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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2: 기리시탄 순교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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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주교 순교 성지 2] 기리시탄 순교제
5. 나가사키 운젠 지옥(雲仙 地獄) 순교터
나가사키현 운젠시 고바마쵸 운젠 지역(長崎県雲仙市小浜町雲仙, 나가사키 공항 또는 JR 나가사키역 버스, 운젠시 또는 시마바라시 택시)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에 위치한 운젠은 사시사철 자연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1627년부터 1632년까지 6년 동안, 에도 막부의 기리시탄 금교령 이후 시마바라번(島原藩)의 영주였던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에 의한 가혹한 폭정이 계속되면서 극심한 기리시탄 박해와 순교가 이어졌다. 특히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47세, 內堀作右衛門)과 그의 가족을 비롯해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기리시탄 신자들이 펄펄 끓는 온천 열탕에 내던져져 순교했다. 이들 중 29명은 2008년 베드로 기베와 187인 순교자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우치보리 사쿠에몬은 시마바라 영주의 가신단에 속하는 무사 출신으로 기리시탄 박해가 심해지는 가운데 서양 선교사를 숨겨주고 선교활동을 돕다가 추방, 투옥, 고문을 당한 집안의 후손이다. 그 자신도 선교사가 없는 시기에 사제를 대신해서 지역의 신자들을 돌보고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도록 지도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 1627년 2월 21일 우치보리의 다섯 살 된 아들을 포함한 신자 37명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배교를 거부한 16명은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받은 후 배에 태워져 엄동설한 아리아케(有明) 바다에 벌거벗긴 채 밧줄에 묶여 여러 차례 바닷속에 던져지면서 배교를 강요하는 잔인한 고문을 견디다가 결국 모두 순교했다. 이 광경을 세 아들의 아버지인 우치보리와 다른 신자 가족들은 지켜봐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이 지난 2월 28일 우치보리 본인과 다른 신자 15명도 함께 체포되어, 역시 손가락을 잘리고 얼굴에 ‘기리시탄(切支丹)’이라고 불로 지져 새기는 형벌을 받았다. 그래도 그들이 배교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운젠 지옥으로 보내졌다. 양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단 채 펄펄 끓는 유황온천 열탕 속에 여러 차례 집어넣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두 순교하기에 이른다. 그 후에도 운젠 지옥에서는 5월 17일에 요아킴 미네스케 다이유(60세, 峰助太夫)를 포함한 신자 10명, 1629년에는 이사벨라로 불리는 조선 여인이 온천 열탕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운젠 지옥의 잔혹한 고문은 나가사키의 치안과 기리시탄 탄압을 지휘한 다케나카 시게요시(竹中重義)에 의해 고안되었고 1632년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이곳 순교터에는 십자가와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6. 나가사키 오무라(大村) 호우코바루(放虎原) 순교터와 스즈타(鈴田) 감옥
❶ 호우코바루(放虎原) 순교터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교와마치(長崎県大村市協和町, JR 오무라역 버스 10분, 나가사키 오무라 IC 10분)
나가사키현 오무라는 전국시대 영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통치한 지역으로, 영주의 개종으로 가신단은 물론 영주민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1582년경 신자가 약 6만 명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금교령이 내려지고 영지를 물려받은 아들 요시아키(喜前)가 불교 일련종(日蓮宗)으로 개종하면서 무자비한 기리시탄 탄압이 본격화됐다. 많은 순교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순교한 장소가 바로 오무라 호우코바루 순교터다. 이곳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일부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일본 205인 복자가 되었다.
205인 복자의 국적을 보면 일본인 153명, 스페인 24명, 포르투갈 5명, 이탈리아 5명, 멕시코 3명,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각 1명인데, 여기에는 최소한 13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다. 호우코바루 순교터에는 조선인 13위 순교 복자를 기리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호우코바루 순교터에서는 크고 작은 순교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기록에 남아있는 큰 순교만 3번 있었다. 첫 번째로 1624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치스코회 루이스 소테로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와 수도사 5명이 화형으로 순교했다. 두 번째로 1630년 토마스 데 라이 가효에(寺井嘉兵衛)를 포함한 7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1658년 이른바 고오리 쿠즈레(郡崩)로 불리는 기리시탄 탄압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건이 있었다.
