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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0년 10월 30일 (금)연중 제30주간 금요일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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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9.13.“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140728 송문숙 [moon6388] 스크랩 2020-09-13

마태 18, 21-35(연중 24 주일)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 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 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루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 줄뿐만 아니라, 빛을 탕감해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결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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