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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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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3,11-21)

126570 김종업 [rlawhddjq] 2019-01-05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3,11-21)

 

 

 

 

요한 1서의 둘째 부분(3,11-5,12)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저자는 카인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을 저지른 카인과는 달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도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 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은 무엇인가?

속죄제, 번제등 희생물을 잡아서 규칙대로 드리는 제사는 모세 시대 이후에 율법을 통해 들어왔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는 모세 이전의 시대이다. 그때에는 제사에 대한  규례가 없었다.

다만 자연 계시와 아담과 하와를 통한 감사의 제사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사는 수확의 한 절기, 혹은 목축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드려야 하고, 반드시 감사의 제사여야 옳다. 창세기 4장 4절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곡물이든, 동물의 희생물이든, 제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 태도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 뜨렸다."(창세4,4)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카인과 아벨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이 드린 양 떼 가운데 '맏배들'이 무엇인가?  '첫 새끼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맏배(첫 새끼)'는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맏배(첫 새끼)'는 만물이 하느님의 것임을 압축해서 나타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맏배를 드렸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한 아벨의 고백과 행위, 그리고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척도이다.

아벨은 양이 새끼를 낳을 때마다 생명의 탄생을 무한히 경이로워하고 감사하면서, 생명의 주권(절대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려고 미리 구별(성별)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이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표본은 맏배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굳기름'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최상품,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벨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과 믿음의 고백을,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장 중심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증거이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에 데리고 가서 살인을 한다(창세4.8).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여 형제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그전에 먼저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있다. 믿음과 정성에 있어서, 하느님 마음에 들었던 아벨의 '양떼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받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 진리와 절대선에서 나오는 무한히 완전한 자유요, 그르침이 없는 자유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이러한 자유와 선택에 간섭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카인의 죄이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수직적으로 깨어진 사람은 수평적으로 부모와 형제, 형제와 형제,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진다는 진리를 창세기에서 야휘스트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으로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으면, 먼저 수직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약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요한 1서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결국 카인과 예수님이 비교될 수 있는 차원도 아니지만, 카인에 의해 죽은 아벨의 모습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성부)께 충성과 순명을 하시면서 인류(우리 죄인들)를 위해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이 미리 예표되고 암시됨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요 목적이신 하느님, 우리 영혼, 육신 생명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피로써 구속한 인간들을(한 부모 아래 같은 형제, 자매요 같은 자녀들)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14)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5)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6)

"누군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8)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수직적인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수평적인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17-1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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