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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박병규 신부님 / 제1회 요한 묵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135253 이정임 [rmskfk] 2020-01-12

박병규 신부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회 요한 묵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심판의 예언으로만 알려진 요한 묵시록. 그 안에 하느님이 담아 주신 절절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 냅니다. 요한 묵시록으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 (대구 대교구 구암 성당)와 함께 사랑과 위로의 하느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구 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입니다. 오늘부터 26주간 우리 여러분들과 또 시청자분들과 함께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한 번 배워볼까 합니다. 제가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에서 요한 묵시록, 거기서 어린양을 가지고 박사 논문을 쓰고 왔습니다.


사실 논문 쓴다고 그러면 그 한 주제만 가지고 많이 우리가 연구를 많이 하게 되는데 요한 묵시록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특히 한국에서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이렇게 전반적으로 다 같이 살펴보는 게 조금 많이 부족하다. 이런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저도 한 부분만을 봤기 때문에 저 역시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시청자분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저도 배웠던 것 한번 나눠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떠한 성서, 우리 성경이라고 이름이 바뀌었지요?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처음 시작할 때 네 가지에 대해서 한 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시작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성경을 우리가 어떠한 마음 어떠한 자세로 만나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네 가지에 대해서 한 번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로 제가 석사 논문을 쓸 때 지도 교수 신부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인데 성경은 사랑하는 님의 편지다.


※  성경은 사랑하는 님의 편지다

 

이 표현을 계속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그분은 늘 공부를 하실 때, 처음 하루를 시작하실 때 그날 복음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시작을 하시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공부하기 이전에 이 말씀이 내가 사랑하는 님의 편지로써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편지 한 장 들고 이 글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의미일까라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그런 바보는 없겠지요? 


이 편지의 이 글이 사랑하는 이의 것이라면 그 사랑의 의미를 내가 느끼려고 남한테 안 보이려고 그러지요? 그만큼 내가 살아가면서 이 성경을 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글을 접한다." 그런 느낌으로. 괜히 신부님, 수녀님, 또 공부한 또 다른 우리 신자분들에게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렇게 물어보는 그런 식의 우리 모습은 조금 지양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첫 번째로 내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이것이 우리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생각했던 것이 성경은 결국 거룩한 독서예요.


※ 성경은 거룩한 독서이다.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공부는 성경을 그 사랑하는 님의 편지를 읽기 위한 하나의 보조 수단이죠.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지요. 그래서 예전에 오리게네스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으면 성경을 갖다 버려라."

 

※ 교부 오리게네스 : 성경을 읽고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났으면 성경을 버려라.

 

우리 이거(성경 책) 글자죠? 글자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 글자를 통해서 이 안에 계신, 글자 너머에 계신, 그래서 많은 교부들이 성경을 하느님을 만나가는 과정을 산을 이렇게 넘어가는, 산을 넘어 고개를 또 넘어가면 또 높은 산이 있고, 또 높은 산이 있고 그래서 스캔들 룸이라는 말을 여러분 아시지요? scandal!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래서 힘들더라도 계속 산을 넘고, 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또 넘어서 넘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그게 거룩한 독서지요. 읽고, 묵상하고 그다음에 기도하고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

 

※ 성경을 대하는 자세(거룩한 독서) :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거룩한 독서가 되어야 된다. 하느님을 만나야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세 번째로 근본주의적인 해석을 조금 우리가 조금 조심을 해야 된다


※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주의해야

 

우리가 글자 그대로 방금 제가 말씀드리다시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의미를 살펴야 된다. 그런데 가끔씩 우리 가톨릭 신자분들도 근본주의적인 성서 해석을 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공부를 하다 보면 역사적인 배경지식, 신학적인 지식, "아, 이 성경 말씀이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맞는 말이에요. 옳은 소리예요.


그러나 거기에 너무 빠져 있다 보면,  다른 사람의 묵상이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아, 나 오늘 이런 걸 느꼈어!" 그럴 경우에 "에이, 그런 거 쓸데없고 성경은 역사적으로 이런 거고, 신학적으로는 이런 의미니깐 이 성경 말씀은 이것만이 여야 돼!"라고 말하는 모습. 이것도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입니다.

 

어떠한 것이든 간에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 안에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분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때 가서 제가 생명에 대해서 말씀드릴 거고, 하여튼 말씀은 살아 있어야 됩니다. 현재.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 역사의 지식 속에, 신학적인 지식 속에 가두어 놓는 것. 이것도 분명히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이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네 번째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 어떻게 우리 삶으로 살아야 되지요?


