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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다윗 시리즈 9편 (필요할 때만 찾는 하느님)

135339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0-01-15

다윗은 나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얼굴의 모습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생을 길에 비유할 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이제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3일 후에 자신과 부하들의 가족이 있는 곳에 아말렉족들이 쳐들어와 가족들을 인질로 모조리 끌고 갔던 것입니다. 성읍에 돌아와보니 불타 버리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연실색할 지경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04절 이하를 보면 다윗과 그의 수하 군사들은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울었다고 나옵니다. 폐허가 된 마을을 보니 이젠 다윗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머리로는 어떻게 도저히 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제야 하느님을 찾습니다.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군사들의 마음은 가족이 지금 끌려가 있고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원인을 다윗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돌을 던져 죽이자고 합니다.

 

다윗으로서는 여기까지가 인간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였다고 인식을 했나봅니다. 이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떤 방법도 생각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생각을 했습니다.

 

7절에 보면 다윗은 아히멜렉의 아들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에폿을 나에게 가져오시오.”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에게 가져다주자 다윗은 하느님께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봅니다. 이 의복은 구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볼 때 입는 옷입니다. 이건 무엇을 상징할까요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겠다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자기의 머리로 위기를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뜻을 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답을 주십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의 나약한 모습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실 우리의 신앙여정에는 온갖 일이 벌어지곤합니다. 우린 이때 어떻게 합니까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하는 게 바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처리를 할 땐 하더라도 우선은 어떤 일에 대해 이걸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하느님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한번 헤아려보는 게 이론상 정상이라는 걸 알지만 보통보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이 바로 그 형국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다가 하다가 이젠 방법이 없다고 백기를 드는 그런 상황에 이르자 그제서야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느님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정말 도무지 어떻게 해야 될지 방법이 없을 때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이때라도 하느님을 찾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인간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어머니께서 투병하시는 2년 동안에 한 기도가 아마 제가 평생 동안 할 기도를 그때 다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땐 정말 절박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솔직히 고백하면 그때만큼의 그런 절박한 사정이 없다보니 그때보다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저도 지금 시점에서 제 자신을 돌아다보면 참으로 인간은 가증스럽습니다. 필요하고 아쉬울 때만 찾는 자식이라고 생각을 하니 말입니다. 다윗도 하느님께 뜻을 여쭐 때 사실 아마 속으로는 염치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염치를 따질 사정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으니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지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런 다윗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해결 방안을 일러 주십니다.

 

저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모습을 보면서 하나 생각해볼 만한 논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뭔가를 하려고 했을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다윗에게 그 방도를 좀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왜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방치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닐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처럼 이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하다가 자신의 힘을 벗어나는 영역에 처했을 때 하느님을 찾아와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도록 하는 그런 의미 말입니다. 바로 돌아온 탕자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아버지의 영역을 벗어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이 없어도 될 것 같아 아버지의 품을 벗어났지만 나중에서야 자신이 죽게 될 그런 처지에 놓이니 정신이 차려졌다는 내용을 보면 다윗의 상황과 같지 않습니까

 

그때 아버지도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으신 게 바로 자유의지대로 하도록 하게 한 것일 겁니다. 돌아왔을 때 송아지를 잡고 하실 때 기뻐하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에폿으로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게 마치 아버지의 영역인 품 안에서 이제는 해보겠다는 뜻을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에 자비의 손길을 건네주십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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