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6일 (화)부활 제3주간 화요일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나눔마당

sub_menu

따뜻한이야기
★ 연옥 이야기 2.

96369 장병찬 [jesus_maria] 스크랩 2019-11-07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연옥 이야기 2. (인생을 되돌아 보자)

  

아래의 연옥 이야기는 알프스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던 한 젊은 여인이 쓴 것인데, 나중에 버나드 도일스 신부(Rev. Bernard Doyls, S.V.D.)께서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연옥은 정화한다


연옥에서 또한 나는 예수님의 고귀한 성혈에 대한 감사를 배웠다. 그 곳에서의 모든 것들이 주님의 성혈에 의하여 적셔지고 생기를 받고 있으며, 큰 혜택들이 그 성혈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참으로 연령들이 이 지극히 고귀한 성혈에 의하여 위로받고 있으며, 그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운 공경을 성혈께 드리고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영혼들은 아무런 결함도 없어야 한다. 만일 결함이 있다면, 하느님께 결함이 있는 것이 되며, 하느님의 행복하심이 완전하지 못함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성소(聖召)를 받아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찬란함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속해 있기 때문에 그분의 지체(肢體)가 된다.

이는 너무나 훌륭한 신비이기 때문에 묘사할 수가 없으며, 단지 묵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왜 연옥이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나는 연옥을 보속의 작업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렇다.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연옥에 두시는 것은 사랑과 자비로 인함이다. 만약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찬란히 빛나는 순결함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면, 이러한 정화를 거친 후에 그들이 누리게 될 행복의 충만함을 그들이 영원토록 지니게 되지도 못할 것이다.

오직 정화를 거친 후에야 그들은 하느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영원토록 더 사랑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오, 연옥에서의 가장 긴 기간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연옥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영혼은 없다. 아무리 불길 속 깊이 파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위로를 받지 못하는 영혼들은 없다. 영원히 행복하기 위하여 고통받는다고 하는 확실성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다. 







연옥 이야기 1. (인생을 되돌아 보자)



  인간이 죄를 완전히 보속하지 못한 채 죽었을 때 영혼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을 연옥에서 씻습니다. 연옥의 영혼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는 인간들은 연옥 영혼들을 위해 미사와 기도, 자선 등 각종 선한 일로써 위로와 보속의 단축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아래의 연옥 이야기는 알프스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던 한 젊은 여인이 쓴 것인데, 나중에 버나드 도일스 신부(Rev. Bernard Doyls, S.V.D.)께서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연옥은 자비와 인자하심의 장소이다.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무한히 인자하시다는 것을 나는 전에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연령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시다. 나는 연옥에서처럼 자비로운 사랑이 흘러넘치게 퍼부어지는 곳을 본 적이 없다. 그 정화하는 불길 속에서 나는 하느님의 좋으심과 자비하심을 보았다.

나에게는 마치 영혼이 하느님께 이런 간청을 드리는 것 같았다: 
"제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보속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신다: 
"그래, 너는 이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수련 기간에 들어가게 된다. 너는 이제 고통을 받으며 너의 모든 죄들을 보속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순결하게 될 것이며, 나의 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

오, 얼마나 큰 감사로써 영혼이 연옥을 받아들이는지! 영혼은 자신을 이 정화의 장소로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인하여 기뻐 용약한다. 영혼은 연옥을 얻어내신 예수님의 고귀하신 성혈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는지! 참으로, 그곳은 멸망으로 떨어질 번 했던 영혼들이 모여있는 구속(救贖)의 장소이며, 피신의 장소이며,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마련해 주신 장소이다.