 

 

 ※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 우리 삶으로 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저 자신도 마찬가지고 공부하면서 정말 화가 났던 일은, 매일 한 줄 한 줄 이걸 분석하고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서 제가 성경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책상에서 뭘 하는 것인지? 이게 이렇게 스스로 만족 못 하는 그런 아주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맨날 도서관 책상에 앉아 가지고 내가 뭘 하나? 이런 반성을 할 때가 많았거든요.


우리 신자분들은 이 성경 말씀을 읽고, 우리 모두죠? 여기는 성직자,  평신도 구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을 살아야 된다. 살지 못할 바에야 성경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다. 하느님이 살라고 성경 말씀을 남겨 주셨던 거지 읽고 공부하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자, 이런 네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한 번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 묵시록? 예, 어떻습니까? 처음에 요한 묵시록이라는 단어를 딱 들었을 때. 우리 이렇게 방송한다고 여기 오셔가지고 아, 요한 묵시록 강의가 있으니까 오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어렵다고 느꼈습니다."왜 어려울까요? "내용이 다른 성경과 다르게 난해하게 되어 있고,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게 되어 있어서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얼마 전에도 세상 종말이 온다고 몇 날 며칠에 어떻게 되겠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는데. 뭐 이천년 대희년 때도 그랬었고. 그 무시무시한 장면, 막 이런 것들이 요한 묵시록에 펼쳐지니까. 아, 이게 무슨 의미일까? 무슨 상징일까? 왜 도대체 이런 전쟁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되게 무섭지요? 저 역시 황당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처음에 접할 때.

 

공부하러 가서 기껏 프랑스 말 끝내고 학교 입학을 하니까, 공부를 하면서 논문을 쓸 때쯤 지도 신부님한테 뭘 한다고 할까? 고민을 하다가 요한계 문헌을 해야 되겠다 이러고 있는데, 지도 신부님이 뜬금없이 "요한 묵시록을 하라."라고 … "예, 관심 없습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게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쉽진 않죠? 쉽진 않지마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복음서나 바오로 서간을 좀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마는 지도 교수님이 "나는 거기에는 관심 없다!"

 

그래서 뭐 절충안을 하다가 겨우 뭐 지도 교수님께서 하라고 하셨고, 저도 한 번 제가 모르는 분야 한번 열심히 해보자 싶어서 요한 묵시록을 잡았었는데, 해 보니까 "아, 괜히 했구나!" ^*^ ㅎ~~~ 처음에는. 처음에는 괜히 했구나. 이 많은 것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우리가 강의를 쭉 해 나가다 묵시 문학에 대해서는 한 번 전반적으로 살펴볼 거예요.

 

거기에 보면 묵시 문학이 길게는 400년에 걸쳐서 이 묵시주의가 형성된 이 유다이즘 안에서 그 400년에 걸친 모든 역사와 거기에 대한 상징들 그런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되고, 그뿐만 아니라  구약 처음부터 구약의 모든 것들이 요한 묵시록에 다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성경 학자 중에 뽈보샹이라는 분이 계셔요.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예수회 회원이십니다. 이분이 묵시문학 특히 요한 묵시록을 가지고 텔로스라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모든 것들의 종합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 모든 상징들이 그 안에 다 놓여 저 있다.

 

※ 요한 묵시록은 텔로스, 즉 모든 신학, 상징의 중심이다

 

그래서 아마 성경 공부하시는 분들 가끔씩 이제 "아, 이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보고 싶다고 할 때는 요한 묵시록을 딱 드시면 됩니다. 예, 구약의 전체, 특히 예언서 부분에 있어서 요한 묵시록이 많이 나타나고요. 그리고 그 당시의 어떤 묵시주의가 흘렀던 배경 그 시대적 배경, 그것을 어떻게 여러 다른 상징으로 표현해 냈는가? 그런 것들이 요한 묵시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묵시록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데, 제가 요한 묵시록을 이 한마디로 그냥 강의 26번을 한마디로 딱 표현하자면 기쁨이요, 희망이요, 위로입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것이 왜 위로냐? 뭐 땅의 삼분의 일이 다 죽었다고 그러고, 뭐 대접을 갖다 부을 때마다 나팔을 불 때마다 뭐 결딴나죠? 소위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기쁨, 희망이 될 것이냐? 그건 우리가 상징들을 조금씩 배워 가면서 알게 될 것인데, 왜? 무엇을 희망이냐? 그 중요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 요한 묵시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표현하는 기쁨과 희망과 위로의 책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그 초점으로 요한 묵시록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바라볼 때 처음에 시작이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 묵시 1,1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님에 관해서 뭔가를 설명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악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 여러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왜 펼쳐지는가? 이것이, 이 고통스러운 모습이 왜 펼쳐지는가? 이것도 궁금하시죠? 왜 이런 모습들이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26번을 통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가 방금 말씀드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단어를 가지고 한 번  요한 묵시록 전체에 대해서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 번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제일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책의 제목인 동시에 여기에 모든 것이 녹아져 있습니다. 이 단어부터 한 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봐야 되는 건 '예수 그리스도'는 일단 조금 내려놓고, '계시'도 조금 내려놓고, '의'에 대해서 먼저 문법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면, 보다 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인데 요것이 그리스 말의 문법에 제네티프라는 어떤 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할 때, '무엇무엇의 무엇' 이렇게 번역합니다. 예컨대 여기가 나의 집이다. 그러면 '나의 집' 성경 같은 경우는 '말씀의 책' 이렇게 돼요. 자, 나의 집이라는 것과 말씀의 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비교를 해 볼게요. 나의 집일 때 그 나는 주체죠? 집 주인이지요? 이 집이 내 집이라는 거죠?

