 부활이 사실인 것처럼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이 준비하신 새하늘과 새땅에 시민으로 살아날 것을 믿어야 되는 거에요 그거 하나 믿으면 모든거 다 해결됩니다 그게 믿겨지지 않아서 이렇게 여러분이 외롭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거에요 그거 안믿겨 지니까 이세상이 끝인거 같죠 그래서 슬픈 거에요 끝이 아닌데 왜 그렇게 죽을 것 같이 힘들어 합니까 또 다른 부활이 있다면서요 안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야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약을 비롯한 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거고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닌 거에요

    

 

요한복음 1125절 보세요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보세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르켜 부활이요 생명이래요 부활과 영생을 동격으로 딱 띄어 놓고 설명을 해주세요 부활이 영생이에요 부활이 영생이에요 그러니까 부활 이후의 삶이 영생이에요 여러분은 그 삶을 추구해야 된다니깐요 지금 이땅에서 하늘에 복인 그 영생을 이땅에서 얻을려고 하시면 안된다 말입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이 하늘에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緣木求魚訪佛한 거에요 그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그러한 모습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승부를 보고 싶어하는 세상 사람들에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맛보며 살수 있어요 왜냐면 성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이미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는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에요 묵시록 20장에서 배웠잖아요

 

예베소서 25절 보세요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 살았어요 그럼 부활한거에요. 그런데 첫번째 부활이에요 두번째 부활이 있습니다 이게 가시적 부활이고 첫번째 부활은 영적 부활이에요 성도의 첫째 부활은 가시적인 하늘의 풍요속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 둘째에 부활로 가는 그 여정속에서의 믿음으로 사는 삶을 지칭하는 거에요 그게 첫째 부활이에요 왜냐하면 첫째 부활을 한 성도들에게는 아직 가시적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지 않았으니깐요 성도는 예수님의 은혜로 이 세상속에서 첫째 부활의 삶을 살아요 그들은 반드시 둘째 부활로 들어가게 되요 그런데 그렇게 확실한 둘째 부활을 약속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에 삶을 쫓아서 작은 십자가와 작은 지옥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는 그러한 첫째 부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기 십자가와 작은 지옥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의 은혜에 필연성을 배우게 되는 거고 아울러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는 것을 발휘하여 둘째 부활을 확신속에서 기다리며 살고 있는 존재들에 실제를 만천하에 들어내는 삶을 사는 거에요 그 삶을 다른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삶이라 그래요 왜 십자가를 지고 작은 지옥을 살면서도 이 둘째 부활을 소망속에서 기다리는 첫째 부활을 한 사람들이 있다라는 그 사실 자체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하고 그를 만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게 성도가 첫째 부활을 한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첫째 부활에 영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힘든 거에요

고린도전서 1542절 보세요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바오로는 45절에서 첫사람 아담을 산영이라 부르고 마지막 아담 예수를 살려주는 영으로 불러요 산영과 살려주는 영이 대조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산 영은 뭐 꽤나 좋은 거 아니에요 산 영은 살려주는 영에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살림을 받기 전에는 존재할 수도 없는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게 산영이에요 푸시케 그게 아담입니다 그렇게 부활전에 자연인은 하느님의 은혜로 그저 살아있는 상태였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려주신 영이라는 거에요

이 땅에서 첫째 부활을 한 사람들의 삶 다른 말로 나를 부인하고 하느님과 내 이웃을 살려내는 하느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게 성도인 거에요 다른 사람들에 피를 뽑아 내가 성공하고 번영하는게 성도에 삶 아니라니깐요 첫째 부활에 풍요는 바로 그러한 영적인 풍요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육신에 삶 속에서 썪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으로 이름붙여진 이 육신을 부인하고 심어 버리는 거에요 그 육신에 금테둘러달라고 하시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 육신을 자랑스럽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 안되는 거에요 그거는 썩을 거라니깐요 그래서 하느님이 여러분을 이땅에서 지옥에다 심고 있는 거에요 씨앗으로 심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은 반드시 자기의 육신을 찟고 나와야 되요 죽어야 됩니다 그래야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거에요

마귀가 쾌락과 여러가지 화려한 것으로 매력으로 위장하고 있을뿐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살면서 고통이 뭔지를 몰라요 느끼지 못해요 마귀 때문에 그걸 영적 문둥병이라고 하는 거에요 여러분은 그 고통을 느낄수 있어야 되요 이 세상속에서 여러분이 문둥병자가 아니라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고통을 겪어야 되요 예수님이 한알의 밀알이 되어서 땅에 심겨 죽으셨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수많은 열매들이 일어난 것처럼 여러분도 바로 그렇게 땅에 심기우는 삶을 사는 거에요 완전히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어요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건 회복이라 그러지 부활이라고 안그럽니다 여러분의 삶은 이 땅에서 죽는 과정이에요

 