연옥은 또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장소이다. 그 곳에서 영혼들은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며, 선하시며, 위대하신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지상에서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내쳤었는지를, 그리고 그리함으로써 얼마나 그들의 구세주를 슬프게 해드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 중에 얼마나 큰 혜택들이 그들에게 베풀어졌던가를 깨닫게 되며, 그들이 헛되이 지나쳐버린 수많은 은총들과 공로의 기회들을 알게 되며, 그들이 지상에서 예수님을 사랑해드림에 있어서 너무나 인색함으로 인하여 그분께 얼마나 심한 고통을 드렸는가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좋으심이 모두 그들에게 밝혀지며, 그들은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대하여 어떤 불의로써 갚아드렸는가를 알게 된다. 그곳에는 영혼을 태워서 정화하는 불이 있으며, 표현할 수 없이 큰 고통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들은 주님의 지극히 고귀하신 성혈의 공로와 일치되어 있으며, 이것이 죄를 보속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연령들은 하느님의 좋으심과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다. 지상에서의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들이 연옥에서 받는 고통도 더 클 것이다. 영원 속에 들어간 영혼들은 더 이상 지상에서처럼 완고하지 않다. 하느님의 좋으심과,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하느님의 높으심으로부터의 빛으로 인하여 그들은 유연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령들에 대하여 심하시거나 혹독하지 않으시다.

반대로, 그분께서는 좋으시며, 연령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계신다. 그리고,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은 하느님께서 지극히 좋으심을 확실히 깨닫는다. 나는 연옥 전체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것 같다: 
"오, 얼마나 좋으신가!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신가! 우리가 그분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틀림없이 그분을 더 사랑해드리려고 했을 텐데!"

하느님의 사랑과 자신들의 완고함 사이의 엄청난 대조에 대한 깨달음은 영혼에게 깊은 영향을 주며, 지극히 큰 고통이 된다. 나는 이 고통을 내 마음 속에서 경험하였는데, 그 고통스러움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복된 고통이다! 그것은 절망이 동반되지 않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연령들은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며,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그 곳에서 그들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잊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 행한 가장 미소한 선행까지도 영원히 보답해 주신다. 그 사랑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여 연령들은 오직 통회를 함으로써 이를 견디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통회의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동시에 행복하다. 그들은 모든 걱정과 불확실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들은 그들이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환시


주님께서는 2000년 4월 30일 성인에 오르신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해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환시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통해 부활절 후 첫 주일을 자비의 축일로 공경받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현재 교회는 부활절 후 첫 주일을 자비의 축일로 지내고 있다.



[천국의 환시]

파우스티나 수녀는 전에 연옥과 지옥을 본 일이 있었다. 11월 27일 몸이 약해 누워있을 때, 다음과 같이 천국에 대한 환시를 기록하였다.

오늘 나는 정신적으로 천국에 가 있었다. 나는 사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천국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았다. 모든 피조물들이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았다. 이 행복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파되어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이 행복에서 나오는 영광과 찬미는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께 되돌아간다. 그들은 끝없는 하느님,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명상한다.

이 행복의 원천은 그 본질상 불변의 것이나, 항상 신선하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행복을 쏟아 붓는다...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눈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조그마한 행위라 하더라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충실히 사랑하는 영혼에게 내리시는 은혜는 측량할 수 없다.

하느님의 엄청난 엄위로우심을 보고도 나는 전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이 자기들이 받은 은총과 계급에 따라 하느님을 숭배한다는 사실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영혼은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 찼다. 하느님의 위대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기쁨도 더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즐거웠다. 내가 작음을 보고 기뻤다. 왜냐하면 내가 작아야 하느님께서 나를 품안으로 데려가 성심에 보다 가까이 안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 하느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을 감싸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정(父情)어린 가슴에 껴안으시게 하기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될까요?



[연옥의 환시]

"나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수호천사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고통받는 영혼들의 큰 군중이 있는 불과 연기가 가득찬 장소에 있었다.
그들은 열렬히 기도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며 오직 우리가 그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들을 태우고 있는 불꽃이 나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다. 나의 수호천사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영혼들에게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는 연옥에 있는 영혼을 방문하는 성모님을 보았다.
그 영혼들은 성모님을 '바다의 별' 이라고 불렀다. 성모님께서는 그들에게 원기회복을 가져다 주신다. 나는 그들과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나의 수호천사는 떠나자고 나에게 손짓하였다. 우리는 그 고통의 감옥을 벗어났다.
[나는 내적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자비는 이것을 원하지 않지만 내 정의가 그것을 요구한다." (일기 20)



[지옥의 환시]