 

예, 그런데 말씀의 책이라는 것은 말씀이 주체가 아니라 책 안에  뭐가 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이죠? 이게 분명히 느낌이 약간 다릅니다. 그렇지요? 하나는 주체고 주인이고, 하나는 대상이고 내용이고. 예, 그리스 말도 마찬가지로 이 제네티프라는 용법이 ( )번역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포칼립시스 예수 크리투스'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 크리투스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아까 느낌, 주체이고 대상이고.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체적으로 알려 주시는 계시,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이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체적으로 알려 주는 계시

2)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더 쉽게 얘기해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책이다

 

자, 끝났습니다. 26번이나 해야 될 강의가 이제 끝났습니다. 예수님 아시지요? 모르시는 분 안 계시지요?

모르겠습니다. 여기 시청자분들 중에서 신자 아니신 분들이 또 듣고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알려주신대요. 뭘 알려 주실까?

 

우리는 복음서에 대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정말로 살아 있는 이 살과 피를 가지신 분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래서 가장 큰 표징이 완전한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분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예, 이제 다음에 이 계시라는 단어가 문제입니다. 계시라는 단어가. 그리스 말로 '아포칼립씨스(apokalypsis)'가 되어 있습니다. 요거는 '아포칼립토'에서 왔습니다. '아포'라는 말을 이야기하자면 아포는 뭔가 이렇게 '떨어지다', '벌어지다' 이런 뜻이고 '칼립토'라는 말은 천막입니다. 그럼 천막을 여는 것, 커튼을 여는 것이 계시입니다.

 

※ 아포칼립토(계시) : 떨어지다 + 천막 -> 천막을 열어 젖히다

 

뭐 신비한 거 막~ 우리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 못 하는 거. 뭐 무시무시한 장면 이것을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간단하게 천막을 떡 거둬 주시는데 걷어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고 걷어 보니 안에 뭐가 있다? 예, 예수님이 계시다.

 

※ 아포칼립토(계시) : 떨어지다 + 천막 -> 천막을 열어 젖히다

 

너무나 쉽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1장 1절을 한 번 읽어 보시면,

 

묵시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 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예,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 알리셨습니다. 뭐 하려고? 보여 주시려고 알리셨는데,

 

묵시 1,1: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자, 하느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종에게 또 알려 주셨고, 하느님이 예수님께 알려 주셨고, 예수님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셨고. 그런데 이게 문제가 "알려주셨다"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알려 주셨다'가 똑같이 씁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 알려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셨다. 그런데 이것이 단어가 두 가지로 쓰입니다. 

 

첫 번째 단어인 그리스 말이 우리는 똑같이 번역을 했지마는, 첫 번째 하느님이 그리스도께 알려 주실 때는 그냥 왜 우리가 뭐 어떤 이런 사실을, 사건을 알려 주셨다. 이렇게 어떤 사건을 아예 모르는 것을 알려 주셨다. 곧 그냥 우리가 지식적인 것이나 정보적인 거지요. 정보를 주고받지 않습니까? 그런 개념인데. 첫 번째는 너무 쉽고, 두 번째는 '기호화하다'입니다. 이 '세 메어온'(σημεῖο)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세에 이온(σημεῖον)이 뭐냐? 영어로는 싸인(sign)입니다.

 

※ 세메이온(사인): 기호화

 

우리 뭐 신호등을 보면 빨간 불은 어떻게 하라고요? 서라! 뭐 파란 불은? 가라! 뭐 이런 사인이 있지요? 자, 알려 주신 거는 이것을 그대로 이렇게 하느님이 줄 때는 요거를 표징화, 기호화해 버린 거예요. 단어가 다르게 두 개로 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알려 주셨다'라고 이렇게 하나로만 번역을 했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천막을 떡 걷어 놨는데 인간들이 바라보기에는 어떻게 되어 있다? 상징화, 기호화, 표징화되어 있는 겁니다.