고린도전서 1536절 보세요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3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십니다. 씨앗 하나하나에 고유한 몸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씨는 누구 나에요 나 내 육신 죽이는 거에요 세상에 대해서 내 육신 죽여가는 거에요 이 땅에서 죽지 않으면 안살아 나는 거에요 그래서 아주 자근자근 밟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로운 형체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씨앗으로 심겨 죽어야 되요 그래야 새것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삶에 섬기는 삶 용서하는 삶 져주는 삶 당해주는 삶이 허락되는건 필연적인 거에요 왜 여러분에게 그 왠수 같은 남편이 왔는지 아시겠죠 왜 여러분에게 그 왠수같은 마누라가 왔는지 아시겠죠 죽는 거에요 내가 씨앗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속에서 부활에 소망을 붙들고 하루 하루를 이겨내야 하는 거에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요 하느님께 따지지 마세요 그게 안죽겠다고 발버둥치는 거에요 왜 나한테 이런일이 생기냐고 죽어야 산다니깐요 우리가 좀전에 읽었던 고린도전서 1545절에 산영과 살려주는 영 그 두 단어가 다른 단어에요 앞에 단어는 푸시케고 뒤에 단어는 푸뉴마에요 왜 그런 단어는 그렇게 다르게 썼을까요 한문장 안에서 여러분 푸쉬케는 보통 소울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푸뉴마는 보통 스피릿이라는 의미로 쓰여요 그러나 혼용해서 씁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푸쉬케라는 단어 그 단어는 그냥 정지해 있는 상태를 함의하고 있는 단어고 푸뉴마 스피릿이라는 단어는 디렉션 방향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에요 산영 그냥 하나님에 의해 살림을 받은 산영은 아담들은 살아 있다가 그렇게 정체 되있다가 그냥 죽는 거에요 그러나 부활의 영 예수 안에서 부활을 한 그 살려주는 영들인 교회는 소망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갖고 디렉션을 갖고 현실을 밟고 일어나서 가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안식후 첫날 부활했는지 아세요 여덟번째 날이죠 안식후 첫날 일곱번째 날이 안식일이니까 엿세 동안에 첫 창조사역이 끝나고 일곱째날 안식으로 첫 창조의 영역이 구획되어 있잖아요 부활은 그 타락한 첫창조의 죽음을 선언하는 거고 새 창조의 첫날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다음날 여덟번째날 일어나는 거에요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예수님의 제자 글로보와 그 아내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안식후 첫날 식사하죠 예수님에 첫 식사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그 식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식사중에 여덟번째 식사라는걸 아십니까 여덟번째 식사에요 안식일로 마무리되는 첫창조 넘어의 식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요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시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 보였어요 거기에서 루가가 굳이 부부의 눈이 밝아 졌다라는 표현을 했어요 그건 지금 논리 정연하기로 유명한 의사 루가가 구약의 어떤 사건이 회복되고 있다라는 것을 고지하기 위해 일부로 채택을 한 표현이에요

창세기에도 눈이 밝아진 비슷한 부부가 나오죠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이 생명나무 實果를 나누고 엉뚱한 식사를 하죠 선악과를 먹어 버려요 그리고 눈이 밝아 집니다 그리고 선악의 판단을 자신들이 하게 되요 그게 죕니다 그게 죽음이에요 그 상태를 하나님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살아있는 상태라 그래요 그런데 부활의 날에 예수님과 함께 여덟번째 식사 즉 부활에 세상에서의 식사 무슨 식사일까요 하늘의 빵 생명의 빵 예수 생명나무 실과, 선악과가 아닌 예수를 먹는 거에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거에요 그랬더니 그들이 세상에 대해 밝아 졌던 눈이 멀고 하느님에 대해 눈이 밝아져 예수를 보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루가복음이 이렇게 연결이 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자꾸 성공할려고 하시면 안되요 저주의 상태에서 계속 성공하는건 더욱더 큰 저주로 들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를 먼저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산 영이 아닌 살려주는 영으로서 소망을 향하여 자꾸 전진해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한번에 500명 앞에 나타났어요 500명이 다 환상을 봐요 환상이라는건 뭔가 기대가 있을때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예수가 부활할거라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500명이 일시에 부활하신 예수를 봤습니다 예수는 살아났어요 히 이즈 리즌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께 첫 열매로 받혀진거처럼 여러분의 부활도 확실해요

예수님은 창세기에 그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데어 이즈 노우 스트럭쳐 스트럭쳐가 없는 혼돈속에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로 하느님 나라에 틀을 세우셨죠 스트럭쳐 틀을 세우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 공허를 채우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곱째날 안식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되죠 물론 모형이에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하느님이 틀을 세웠는데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 틀이 어그러졌어요 예수님이 왜 사흘을 무덤속에 있었을까요 이제는 어그러 질수 없는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틀을 다시 세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사흘을 무덤속에 계시는 거에요 사흘동안 스트럭쳐를 다시 회복하시는 거에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첫창조는 반드시 끝나요 지금 이 첫창조는 이 세상은 무서운 역창조의 진통을 겪고 있어요 그게 바로 성도의 죽음이에요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땅에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야훼 하느님으로 감사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야 되는 거에요 현실에 집착하지 마세요 부활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진짜 감사할 것을 감사하세요 이렇게 가라지가 되어 죽을뻔 했던 우리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추수를 하여 열매로 교회로 모아주신 그 하느님에 은혜에 감사하세요 그 추수를 감사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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