이 피정에서 파우스티나 수녀는 신비적 일치의 경험을 가졌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지옥을 보았다.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 어느 한 순간에, 긴 세월 동안 묵상과 명상을 통해 얻은 것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파우스티나는 예수의 명령으로 지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늘 한 천사의 안내를 받아 지옥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심한 고문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였다. 얼마나 무섭도록 광활하고 넓은지! 나는 온갖
종류의 고문을 보았다.
지옥을 이루는 첫째 고문은 하느님의 상실이다.
둘째는 영원한 양심의 가책, 
셋째는 조건의 불변이다. 
넷째는 영혼을 파괴시키지는 않은 채 파고드는 불길인데, 하느님의 분노에서 나오는 영신적 불로서 무서운 고통이다.
다섯째 고문은 연속적인 암흑과 질식할 듯한 무서운 냄새, 더구나 이 암흑 가운데서 악마와 저주받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고문은 사탄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시달림,
일곱째 고문은 무서운 절망감, 하느님의 증오, 천한 말, 저주와 모독이 난무하는 현장이다.

이러한 것들이 지옥의 영혼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고문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각 영혼마다 특별한 고통이 있다. 예를 들면 감각의 고통이 있다. 
각 영혼은 각자 지은 죄의 양상에 따라 무섭고도 형언할 수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각자가 겪는 고통이 다른 동굴과 구덩이들이 있다.
만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광경을 보고 까무라쳤을것이다. 죄인들은 자기가 지은 죄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도 지옥이 어디 있느냐, 본 사람이라도 있느냐, 지옥이 어떻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을 못하도록 하느님의 명에 의해 이것을 기록한다.

나 파우스티나 수녀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지옥의 실체를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지옥의 심연을 방문하였다. 나는 여기에 대한 기록을 남기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 악마들은 나를 증오했으나 하느님의 명령으로 나에게 순종하였다. 나의 기록은 내가 본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옥에 있는 영혼들은 대부분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옥에 갔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따라서 나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 나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기도한다. 

오 예수님,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어떠한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연옥 영혼도 우리의 이웃



어렸을 때 부잣집 친구 생일잔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창피해서 계속 다른 발로 그 발을 밟고 있었습니다. 좋은 음식과 놀이들은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만약 그 집 어딘가에 공간이 있어 양말을 기워 신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잠깐 잔치에서 빠져있더라도 그 곳에서 양말을 고쳐 신고 다시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성인들만 있는 곳인데 혼자만 어린 아기라면 본인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연옥은 벌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들어갔을 때 충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이기에 은총의 공간인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의인들이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즉, 완전히 자신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흠도 티도 하느님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온전히 깨끗해져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죽음을 맞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씻는 연옥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은총입니다. 연옥이 없다면 누구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베오 12,41-45)


우리가 고해성사로 죄가 용서받지만 우리 양심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도 무언가 보속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죄의 보속도 하나도 하지 않고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갔다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물병을 깨서 엄마가 힘들게 바닥을 닦고 있다면 아이도 무언가 도와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자기도 책임을 지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연옥이란 바로, 사제의 보속을 하는 것처럼, 우선은 나의 양심의 평화를 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자비입니다.


그러나 그 곳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왜 죽은 뒤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냐면 죽은 이후에는 ‘믿음’의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선 믿음의 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단련하지만 죽은 뒤엔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에 그 고통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로마엔 연옥 영혼들에게 봉헌 된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연옥 영혼에 관한 많은 기적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재가 나서 새겨진 연옥에 있는 한 사제의 얼굴, 옷과 책상, 책 등에 손 모양으로 타 들어간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을 지으신 분은 독일 신부님입니다. 그분이 한 노인 신부님과 본당에서 함께 살았는데, 노인 신부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뒤 꿈에 나타나 왜 당신을 위해 미사를 드리지 않느냐고 하며 미사를 계속 드려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신부님은 자신의 손에 꿈에서 미사예물로 받은 돈이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지폐는 당시에 사용되지 않던 수십 년 전 오래된 화폐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로마에 와서 연옥영혼을 위해 성당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로마에 유일하게 고딕양식의 성당이 하나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공로는 믿음의 공로까지 합쳐지기 때문에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면 그들은 수백 배의 공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이 세상에서 기도해주는 이들을 위해 주님 옆에서 얼마나 많이 청원해 주겠습니까?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 좋은 친구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사가 가장 큰 기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식사 후 기도만 잘 해도 그들에게 수많은 위로를 줄 것이고 우리도 그 사랑의 보답을 크게 입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연옥영혼보다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먼저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우리의 기도가 올라가야 할 곳은 연옥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조상 중에, 혹은 잊혀진 영혼이 연옥에서 그렇게 호된 보속을 치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웃사랑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전 요셉 신부) 