 

자, 빨간 불을 보고 '서라!'라는, '그만 서시오'라는 그런 의미까지 내가 파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럼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상징화, 기호화되어 있으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그 너머에 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 전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예수님께 주신 그 어떤 계시의 본질적인 내용, 그 자체를 우리가 쉽게 얻을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우리 눈에는 표징화되어 있고 상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럼 상징의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 특별히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내용, 아무리 공부해도 결국에는 그것이 상징의 수준이다. 표징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예수님이시지만 그분 위격끼리 주고받는 그 계시의 본질, 본래의 것은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어떤 의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어라 공부를 해도, 우리가 정말 평생을 바쳐서 계속 책상에서 앉아 있어도 결국에는 표징적인 내용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간혹 이런 분들도 계셔요. 공부를 하시다가 "아, 내가 열심히 공부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인 줄 알지요? 결국에는 표징인데. 뒤에 서라라는 의미가 또 있는데. 빨간 불만 계속 닦고, 닦고, 예쁘게 해 놓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공부하면 할수록 그래서 우리가 겸손해져야 되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교만해지는. 제 모습만 봐도 이 분명히 인간을 '한계가 있구나', '부족함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을 오히려 이런 의미에서 배울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알려 주셨는데 그 알려 주신 것을 우리는 기호화해서 우리에게 놓여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알려 주신 것을 우리가 기호화해서 놓여 있다

 

이런 기호화되어 있는 묵시록, 요한 묵시록 전체의 장면들.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잠시 보면 결국에는 구성이 됐는 게 결국에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그런 계시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보통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그 상징들을 처음에는 열어 보이는 순간이 6장부터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구성: 6장부터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을 열어 보임

 

5장에 어린 양이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어린 양인데 나타나셔서 일곱 개의 봉인을 뜯어 가면서 이제 장면을 본격적으로 보여주시지요. 고통부터입니다. 고통. 그런데 매번 일곱 개의 봉인이 끝나고 일곱 개, 뭐 나팔이 끝나고, 일곱 개의 대접이 끝나고 나면 마지막 일곱 번째는 뭐가 있냐 하면? 구원을 외치는 찬미가들이 나와요. 이게 뭐냐? 그 고통을 넘어서 영광, 기쁨으로 이 이야기는 펼쳐 나간다는 것이지요.

 

※ 고통 뒤에 나오는 찬미가의 의미: 고통을 넘어서 영광, 기쁨으로 펼쳐져 나간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첫 번째, 자, 이 고통이 시작해서 영광으로 갈 때에 봉인을 뜯으니 분이 어린 양이시죠? 그것이 다 끝나고 나서 12장부터 뭐가 나오느냐 하면 또 아기가 어떤 여인이 하면서 아이를 낳는데, 용이 막 가서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도 아이로 출발합니다.

 

보통 우리가 아이를 뭐 예수님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데, 5장에 어린 양이 나타나고 12장에 이 아이가 나타나서 이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영광으로 가고, 아이부터 시작해서 악의 세력이 다 무너지고 마지막 19장에 백마 탄 기사 그 승리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둘 다 출발점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아기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어떤 표상으로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첫 번째, 자, 이 고통이 시작해서 영광으로 갈 때에 봉인을 뜯으니 분이 어린 양이시죠? 그것이 다 끝나고 나서 12장부터 뭐가 나오느냐 하면 또 아기가 어떤 여인이 하면서 아이를 낳는데, 용이 막 가서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도 아이로 출발합니다.

 

보통 우리가 아이를 뭐 예수님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데, 5장에 어린 양이 나타나고 12장에 이 아이가 나타나서 이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영광으로 가고, 아이부터 시작해서 악의 세력이 다 무너지고 마지막 19장에 백마 탄 기사 그 승리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둘 다 출발점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아기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어떤 표상으로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다.

 

누구에게 뭘 보여주냐? 괜히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그 피에서 누가 겉옷을 빨아야 되고요, 예수님이신 어린 양이 거기 가시면 거기까지 따라가야 되고요. 그리고 막 6장에 보면 제대 위에 막 영혼들이 외칩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피의 복수를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 묵시 6,10: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막 이런 외침들이 있고. 그리고 더 심지어 저기 13장에 가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끌려갈 사람은 끌려가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의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죽을 사람 죽어라 이건데. 그러한 메시지에 뭘 요구하느냐? 여기에 바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예수님께서는 보여 주셨다 이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임을. 내가 누구? 하느님임을. 하느님이 소위 승리하셨음을 보여 주셨으니까 이제 너희들의 몫이다.

