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강론자료

2025-08-10.....연중 제19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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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5-08-10 ㅣ No.2563

                                                           연중 제19주일 (다해)

지혜 18,6-9      히브리 11,1-2.8-19      루카 12,32-48
2025. 8. 10.

주제 : 나는 하느님의 앞에서 온전한 자세를 가질까?

우리의 삶에는 나보다 세상에서 먼저 산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영향을 주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의 삶이 나에게 좋은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다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일에서 보는 좋은 의미를 나의 삶에는 어떻게 드러나게 할 것인지 잘 선택하는 것은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요즘은 아주 쉽게, 100세 시대라는 말을 씁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흔하지 않은 표현이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삶에 관한 시간의 표현이 더 늘어났습니다. 우리가 표현하기는 100세 시대라고 쓰면서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만, 내 힘과 내 정신으로 온전하게 살 기간은 60년이나 70년 정도를 말하면 옳다고 할까요? 어린아이와 청소년 시기에는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하는 시기라고 해서 삶에서 빼야 할 것이고, 노인이 되어서는 나보다 늦게 태어난 자녀의 도움을 입어야 하니, 그 시기도 빼야 한다면, 세상에서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내 힘과 생각대로 살 시간은 세상에서 말하는 시간보다 짧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대하면서 퍼뜩한 생각은 나의 삶은 훗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내 삶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에 관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내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살려면 무엇이 중요한지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신앙인으로서 신앙을 드러낸 사람의 삶을 기록한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가 삶의 본보기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에게 어떤 일을 보였기에 우리는 삶의 본보기라는 표현을 쓰겠습니까? 세상의 나이로 75살이면 아주 많은 나이였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는데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따랐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요즘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확실한 보증을 얻은 것도 아닌데, 그는 어려서부터 살던 고향과 동네를 떠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던 미지(未知)의 장소였던 가나안을 향하여 자기의 고향을 등지고 떠납니다. 세상에서 충실하게 산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자세를 얼마나 인정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무작정 고향을 떠난 것이 아브라함이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일을 체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서, 25년쯤이 지난 후, 그의 삶에 생긴 결과는 두 사람의 부인을 얻었고, 아들을 두 명을 얻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인 일에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후회하는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그렇게 살까요? 세상의 어딘가에는 내가 드러내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 일이기에 아브라함의 행동은 놀라움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일을 쉽게 생각하거나 별로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일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올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연약한 양떼라고 부르시면서, 당신께서 베푸시는 보호를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과연 그 보호를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보호를 베푸시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언을 거두어들이시지 않지만, 인간은 자기의 권리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무더운 여름, 초복과 중복 그리고 말복을 지내고 이제는 가을을 얘기하는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을 대하면서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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