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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19년 11월 21일 (목)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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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산 이들의 하느님 (루카 20,27-38)

133747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19-11-10



 2019년 11월 10일 주일

[연중 제32주일] 산 이들의 하느님 (루카 20,27-38)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지만, 다들 거부하고 죽는다. (2마카7,1-2.9-14)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하여 무엇을 알아내려 하시오? 우리는 조상들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9 둘째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하였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10 그 다음에는 셋째가 조롱을 당하였다. 그는 혀를 내밀라는 말을 듣자 바로 혀를 내밀고 손까지 용감하게 내뻗으며,
11 고결하게 말하였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12 그러자 임금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자들까지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 젊은이의 기개에 놀랐다.
13 셋째가 죽은 다음에 그들은 넷째도 같은 식으로 괴롭히며 고문하였다.
14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화답송 시편 17(16),1.4ㄷ과 5-6.8과 15(◎ 15ㄴ 참조)
◎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 계명의 길 꿋꿋이 걷고, 당신의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
○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힘을 북돋우시고 악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 (2테살 2,16─3,5)
형제 여러분,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3,1 끝으로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2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지시하는 것들을 여러분이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고 믿습니다.
5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신다. (루카 20,27-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연중 제32주일 제2독서 (2테살2,16-3,5)

 

"끝으로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로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3,1-2)

 

테살로니카 후서 2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  불법의 사람의 출현과 종말의 심판에 대해 교훈했다.

 

이제 테살로니카 후서 3장 1-15절에서는 올바른 재림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일상 생활에서의 합당한 삶의 태도를 교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테살로니카 후서 3장 1,2절은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 수행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오로는 중재(중보) 기도를 부탁하면서 테살로니카 교인들을 '형제 여러분' 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이러한 호칭은 사도 바오로와 테살로니카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로서의 동질성을 지니며, 한 지체임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테살로니카 전, 후서에서 이 호칭이 무려 20회나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중재(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부분에서 이 호칭을 썼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즉 여기서 '아델포이'(adelphoi)라는 호칭은 테살로니카 성도들이 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이므로(1코린12,12.27) 서로의 영적 필요를 위해 기도해 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다.

 

'기도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프로슈케스테'(proseuchesthe)'하느님께 기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 현재 시제 명령형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를 썼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자신들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선교 활동을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 중재(중보) 기도를 요청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친히 복음으로 가르친 자들에게 중재(중보) 기도를 요청한다는 것결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사목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겸손한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들이 중재(중보) 기도없이 주님의 사업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과대 망상이며, 또한 공동체의 연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비교회주의적 발상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지체인 각 구성원들이 중재(중보) 기도의 끈으로 묶이기를 원하신다(요한17,6-26; 사도12,5; 야고보5,14).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중재(중보) 기도의 제목은 '복음 전파'와 '사도 바오로와 동력자들' 에 관한 것이다.

 

한편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라는 표현은 말씀이 마치 힘차게 내달려 우승함으로써 상을 받는 것과 같은 영상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빠르게 퍼져 나가'로 번역된 '트레케'(treche) '급히 달려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트레코'(trecho)의 가정법 현재 능동태로서 말씀이 급속히 퍼져 나가는 것, 또는 말씀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테살로니카에서 급속히 퍼져나가고, 듣는 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여 신앙을 갖는 자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복음이 신속하고도 역동적으로 전파되어 많은 결실을 맺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또한 '찬양을 받고'에 해당하는 '독사제타이'(doxazetai)'독사조'(doxazo)가정법 현재 수동태로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의 힘에 압도되어 변화를 받아 그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말씀의 능력에 대한 찬양은 곧 말씀의 선포자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찬양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중재(중보) 기도의 두번째 내용으로서 이것은 사도 바오로 자신과 그 동료들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뤼스토멘'(rysthomen)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뤼오마이'(ryomai)의 가정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여기서 수동태 구출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사도 바오로는 시편 50장 15절"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는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그 동력자들을 위협한 존재들을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고약하고'로 번역된 '아토폰'(atopon)의 원형 '아토포스'(atopos)'자리'(place)를 뜻하는 명사 '토포스'(topos)부정 접두사 '아'(a)가 접두된 형태로서 문자적으로 '제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벗어난'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적합하지 않은', '어울리지 않은', '온당치 못한'더 나아가 '옳지 않은', '해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 외에 신약에서 3회 더 사용되었는데, '신체적 이상'(사도28,6),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루카23,41; 사도25,5)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자들은 폭도들을 선동해서 복음 전파를 방해했던 유다인들(사도17,5)과 같이 비이성적인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선교사들을 가로막는 행위라면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강행하는 자들이다.

 

특히 사도 바오로가 본 서간을 코린토에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코린토에서 사도 바오로의 복음 전파를 대적하고 훼방한 유다인들(사도18,5.6)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넓게는 그들과 같이 행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악한'으로 번역된 '포네론'(poneron)의 원형 '포네로스'(poneros)악의 속성을 나타내는 형용사로서 주로 다른 것에 고통과 해악을 일으키고 악에 물들게 하는 속성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마귀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사도 바오로는 마귀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문장 형태상 이 구절은 이유 부사절로서 본절 상반절에 대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이 왜 복음 선포자들을 적대하고 훼방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없고, 또한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은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음 선포자들에게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초연한 부활 신앙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신앙은 기원 전 164년 경에 기술된 다니엘서(12,2-3)를 비롯해 이사야서(26,19), 지혜서(7,1-6), 그리고 마카베오서 등에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두고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했으나(사도 23,8) 현세 사정이 부활한 뒤에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주로 고위 사제가문 출신들로 구성된 사두가이들은 성경으로 인정한 모세오경에 없다고 생각되는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와 영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해석에서는 보수적이었고, 정치적으로 부패한 유다 당국자들과 로마의 권력과 손을 잡고 실리를 챙겼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수혼법(신명 25,5-10)을 들어 부활세계는 지상 삶의 연장일 뿐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을 비웃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시며(20,38), 부활의 삶이란 현세 삶의 연장이 아니며 하느님의 권능으로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임을 가르치십니다(20,35). 바오로 사도도 그런 부활관을 지녔습니다(1코린 15,42-44).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생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세상을 살아가며 형성되는 인간관계와 사랑, 삶의 수고와 고통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지나가버릴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영원한 생명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은 물질과 감각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세의 삶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부활 때문에 선사받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단절이나 절망과 허무의 골짜기가 아니라 영원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카베오의 형제들은 의로운 이의 부활을 믿고 순교했으며,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죽음을 자매(태양의 찬가 27절)라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는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그런 희망을 지닐 때 세상살이에서 겪는 온갖 역경과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굳건한 부활신앙으로 지상에서의 삶이 생명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려 현실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세 재화나 명예, 다양한 인간관계 등 세상살이에서 주어지고 만나게 되는 그 어떤 것도 전부가 아님을 알고 그 무엇에도 매이거나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과 허수아비 언론, 자본가들의 횡포에 하느님의 힘으로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오늘 생명과 죽음이 얼굴을 마주보며 또 다른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자연의 변화를 보며,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하며 지금 이 순간에 생명과 죽음 전부를 담아내도록 혼신을 다 하고, 희로애락이 산책하는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은 끝이 없고, 하느님 안에서는 삶도 죽음도 궁극적인 의미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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