 

※ 묵시 13,10: 사로잡혀 갈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로 죽을 사람은 칼로 죽을 것입니다.

  

너희들 어떻게? 내 길을 보여 줬으니까 너희들 따라올 거냐, 말 거냐? 이 문제를 우리에게 바로 말씀하시고자 요한 묵시록에 그런 예수님이 나타난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런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이 성도들 이런 사람들이 외칩니다. "주 예수여 오소서!"

 

※ 묵시 22,20: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그러니까 뭐 경상도 식으로 하면 "오야, 내 가께!" 근데 이 참 씁쓸하면서도 계속 기다려야 되는 게 "오야, 가께!" 한 게 언젭니까? 거의 이천년에서 지금까지 예, 안 오고 계시죠? 저는 개인적으로 빨리 좀 오셨으면. 제가 예전에 그 어렸을 때 꿈이 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꿈이 예수님 나이에 죽는 거였어요. 우리가 뭐 흔히 알다시피 33세, 보통 요한복음에 따라 이야기하자면 30년 4월 17일에 돌아가셨지 않겠는가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서른세 살에 죽으면 좋겠다 했는데 서른세 살에 제가 어디에 있었느냐? 프랑스 리옹에 있었습니다. 리옹에 있었는데 "아, 올해가 죽을 나이구나!" 제가 그거는 첫 영성체하면서 생각했어요. 예수님 나이에 죽으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삶에 별로 희망이 없는가? 이 신부가 돼가지고 그런 느낌이 좀 그런데. 그렇게 서른세 살이 서른네 살로 가면서 "아, 이게 덤으로 얻은 인생이구나!" 하루하루가 이게 덤인 거예요. 덤.

 

그래서 이제 선물같이 이렇게 살도록 노력은 하는데 세상 살다 보면 또 그게 죄송한 표현입니다마는 아직 어리지마는 호락호락한 게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요? 요한 묵시록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그런 장면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는 승리, 구원 그 개념을 내가 이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가 또 요한 묵시록의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마는 그런 일상의 삶 안에서 이분을 어떻게 받아 모실 것인가? 어떻게 내가 받을 것인가?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게 문제지요."예수님 당신이 한 번 해보세요. 우리 한 번 구원해봐요. 우리 한 번 끌고 가봐요. 우리를 구원에로!" 그러한 생각으로 묵시록을 읽어 나가면 이거는 아주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내가 어떻게 갈 것인가, 내가 예수님의 피 안에서 내가 내 겉옷을 어떻게 빨아서 희게 만들 것인가? 그런 나의 노력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내가 어떻게 갈 것인가?


내가 예수님 피 안에서 내 겉옷을 어떻게 빨아서 희게 만들 것인가? 그런 나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요한  묵시록을 읽는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인생살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하나의 길이죠? 매 순간, 매시간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갈까?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맨날 선택을 해야 되고 결단을 내려야 되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웬만하면 읽지 않는 게 오히려 편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복음서 읽는 것이 "아, 예수님, 이렇게 사셨구나, 이렇게 가르침을 주셨구나!"가 오히려 편한데 요한 묵시록은 처음부터 "나, 부활했다!" 1장 4절부터 나 부활했답니다. 부활했다 자, 어떻게 할래? 이겁니다. 어떻게 할래 너희들은?

 

읽으면서 계속 걱정이에요. "아, 나 세상살이가 좋은데, 세상 것이 좋은데." 그런데 세상에는 죽어라, 거기에서는 죽고 너희들은 내 안에 믿음을 두고 인내를 가져라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아직 안 오신 게 답답한 거죠. 답답한 거. 그런데 나중에 알았는데 33세면요 예수님 시대에는 평균 연령 20대 후반으로 아주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데 서른세 살이면 아주 오래 사셨는. 그래서 그런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늘 반말하셔요.^^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주년 성서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도 존댓말을 쓰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께 존댓말을 쓰고 서로 존댓말을 쓰게 번역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 새로운 성경, 공동 번역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예수님은 늘 반말,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 예수님께 존댓말을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아까 제가 시작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근본주의적인 어떤 관념도 좀 지양해야 될 부분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죄송한 표현입니다마는 싹수가 없는 분은 아니실 거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분명히 정의를 위하신 분이고, 그렇게 막 대하신 분은 절대 아니신 분이시다. 정의 자체이신 분께서. 그래서 우리가 존댓말, 반말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계급적으로 상하를 나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벗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런 평등한 서로가 존중하는 그런 개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고 그런 개념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자, 그래서 우리가 이런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중심의 어떤 전체 흐름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분석도 안 했어요. 이 26번의 강좌 중에 첫 부분은 우리가 계속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이 요한 묵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되느냐는 주제 별로 계속 나갈 예정입니다. 한 중반쯤 지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13장 이렇게 19장 막 읽어 갈 거예요. 읽어가면서 구체적으로 보고, 지금은 전체적으로 관점을 이렇게 크게 보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 중심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구절을 한 번 짧게나마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큰 틀이겠지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뭔가를 주신다는 분. 그런데 아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은 제안해 놓으신 분,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의 그런 문제다. 제안된 요한 묵시록에 소개된, 표현된, 상징화된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봐야 됩니다.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관점을 한 번 다르게 생각해 볼 것이 이것은 제가 박사 논문 쓰면서 지도 교수님께서 늘 제게 말씀하신 부분인데 자, 우리가 미사 중에 보게 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아, 보라는 요즘 새로운 미사 경문에는 빠졌지요? 유학 가기 전에는 "보라"가 있었는데 갔다 오니까 "보라"가 없더라고요. 우리 신자분들이 하도 잘 봐가지고 이제 보라가 필요 없는지 모르지만. ^^ 자, 우리가 예수님 몸을 들고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예,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 요한 1,20: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자, 구원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죠? 주신다, 받는다, 치유를 받는다, 뭔가를 받는다. 

