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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19년 10월 24일 (목)연중 제29주간 목요일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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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박기석 신부 / 제9회 마르 1,29-45 (평화방송 강의)

128811 이정임 [rmskfk] 스크랩 2019-04-06

박기석 신부 / 제9회 마르 1,29-45 

 



 

지난 시간에는 갈릴래아 나자렛으로부터 오시어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던 예수님을 마르코 복음서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래아로 가셔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살펴 보았습니다.

 

* 마르코 복음 (1,16) 전형적인 새로운 단락이 시작 

 

오늘은 마르코 복음 1,16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16절은 전형적인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주인공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등장 인물인 시몬과 안드레아가 소개되고 있고, 공간적인 배경도 갈릴래아 호숫가라고 하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작업을 위해서 복음 선포를 위한 협조자들,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우선 네 명의 제자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장차 이제 열두 명으로 이루어지는 제자단의 구성원으로써 또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됩니다. 

 

물론 여기서 열둘이라고 하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야곱의 열두 아들이 대표적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그 숫자를 상징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분파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에세네, 열혈당원들 그런 기존 분파들과 또 다른 분파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하느님의 백성 열두 지파 곧, 열두 제자로써 그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 '제자들을 부르는 두 개의 짧은 이야기' 마르 1,16-18.19-20

 

그런데 마르코는 여기에 독자들을 위한 어떠한 배려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두 개의 짧은 이야기를 16-18절, 19-20절을 나란히 같은 구조 안에서 우리에게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두 이야기를 동일한 틀에서 전개를 하는데,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의 한 대목을 살펴봐야 합니다. 1열왕 19,19-21인데, 이 단락은 바로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는 장면으로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가 바로 엘리사인데 엘리야가 엘리사를 예언자로  뽑는 장면하고 매우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을 기억하시면서 이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을 보시면 됩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주도권과 또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의 순종을 돋보이게 하는 그런 마르코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시는 소명과 또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추종의 골자만 간추려서 간략하게 핵심만 전해주는 마르코입니다. 

 

* 마르코 복음서 :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신 소명, 예수님을 따라나선 추종의 골자만 간추림

 

그러면서도 마르코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이 장면을 상황 묘사, 부르심, 응답이라고 하는 이런 문학 구조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보십니다. 이때 그들은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곧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첫 제자의 부르심 사건은 일상의 자리, 삶의 현장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시몬과 안드레아 /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 

  상황 묘사(16절, 19절), 부르심(17절과 20절 전반부), 응답 (18절과 20절 전반부) 

* 제자들의 부르심 사건 : 일상의 자리, 삶의 현장

* 부르심의 핵심 내용 : "초대"

 

이렇게 상황 묘사를 마친 다음 마르코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해서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르심의 핵심 내용은 초대입니다. 예수님 당신에게로의 초대, 예수님 당신과의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을 당신과 친교를 맺는 친교 공동체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호수에서 생계를 위해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응답 부분이 전개됩니다. 특히 여기서 마르코가 좋아하는 표현인 '곧바로, 즉시'라고 하는 표현을 씁니다. 제자들이 곧바로 응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버리다, 뒤따르다'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버림은 뒤따름의 조건이 되는 것이고, 뒤따름은 버림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뒤따르다인데 마르코 복음서 처음에 제기되는 여러 몇몇 요소들을 기억하셔야 16장까지 가는 데서 이해가 쉬워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곧바로'라고 하는 시간 부사도 있지만 '뒤따르다'는 표현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서에서 '뒤따르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짧지만 두 번째 장면도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의 상황 묘사도 시몬과 안드레아의 것과 같습니다. 형제라는 가족 관계, 또 생계를 위해 호수에 그물을 던지듯 생계를 위해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앞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먼저 부르십니다. 다만 약간이 차이가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직접 시몬과 안드레아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두 번째 장면에서는 그냥 "부르셨다." 하는 것으로 마르코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응답 부분에 있어서도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이 모두 '버림'과 '뒤따름'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지만 차이가 있는데 앞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렸고, 지금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아버지 제베대오를 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명과 추종의 핵심만을 서술하는 마르코입니다. 빠른 전개와 간략함이 마르코의 특징인데 여기서도 그 특징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단호하고 분명하게 보여지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응답, 버림과 뒤따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상적인 제자 모습을 그리는 마르코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안에서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즉시 제자들의 버림, 뒤따름, 응답을 불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응답은 예수님 없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과 관계 있는 삶, 그분과 공동체로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네 어부처럼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첫 복음 선포 이후 처음 하신 일 : 네 제자를 부르심

 