1657년 고오리 쿠즈레는 대부분 농민인 오무라의 기리시탄 신자 608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일부 배교한 신자들은 석방되었지만 결국 411명이 오무라의 다섯 군데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는데, 그중 가장 많은 131명이 호우코바루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들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20일간이나 큰 길목에 내걸어졌다가, 머리와 몸통을 따로따로 매장했는데 지금도 구비즈카(首塚), 도우즈카(胴塚) 터가 남아있다. 호우코바루 순교터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순교자들이 갇혀 있던 악명 높은 스즈타(鈴田牢) 감옥터도 남아있다. 이 감옥터에도 십자가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❷ 스즈타(鈴田) 감옥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가게히라마치(長崎県大村市陰平町1821番地, JR 오무라역 택시 15분, 나가사키 오무라 IC 20분)
7. 오이타 가츠라기 & 히지마치
❶ 오이타시 기리시탄 순교기념공원
오이타시 가츠라기 미나미하라(大分市葛木南原352, JR 오이타역에서 버스 25분, 순교공원 하차 도보 1분)
붕고 후나이(豊後府内)는 지금의 오이타현으로 전국시대 기리시탄 영주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통치했던 선교의 거점이자 일본의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던 곳이다. 전성기인 1590년대에는 신자 약 3만 명이 있었으며, 1614년에 에도 막부의 금교령으로 기리시탄 탄압이 본격화되자 많은 신자들이 잠복 기리시탄으로 살며 신앙을 유지했다. 특히 가츠라기(葛木)는 오이타 붕고 기리시탄의 중심 지역이다. 하지만 1660년부터 1682년에 걸쳐 오이타 지역에 기리시탄 박해가 일어났고 이를 붕고 구즈레(豊後崩)라고 하는데, 이 시기 오이타 전역에서 1,000명이 넘는 잠복 기리시탄들이 색출되어 배교를 강요당했다. 끝내 배교를 거부하는 신자들은 나가사키와 에도로 이송되어 처형당했다. 특히 가츠라기(葛木)는 에도 시대에 고쿠몬바루(獄門原)라고 불렸던 곳으로, 12세부터 87세까지 92명이 순교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가츠라기에는 기리시탄 순교 위령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❷ 히지마치(日出町) 히지순교공원
오이타현 하야미군 히지마치 도미오카(大分県速見郡日出町豊岡5993-7, JR 도미오카역에서 도보 25분 또는 택시로 5분)
가가야마 한자에몬(加賀山半左衛門)은 히지번(日出藩)의 가신이었으나, 1619년 10월 4살 된 아들 디에고와 함께 순교했다. 가가야마는 금교령 이후 배교를 거듭 거부하다가 결국 가신단에서 추방되었고 끝내 세이바이죠(成敗場)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사형이 집행되는 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죽겠다고 울부짖었다고 전해지며, 결국 한자에몬이 먼저 처형된 후 아들도 참수되었다. 2007년 10월, 가가야마 한자에몬이 시복된 것을 기념하여 오이타 교구는 순교터인 세이바이죠에 인접한 히지(日出)에 순교공원을 조성했다.