예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는다는 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대목을 잘 한 번 보십시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없애시러 오신. 없애러 오신 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뭔가를 없애러 오신 분. 이거 한 번 묵상을 많이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논문 지도를 받으면서 지도 교수님이 "이거 이상하지 않느냐? 우리는 뭔가 자꾸 준다고 하는데 요한 묵시록의 처음 출발점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알려 주셨고, 그다음에 상징화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 요한에게 이렇게 주셨고. 이 개념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애는 그런 생각을 잘  안 해요. 오히려 우리가 받으려는 것 때문에 자꾸 이것저것을 자꾸 내 앞에 갖다 놓다 보니까 실상 하느님은 저기 계시는데 하느님께 못 나가고 이것 때문에 막혔어요. 성경 공부 등.

 

우리 지식 뭐 좋은 걸 많이 앞에 놓지마는 여기 막혀서 어떤 의미에서 진짜 오늘 내 앞에 오시는 하느님을 못 만날 수 있겠다. 이것을 먼저 걷어내야 됩니다. 걷어내고 무엇을 해야 되는가? 없애면서, 자꾸 없애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창조 설화에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벌거벗고 있었어요. 완전히 옷을 입지 않고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 숨긴단 말이죠. 숨어 있고, 가죽옷을 입게 되고. 이것이 뭐냐? 하느님과 거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나체로 있는 것은 하느님과 거리가 없다. 이제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자꾸 갖다 놓으면서 계속 욕심을 부리고, 어떤 것의 노예가 되면서, 얽매이면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 이것을 없애야 됩니다. 없애는 작업부터 먼저 해야 되고 텍스트를 꼼꼼히 쳐다봐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1장 4절에서 7절까지 먼저 한 번 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어떤 분으로 먼저 소개했는가? 우리가 요한 묵시록 전반에 걸쳐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어떤 예수님인가를 한 번 보면 1장 4절에서 7절까지 보면, 한 번 쭉 읽어 보겠습니다.

 

* 묵시 1,4-5: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자, 요한이 서간문 형식처럼 인사하는 말이 우리 바오로 서간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해 놨는데 지금 우리가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삼위일체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 분" 여기서 번역을 약간만, 약간만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오실 그러면 지금입니까, 미래입니까? 미래 느낌이 들지요? 이것이 우리가 조금 조심해야  될 부분인데.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 오고 계신 분은 지금 현재형입니다. 그리스 말은.

 

※ 묵시 1,4: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지금 오고 계신 분)

 

저 미래에 오실 분이 아니라 지금 늘 오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뭡니까? 임마누엘: 엘(하느님) 이 임마누(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면 예수님 이름.

 

※ 임마누엘 (예수님 이름): 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 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이걸 가지고도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부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 오고 계신 분. 이거 야훼 이름에 야훼를 어떻게 쓰느냐?  ('יהוה') 히브리 말입니다. 히브리 말인데 요거를 알파벳으로 하면( HWHY)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발음을 못해요. 왜? 다 자음입니다. 자음. 모음이 없기 때문에 발음이 안 됩니다. 발음이 안 되니까 여기에다 모음을 갖다 붙여 가지고 겨우 발음하는 게 '아도나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마소라 학자들이 그렇게 바꿔 놨습니다. 보통 우리 수업 시간에 제 강의할 때 이렇게 써 놓으면 그린다고 바쁘신데 그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우리 친구 신부님 중에 이런 말을 하는데 야, 그 강의할 때 이런 거 히브리 말이나 희랍어, 그리스 말 좀 써야 있어 보인다. 좀 써라!" 그러는데 도저히 쓸 자신은 없는데 아무튼 요 단어가 하느님을 일컫는, 가리키는 야훼입니다. 누구 앞에 나타나서 이 말씀을, 이 이름을 주셨습니까? 모세. 모세의 불타는 떨기 앞에 나타나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이 아주 묵상할 게 많습니다.