마르코는 갈릴래아에서 첫 복음 선포 이후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투신할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오직 그것을 위해서 일할 사람들을 예수님이 필요로 하셨고, 제자들의 사명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즉각, 즉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응답하여 모인 제자들의 모습 안에서 이렇게 우선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때가 차서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삶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가족을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좀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 "버리다"의 의미 :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복음 전도를 위한 예수님 말씀의 그물을 사용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새로운 가족 관계 안에서 삶을 이어가려는 의미

 

 

그물을 버린 제자들이지만 생계를 위해 버린 그물 대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복음 전도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그물을 이용해서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의 의미로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3,31-35절을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참된 가족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성모님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는데 예수님이 문전박대를 하시는 장면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어머니를 버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고백이 바로 성모님이 가장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셨고 따르셨던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어머니이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첫 번째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결코 가족을 버렸다. 이런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라나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신 그 회개와 복음의 초대에 즉각적으로 응답했던 이들이라는 것, 이 점을 우리가 여기서 보았으면 합니다. 


* 제자들의 즉각적인 행동 : "회개하고 믿음"의 참 모습 


그리고 이제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장면이 다시 바뀝니다. 새롭게 찾아가는 곳은 카파르나움이라고 하는 동네인데 마르코는 1,21-34절에서 예수님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시는 예수님의 일상, 하루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단락을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 카파르나움의 하루 중 우리가 1,21-2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일으키신 치유 기적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에 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기적 이야기라는 것을 좀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 마르코복음서에서 치유 기적 : 마르코 복음서의 첫 기적 이야기



카파르나움은 대략 600-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던 갈릴래아 호수 북서 연안의 농촌과 어촌이 같이 형성된 큰 도시였습니다. 1,29절을 본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던 첫 번째 제자들인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두 번째로 부르심을 받았던 야고보와 요한, 그의 아버지 제베대오까지 그들 모두가 이곳 카파르나움에 살았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수난,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의 출발지가 됩니다. 


오늘 1장에서 처음 예수님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시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9장에 가서는 예루살렘 활동기 그 중간에 상경기가 9ㅡ10장에 걸치는 내용인데, 8장서부터도 확대해서 볼 수도 있겠습니만 아무튼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시점이 바로 이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전반부 대부분의 예수님의 활동 무대를 갈릴래아 안에서도 카파르나움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 카파르나움 : 예수님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특별한 거점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코가 회당에서 예수님이 뭘 가르치셨는지를 얘기를 안 한다는 점입니다. 같은 장면의 루카와 마태오는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를 전해줍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모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도래를 선포하시는 1,14-15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마르코가 특별히 언급은 안 했지만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1,15절의 말씀을 하셨겠구나 하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가 불친절하지만 앞서 이갸기 한 것을 토대로 우리는 가정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단 마르코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우리가 시선을 집중해야 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을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랐다. 그래서 놀라워하는 반응 '놀랍다'라고 하거든요. 회당에서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나 분위기가 새로운 계시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서 그대로 전수하는 차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본문과 전통의 권위만을 내세울 따름이었습니다. 


*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 : 성경 본문과 전통 권위만 내세움


따라서 율법 학자들의 권위 역시 그들에게 전수된 전통 안에서 주어졌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달랐습니다. 전통에 기댄 것도 아니고 바로 예수님 당신 안에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권위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도록 그 권위를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을 드러내 보이시려고 합니다. 


* 예수님의 권위 : 직접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온 것 

* 예수님의 가르침 :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을 드러냄 


율법 학자들이 율법에 얽매여 있었지만 율법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거는 마르코에는 없고 마태오에서 그런 표현을 쓰시는데 마르코에서는 그런 표현 대신 그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행동, 가르침을 전해 듣고 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다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 예수님의 율법을 완성하시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지니는 그 강력한 권위, 강력한 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놀라운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준 직후에 물론 구체적인 내용을 마르코가 전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내용인데, 구체적으로 그 반응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데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 놀라움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 '더러운 영' : 마귀를 가리킴 

 

여기서 더러운 영은 마귀를 가리키는데 흔히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거룩함에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더러운 영은 비명을 지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14) 이 표현은 사실 성경에서 좀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1열왕 17,18의 엘리야의 기적 중에 사렙타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는 기적이 있는데, 이때 그 과부가 엘리야에게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1열왕 17,18)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이게 사실 마르코 복음서에서 "나자렛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같은 표현입니다. 단 같지만 자기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남의 간섭을 배척하거나 다른 이와의 관계 자체를 부정할 때 쓰는 것입니다. 