연옥은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세례 받을 때나 고해성사 받을 때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진 상태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바로 천당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내려놓은 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지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교만이나 성욕, 욕심 등을 완전히 버리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음탕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만 보아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 하십니다.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보이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음탕한 마음이 곧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가는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때 조류독감이나 신종플루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이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합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하늘나라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작은 결점조차도 지니고 있으면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렇게 완전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느님 나라이기에 연옥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개신교가 말하듯이 믿음이 있으면 천국, 없으면 바로 지옥이라 한다면 부족한 우리 모두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더러 명령하여 뽑혀져 바다에 심기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누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서 산과 사물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런 부족함을 지닌 인간들이 우리 모습이기에 연옥이란 곳은 오히려 과거의 모든 양심의 가책과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한 모든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곳이기에 벌 받는 곳이 아니라 은총의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용서받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또 구약의 마카베오는 작은 우상을 지니고 다니다 전사한 병사들의 죄사함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41-45)

진정으로 내세에서 죄를 용서받고 완전히 깨끗해지는 연옥의 단계가 없다면 천국에 바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로마에 있는 연옥성당에는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잠시 나타나 자신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며 남겨놓고 간 흔적들이 모아져있습니다. 불에 탄 손자국 모양의 탁자나 옷, 성경 책 등이 인상적입니다.

성인들은 연옥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면 왜 우리는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연옥에 가서 보속하는 것이 더 혹독할까요? 연옥에서 바칠 수 ‘없는’ 공로가 있기 때문인데, 바로 ‘믿음’의 공로입니다. 연옥에선 멀리서나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그 바치는 보속에 믿음의 공로가 없기에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고통으로 정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저희 교구 신부님들이 묻혀계신 교구성직자 묘지를 방문해 기도하고 왔습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쯤이 나중에 내가 묻힐 자리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묻혀계신 모든 신부님들이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슬퍼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드리는 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들은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했던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들과의 통공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런 말을 하십니다.

“눈물을 줄이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운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떠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결국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와의 일치를 이룸을 의미하며 나 자신도 연옥벌을 면하기 위해 더 열심한 정화의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위령성월이란 귀중한 시간을 배정한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가톨릭출판사에서 발간한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에서 발췌한 글로써 한 연옥영혼이 사제에게 한 것입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관한 교리는 아는 것만으로 넉넉하지 않다. 마땅히 생활로 옮겨야 한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려 온 연옥 영혼들이오. 그대를 위해서나 우리를 위해서나 틀림없이 유익한 만남일 터이니 말이오. 현세 생활을 하고 있거나 우리처럼 현세를 떠나 있거나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사랑은 항상 유익하고 풍성한 결실을 내기 마련이오.

성인들의 통공에 관한 교리는 이를 믿고 생활화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성덕의 열매를 맺소.
옷타비오 형제여, 우리는 물론 지금 다루고 있는 이 교리의 숭고하고 기묘한 실재를 믿고 생활로 옮기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지만, 아직 지상에서 순례 중인 그대들은 영혼의 능력을, 특히 지능을 발휘해서 이 교리를 알고 생활로 옮기는 이들에게 생기는 결과를 알려고 힘써야 하오.

옷타비오 형제여, 성인들의 통공 교리가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려면 확고하게 믿어야 하고, 그것도 아무 가림이나 제한 없이 믿어야 하오. 이 교리가 또 요구하는 것은 애덕의 실천이오. 꾸며낸 가공적 사랑이 아니라 참되고 실제적인 사랑, 행동이 따르는 사랑 말이오.


[찾아내어 활용해야 할 보물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옷타비오 형제여, 피상적인 믿음과 바람과 사랑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고 성취하지 못하는 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오!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놀라운 선물이건만, 미지근함과 경솔함으로 아주 흔히 허비되곤 하는 것이오.