 

이것이 뜻이 뭐냐? 야훼의 원래 뜻이? 영어에서 그냥 be 동사예요. be 동사. 그러니까 보통 I am으로 하고 나는 뭐 나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 뭐 많은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그 Im 이 다예요. 요 뒤에 나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하느님이지. 자금도 있고,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계속 있고, 뭐 미래에는 말할 것도 없죠? 그런데 I am 요 단어가 현재형으로 번역되는 동시에 또 이것을 미래형으로도 번역을 합니다. "나는 일 것이다" 그래서 굳이 표현을 하자면 I will be입니다. "나는 미래에도  있다."

 

자, 지금 있고, 미래에도 있고, 늘 한결같이 그렇게 있고. 이 부분이 왜 중요한가? 이 부분이 왜 중요하는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 현재의 하느님이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현재의 하느님이신데 그러나 현재의 하느님을 만났다고 해서 그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하느님을 꼭 붙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가끔씩 우리가 어떤 피정이나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했을 때 그 강한 체험을 가지고 늘 생각하는 게 뭐냐?

 

"아, 하느님이 이런 체험을 주셨으니까 이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다." 그러고 일상에 돌아왔어요. 체험을 하고. 그런데 답답하거든요, 뭔가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거든요. 거기서 느꼈던 하느님이 여기 서 있어야 되는데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다시 그 피정 갑니다. 또 거기 갑니다. 쫓아다닙니다. 애가 밥을 굶던지, 집안 청소가 돼 있던지 상관없습니다. 그죠? 그래서 그 쫓아다니면서 그 하느님을... 이거는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 나서는가? 이거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에요. 그때 과거에 있었던.

 

자, 지금 계시고, 미래에도 계실, 늘 계실, 나와 함께 있을 하느님은 지금 현재 일상의 삶 안에서 오는 하느님은 놓쳐 버린 채 과거에 집착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 가서 계약을 받았을 때 밑에서 뭐 했습니까? 황금송아지 만들었지요? 예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그쪽에만 성전이 있으니까 배 아프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뭐 하나 만들어야 된다. 이래가지고 성소를 만들어 갖고 송아지 두 마리 만들어가 그죠?

 

다른 하느님을,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해서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기 위해서 만든 그 상인데,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만든 건데.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 우상숭배. 이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내 체험이 너무 강하면 강할수록 그때 오히려 조심하셔야 됩니다. 떠나야 되지요? 떠나고 늘 나와 함께 있는 지금 현재. 그러나 이것도 부족해요. 왜? 미래에 또 어떻게 다르게 새롭게 다가오실 하느님을 찾아 나서야 됩니다.

 

자,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 오고 계시는 하느님. 이것으로부터 요한 묵시록이 예수님에 대해서 출발한다. 두 번째는 또 앞으로 오실 분 그분의 어좌 앞에 하느님 앞에 계신 일곱 영. 나중에 상징 배울 때 일곱이라는 숫자 배우겠습니다. 7이라는 건 뭘까요? 완전수죠? 왜 완전한가는 좀 놔둬야 저도 나중에 강의할게 있으니까. ^^ 예, 일곱 영, 성령이죠? 성령.

 

자, 하느님 그런 하느님 늘 현재의 하느님 그리고 그 일곱 완전한 충만한 영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오신다. 예수님의 표현들은 지금 많습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님. 요거는 잠시 놔두고, 왜 하느님, 성령부터 먼저 나왔을까?

 

요한 묵시록이 계속 고민하고 제일 지금 머리 아픈 게 이것입니다. 지금 요한 묵시록이 쓰인 90년 이후 100년경에 쓰였거든요. 당시의 최고 문제가 요한 묵시록 이것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이것을 읽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문제가 "나 하느님 믿는데, 한 분이신 하느님 믿는데 유대교 유다인들이 "너는 이단이야!"라고 본격적으로 쳐냈습니다.