여하간 지금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거룩한 현존, 권위 앞에 쩔쩔매면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면서 예수님께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인간에 대한 자기의 권능이 끝에 다라랐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마르 1,24) ⇒ 인간에 대한 자기의 권능이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음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 악마도 영이기에 그래서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지요. 그거는 우리가 인정을 해야 됩니다. 영적인 존재는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시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시작되었던 예수님과 사탄의 대결을 지난 시간에 보았는데,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직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물론 그 내용을 아주 짧게 두 구절로 전해 주었습니다. 마태오나 루카처럼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마르코에는 없고 다만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고 천사가 시중을 들었다라고 간단하게 표현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세례 후에 처음 하신 일이 결국 사탄과의  싸움이었거든요. 그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 세상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시작되었음을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기셨다,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것으로 마르코는 짧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카파르나움 회당의 장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마가 쩔쩔매고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을 내려서 악마를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그러기에 이 더러운 영들의 이 돌발 행동은 아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로 바뀌어서 그들의 세상이 끝났다, 쫓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악마라는 존재는 그냥 쉽게 물러서지 않고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고 떠납니다. 


악한 영들은 자신들의 존가 위태로운 그런 위협을 느꼈던 것이고 그러면서 예수님께 최후 항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우선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정체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표현은 그냥 우리가 어디 동네 누구.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고 평범한 것입니다. 보통의 차원도 생각해 봐야 될 문제이지만 일단 더러운 영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악하지만 영적인 존재이니 사람 이름 정도는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표현이 중요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들린 사람과 만난 것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은 오로지 악령만이 예수님의 권능과 그분의 정체를 즉시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일단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아주 분명한 인식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힙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또는 마르코 복음서를 처음 읽었던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다 아시잖아요. 마르코 복음 1,1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라고 밝혔고 읽어 왔으니까 우리는 알지만, 당시 복음서 상황이 펼쳐지는 그 삶의 자리 안에서의 사람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냥 나자렛 사람 예수 정도만 알지 그분이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왜 그리스도인지는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에 대한 온전한 정체성 파악은 그분을 둘러싼 이들에게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이 표현 자체가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로 연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리자요 유일하게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나눈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대리자, 유일하게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나누신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더러운 영을 꾸짖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이 표현은 '동물에게 재갈을 물리다.'는 표현으로 멍멍하고 짖는 개의 주둥이를 틀어 막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을 지금 복음서에서 마르코가 그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게 번역을 했기 때문에 "조용히 하여라" 하고 점잖게 해서 그렇지 원어를 하자면 심각한 표현입니다. 막말을 하듯이 야단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이 공론화 되는 것, 드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함구령 곧, 메시아 비밀사상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함구령이 처음 드러나는 마르코 복음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함구령을 내리시느냐? 예수님의 정체성, 신원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하신 일, 이 지상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던 일,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 바로 십자가의 조명 아래서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정체성 : 오직 십자가의 조명 아래서만 이해 됨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사람들은 모릅니다. 깨우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깨우쳐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게 더러운 영들의 활동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그냥 떠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심하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고 나갑니다. 악령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최후의 항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 장면 안에서 광야에서 짧게 전해졌던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이 어떻게 승리하셨는가를 지금 이 단락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확장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이렇게 광야에서도 승리하셨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했던 "더 큰 는력을 지니신 분"에 대한 '더 큰 능력'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8) 


마르코는 예수님의 명성이 두루 퍼져 나갔다는 것으로 카파르나움에서의 오전 일과 하나를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구마 기적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바로 그분의 놀라운 행위를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다. 


* 예수님의 권위가 그분의 놀라운 행위를 통해서 증명된 것 



마르코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권위'를 뜻하는 희랍어는 '에스시아'라는 표현인데 이 '에스시아'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처리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적인 자유로 하느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불안도 두려움도 없이 하느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권위라고 하는 것, 권위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지배자가 행사하는 그 권력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권위 : '내적 자유로 하느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 권위 = 지배자가 행사하는 권력 (힘) 


그런 의미 안에서 본다면 이 '도래'라는 말은 누구누구로부터 줬다고 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존재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했을 때 "나는 나다." , "나는 있는 자" , "나는 존재하는 자다." 하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자로부터 나오는 힘 이것이 권위라는 것입니다. 


*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 나는 있는 자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펼치시면서 보여주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의 의미는, 사람은 본래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서 당신 모습대로 만드신 본래의 존재로 돌아가도록 한다는 것, 존재에서 나오는 힘, 존재 자체이신 분이 당신을 닮은 존재가 제자리에 오도록 만든신다는 것이 권위의 참된 의미라는 것인데 이제 사람들이 그 권위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권위를 보고 놀랐다는 반응을 마르코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해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곧 내가 집안에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직장에서 직장 상사로서, 성당에서 봉사자로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의 출발이 예수님이 누구냐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 이 점을 오늘 우리가 카파르나움에서의 가르침과 구마 치유 안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즉, 더러운 영은 그 사람이 해야 할 일, 일상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악령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의 나라의 시작을 이렇게 알려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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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신부, 평화방송 강의, 마르코복음, 카파르나움, 더려운 영, 함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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