그대들은 우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행의 가능성이 거의 무진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자연적인 차원에서 은총의 초자연적인 차원으로 들어올리면서 거기에 "연옥의 거룩한 영혼들을 위하여"라는 지향을 붙이면 되니 말이오. 더욱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거나 미사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성격의 일을 할 때면 바로 위의 지향만 붙이면 되는 것이오.


[출발 신호를 해야 하는 쪽은 지상에 있는 그대들이다]

형제여, 알다시피 우리 쪽에서는 즉각 응답하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면에 그대들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소. 그러나 성인들의 통공 교리가 효험이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신앙과 시련 속에서 살고 있는 그대들이 이를테면 출발 신호를 해야 하는 것이오.

옷타비오 신부여, 그대들에게는 물질적인 필요와 욕구, 특히 영적인 필요와 욕구가 대단히 많은 것은 사실이오. 그런데 연옥 영혼들인 우리 역시 그대들의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어째서 고려에 넣지 않는 것이오?

"연옥" 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대가 안다면!
우리보다는 우리의 썩은 유해를 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안다면!
옷타비오 신부여,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겠소? 
우리 사이의 통공을 크게 활성화시키면, 유익한 결과를 풍성히 얻으면서 하느님의 강복도 많이 받게 될 것이오!
(1976년 6월 9일)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 가톨릭 출판사)





 


미사와 연옥 영혼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미사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제대 상에서 바쳐지는 미사는 가장 강력한 중재(仲裁)의 기도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기도와, 보속과, 선행보다 우월하다.  우리가 미사의 희생 제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바치신 희생과 같으며, 예수님께서 무한한 속죄의 가치를 지닌 바로 그 제사를 지금 제대 상에서 바치신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어째서 미사가 그처럼 강력한 기도가 됨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죄를 보속하는"(1요한 2,2) 희생 제물이시며, 그분의 신성한 피는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쏟아져나왔다" (마테오 26,28).  미사와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희생 제사의 구원하는 열매들은 무제한 숫자의 영혼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모든 빚이 갚아져야 한다!"

로마 근교의 성 바오로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있던 성 벨라도는 천국에 이르는 끝없는 계단을 보았다.  그 계단 위로는 수많은 천사들이 전 세계의 사제들이 바치는 희생 제사, 즉 예수님의 희생에 의하여 연옥으로부터 해방된 영혼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느라고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친적 중에 누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꽃을 진열하고, 장례식 때 입을 옷을 준비하고, 장례 행렬을 준비하는 것보다 미사를 바쳐드리는 데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

성 요한 보스꼬는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는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을 도와줍니다.  사실 미사는 그 영혼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들이 고통받는 기간을 단축시켜주며, 그들을 빨리 복된 왕국으로 데려다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비오 신부께 연옥에서 풀려나도록 미사를 바쳐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연옥의 영혼들이 발현했던 적이 많았다.  하루는 신부께서 동료 수사의 아버지를 위한 미사를 바쳤는데, 미사가 끝난 후에 비오 신부는 그 수사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그대 아버님의 영혼은 천국으로 들어가셨다."
그 수사는 매우 기뻤으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신부님, 저의 착하신 아버님께서는 32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비오 신부는 대답했다. 
"나의 아들아,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빚이 갚아져야 한다!"
그리고 미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치의 보물을 얻어준다. 즉, 티없는 어린 양(묵시록 5,12)이신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다.


"미사만이 필요합니다!"

기억하자.  즉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모든 기도와 선행이 좋고 훌륭하지만, 우리에게 가까운 이들의 떠나간 영혼들을 위하여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미사들을 바쳐드리도록 하자.

수소(Suso)의 복자 헨리의 생애에서 우리는 그분이 젊었을 때 동료 수사와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즉, "우리 중에 누가 더 오래 살든지, 먼저 떠난 사람이 빨리 영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매주 한 번씩의 미사 성제를 바쳐드리기로 하자."  그리고 복자 헨리의 친구가 선교지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복자 헨리는 그 약속을 잠시 동안 기억했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바쳐야 할 미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를 위해서는 미사 대신 다른 기도들과 보속을 바쳤다.  그런데 친구의 영혼이 발현하였는데, 매우 괴로운 모습이었으며 친구를 책망하였다. 
"그대의 기도들과 보속들은 충분하지 않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혈이다."  참으로 우리의 죄의 빚은 예수님의 성혈로 갚게 되는 것이다 (콜로새 1,14).