 

얌니아 종교회의라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뭘 결정하는냐? 아, 쟤들 가만 보니까 우리 한 종파인 줄 알았는데, 유다교의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니까 한 종파인 줄 알았는데 저것들 희한한 짓을 하는 거예요. 뭣이 사람 같다 놓고 잡아먹는지, 뭐 이렇게 내 몸이라 하고, 그런데 또 하느님 아닌 인간 예수를 뭐 믿는다고 이렇게 이 유다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 너희들 이단이라고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쳐냅니다. 쳐내고 난 후에 뭐까지 만드느냐?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저주 기도문까지 만들어요. 그래가 회당에서 기도하고, 쟤들 하느님 벌 주라고. 그렇게 저주하는 기도문까지 만들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이 저자는 물론 한 사람에 의해서 쓴 건 아니지만 이 유대교에서 믿는 하느님, 유일하신 하느님, 그분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되는 겁니다.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이 유다교에서 믿는 하느님, 유일하신 하느님 그분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요한 묵시록을 보면 어좌 안에 보면 하느님이 계셔요. 어좌 안에 앉으신 분 그 한가운데에 어린 양이 있대요. 가능합니까? 여기 의자에 앉아 계신데 그 한가운데에 또 뭐가 포개져 있는 거예요. 왜 이런 표현을 썼는가? 어좌에 앉으신 분과 이 예수님은 한 분 하느님이시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렇게 하느님과 같이 엮는. 그리고 성령께서도 같이 엮는.

 

예언의 영이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또 나중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과 함께. 그래서 삼위일체이신 분을 우리가 자꾸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성실한 증인, 더 쉽게 얘기해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하느님이 하느님을 증거하는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내가 있고, 뭐 우리가 알아듣기 힘든 표현을 씁니다만 결국 하느님과 나는 하나다라는 게 요한복음에 있지요?

 

두 번째,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 부활하신 그분 하느님이 오셔서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다시 하느님이 부활해서 영원히 살아가신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이 지배자라는 표현이 저는 약간 좀 부담스럽습니다. 이 지배자보다 뭐라고 그럴까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어떤 주권 그런 것을 가지신 분.

 

※ 지배자: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을 가지신 분

 

"지배" 그러면 여러분들 어때요? 막 누르려는, 억압하려는 게 있잖아요?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분께서 지배하시면 좀 그렇지요? 그분의 통치 원리가 세상의 모든 나라에 가득하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 모든 세상을 다스리신다. 바로 그분의 인사를 지금 요한이 전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다. 두 번째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세 번째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이 변해야 된다. 그분의 통치권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된다.

 

※ 요한 묵시록의 예수님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이 변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어떤 요소를 위해서 요한 묵시록은 다 예수님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요한 묵시록 전체는 아까 말씀드렸던 세 가지 그 포인트에 대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제일 중요한 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우리가 상징화해서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우리가 알아 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우리만이 지금 알아들을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이 요한 묵시록이 쓰였져 있었던 공동체에서 널리 선포되었던 내용입니다. 요한 묵시록 1장 3절을 보면요, 어떻게 돼 있냐?

 

※ 묵시 1,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기서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낭독하는 이, 단수.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 복수. 이것이 뭐냐? 요한 묵시록이 몰래 숨어서 마치 이렇게 신비한 내용, 계시 내용을 막 몰래 보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낭독합니다. 공동체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찬미합시다. 찬송가 부르고 막 우리가 다음 시간에 찬송가, 찬미했던 부분을 볼 건데. 그런 것을 막 외치면서 자, 듣고 있는 분, 여러분 공동체 앞에 미사 시간에 독서와 복음 낭독. 예,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 앞에 널리 펴져야 된다. 그래서 일곱 개 교회에 편지 형식으로 우리가 처음에 보게 됩니다. 2장 3장에서. 부활하신 분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읽는 그 말씀을 한 사람이 낭독을 하면 그 말씀을 들은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해야 된다? 지켜야 된다.

 

말씀 자체가 뭡니까? 말씀 지키기가 뭡니까? 보통 그러면 신자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면? "아, 많이 읽고, 묵상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해야죠!"라고 이렇게 하시는데 그거는 정말 지키는 거는 지키죠. 말씀을 옆에 팍 끼고 이렇게 하시는데, 간혹 이렇게 어떤 우리 정치인들이나 다른 어떤 분들 보면 성경을 옆에 이렇게 잘 끼십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의 실천입니다.

 

지키다는 동사는 내가 꼭 붙들고 있다. 말씀의 중요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꼭 품고 있으면서 그 부활을 살아내는, 살아내셔야 됩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읽으시면서 내가 이 부활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품고 그분을 드러낼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깊게 생각을 많이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배워 가면서 그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시면서 요한 묵시록을 쭉 읽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고 다음 시간부터 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좀 알아가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https://cafe.naver.com/withbiblestudy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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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신부님, 요한묵시록해설, 요한묵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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