8. 센다이 히로세가와(仙台広瀬川) 순교터
센다이시 아오바구 사쿠라가오카 공원(仙台市青葉区桜岡公園, JR 센다이역에서 버스로 10分, 니시공원 앞[西公園前] 하차)
1624년 2월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센다이번(仙台藩)에서도 기리시탄 박해가 시작되어, 예수회 포르투갈 신부 디에고 갈바리오(나가사키 고로에몬, 長崎悟郎衛門)과 사무라이와 농민 신자 8명이 히로세가와에서 순교했다. 히로세가와 순교는 일본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센다이번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와 관련이 있다. 그는 한때 정치적인 야욕으로 서양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보였고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면서, 1613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소테로 신부와 자신의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를 유럽에 사절단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한편, 체포된 갈바리오 신부와 신자들은 ‘기리시탄(切支丹)’이라고 쓰인 표식을 등에 업고, 춥고 눈 쌓인 동북 지방의 여러 마을을 조리돌림 당했다. 그들은 모진 고문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고, 결국 갈바리오 신부와 신자 8명은 센다이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624년 2월 18일, 한겨울의 히로세가와 강물 속 형틀에 발가벗겨진 채 가두어졌다. 혹한의 물고문이 시작되자 3시간 후 2명이 얼어서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일단 감옥에 다시 가뒀다. 그래도 배교를 거부하자 4일 후 다시 추운 강물 속 물고문이 계속되었고 이들은 형틀에 갇혀 버티다가 끝내 모두 순교했다. 갈바리오 신부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자들을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8명 중 성씨가 있는 6명은 사무라이 신분이었고, 성씨가 없는 2명은 농민 신분으로 추정된다.
현재 히로세가와 대교 옆에 위치한 니시 공원에는 센다이 교구에서 세운 ‘기리시탄 순교기념비’가 있는데, 순교비의 중앙에는 갈바리오 신부, 왼쪽에는 사무라이, 오른쪽에는 농민 순교자가 세워져 있다. 매년 2월에는 ‘센다이 기리시탄 순교제’가 열린다.
9. 시즈오카 아베가와(安陪川) 순교터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미로쿠 2번지 일대(静岡県静岡市葵区弥勒2番地, JR 시즈오카역에서 도보 20분)
에도 후다노쓰지 대순교의 중심인물로 소개한 하라 몬도(原主水)는 본래 도쿠가와 막부의 중신으로 가신단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는 막부의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다가, 1615년 얼굴에 십자가 낙인이 찍힌 채, 아베가와 형장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당했다. 요한 도오쥬(道寿) 등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지만, 하라 몬도와 여러 명의 신자는 형장을 도망쳐 연명했다. 하라 몬도는 불구의 몸임에도 선교와 봉사활동에 전념하다가, 1623년 선교사와 신자 50명이 순교한 에도 후다노쓰지 대순교 때 화형으로 순교했다.
시즈오카 아베가와에서는 그 후에도 1624년, 1631년 연이어 기리시탄의 처형이 이어졌다고 전해지는데, 그 인명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정확한 순교 장소도 특정할 수 없지만, 현재 아베가와 철교 부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0. 이치노미야시 잇본마츠즈카(一本松塚) 순교터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미도리(愛知県一宮市緑2-12番地, JR 오와리 이치노미야역[尾張一宮駅]에서 도보 25분)
1631년 오와리번(尾張藩)에서는 57명의 기리시탄이 체포되었다. 그중 잇본마츠즈카(一本松塚)에서는 효에몬(兵右衛門) 등 포교활동에 중심적인 4명의 신자가 화형에 처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부근에 있던 사찰 흑룡사 구석에 불교 형식으로 위장해서 돌로 된 지장(石地蔵)을 세우고, 이들의 영을 추모했다고 한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지장에 물을 붓고 빌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만들어져 내려오고 있다. 다만, 향토사학자들은 돌머리에 물을 붓고 비는 행위는 그리스도교의 세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기리시탄 순교 지장존(地蔵尊)’이 세워져 있다.
이치노미야에는 야츠루기(八剱社) 신사와 후구쥬인(福寿院) 사찰 등에 기리시탄 화형장 순교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고증이 어려운 상황에 있다.(계속)
* 보다 자세한 일본교회 역사 및 문화에 대해서는 필자의 인터넷 카페를 참조 바란다. https://cafe.naver.com/nagasakidiary
1) 나가사키 성지의 ‘겐나 대순교’에 관해서는 본지 2025년 4월호 본 연재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교회와 역사, 2025년 6월호,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0 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