아빌라의 성 요한의 임종 때에 그의 동료 수사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고 물었다.  성인은 재빨리 대답하였다.  
"미사들. . . 미사들. . . 미사들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없습니다!"

또한, 성 예로니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매번의 미사가 경건히 바쳐질 때마다, 많은 영혼들이 연옥을 떠나서 천국으로 날아갑니다."

빠찌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성혈을 봉헌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의 탈혼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보혈이 바쳐짐에 의하여 많은 연옥 영혼들이 풀려나는 것을 보여주셨다.

성녀 벨라데따 역시 연옥 영혼들을 매우 측은히 여기면서 동료 수녀들에게 자주 말했다.
"저는 방금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 뿐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방울의 성혈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며 온 세상을 그 죄로부터 구할 수 있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연옥 영혼들을 도와주며 그들이 고통에서 풀려나도록 많은 미사들에 참례하고 또 많은 미사들을 바쳐드리도록 하자.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는 "모든 선행들을 한데 모아도 한 번의 미사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선행들은 사람들의 행위이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발췌)






위령성월(11) 

 

교회는 오곡백과를 추수하는 11월에 하느님께서 연옥의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빨리 당신 나라에 데려가 주시기를 간구한다.

오늘은 나의 것내일은 너의 것(Hodie mihi, Cras tibi)”.

이 말은 무덤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이다.

너도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터이니 너무 잘난 체하지 말고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잘 살아라는 뜻일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의 의미

 

모든 성인의 통공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가능해진다우리순례교회(巡禮敎會)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죽은 이들 정화교회(淨化敎會)와 천국의 성인들 승리교회(勝利敎會)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서로 도움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즉 세 교회는 거룩한 것들을 공유하고 부족함을 서로 채우면서 친교를 이루고 있다(교리서 948 참고).

 

이러한 통공 때문에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고 속죄함으로써 그들이 죄벌을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이것은 구약시대부터 있던 일이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6).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사면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형벌을 마치고 출옥의 날만 기다리듯육체를 벗어난 연옥영혼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못하고다만 연옥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연옥영혼들을 대신하는 우리의 기도와 속죄 행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 주신다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하는 것은 그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과 같다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범죄하였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아직 지상에 있는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함은 당연한 일이다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진 그들의 빚을 대신 갚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할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사도 요한의 말대로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1요한 1,8 참고),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우리도 연옥에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우리가 연옥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 줄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즐겨하시기 때문에서로 공()을 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어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기도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교회는 11월 1일에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다음날 11월 2일에 위령의 날을 지낸다이날 모든 사제에게 미사 3(모든 연옥영혼을 위하여교황의 지향에 따라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지향에 따라)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날마다 한 번씩 연령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全大赦)를 받을 수 있다위령의 날이나 교구장이 허락한 그 전 주일이나 다음 주일에 성당을 참배하고 기도함으로써 연령들을 위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 외에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해야 한다한 번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여러 번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나한 번 영성체하고 한 번 교황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는 한 번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전대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와 성인 성녀들의 많은 공로에 힘입어교회가 어떤 기회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어떤 조건하에서 죄벌(죄에 따르는 벌)을 용서받게 하는 것이다죄벌을 모두 사해 주는 것이면 전대사라 하고 일부만 사해 주는 것은 한대사(限大赦)라 한다.

 

교회는 이렇게 죽은 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우리는 교회의 뜻에 따라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 살아 계실 때 좀더 잘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못다한 효성이나 우정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해야 한다기일 뿐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고특별히 위령의 달(11)에 열심히 기도함이 좋다.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함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사이다미사를 봉헌하거나 평일미사에 되도록 자주 참례하여 기도함이 좋다. 

 

(생활교리/ TGCATHOLIC)


*~*~*~*~*~*~*~*~*~*~*~*~*~*~*~*~*~*~*~*~*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067 1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