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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이병호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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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1) “내 생애 최고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성경말씀을 외우며 걷는 이병호 주교는 우리는 매일 성경과 대자연이라는 두 개의 성경 속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사진 박원희 기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그저 막 쏟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덕분에 매일매일이 놀라운 나날입니다.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입니다.”
이병호(빈첸시오) 주교님은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온샘이 머무는 곳’을 향해 걷습니다. 1시간40분에서 2시간 남짓,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을 나서 전주천을 거쳐 치명자산성지 근처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춥니다. ‘온샘이 머무는 곳’이라고 새겨진 자그마한 나무 현판이 눈에 띕니다. ‘온샘’은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진 한상렬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병호 주교님의 호(號)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동참하셨던 이현주 목사님이 글씨를 써주셨습니다. 그 글씨를 현판에 새긴 이는 지리산에 계신 한 스님이시고요. ‘각기 다른 믿음의 길을 따라 마음속 깊은 목마름 안고 먼 길을 걸어오신 분들을 여기에서 만남은….’ 이곳에 모인 이들을 향해 이 주교님께서 쓰신 ‘옹달샘’이라는 제목의 글 첫 구절입니다. 뭔가 엄청난 공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 주교님은 ‘온샘’이란 예수님, 우리에게 진짜 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사제관을 나서 걷는 이유는 바로 진짜 샘인 예수님을 향해 걷는 것이라고요. 아참,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곳은 그저 자그마한 농막입니다.
이병호 주교님을 만나뵙기 한주 전엔 엄청난 폭우가 내렸는데도 주교님은 걸으셨다고 합니다. 비옷 하나 걸쳐 입고 말입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걷는 주교님의 모습을 수년째 보는 동네 주민들이 이제 주교님이 지나가는 시간 즈음이면 하나둘 뛰어나와 제발 우산 좀 쓰라고 닦달합니다.
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걷느냐고 여쭸습니다. 걷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매일 두 개의 성경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십니다. 손에 들고 끊임없이 외우는 성경과 대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성경입니다. 아침마다 길을 나서는 이 주교님의 손에는 그날의 복음말씀 등이 프린트된 종이가 있습니다. 걷는 내내 그 성경 말씀을 외우고 또 외웁니다. 마음에 와닿는 묵상과 성찰의 말이 떠오르면 잠시 멈춰서서 휴대폰에 메모를 합니다. 외운다는 것은 어떤 효과,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 주교님께선 성경 말씀을 외우는 것은 그저 뇌에서 기억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씀을 외울 때 그 속에 확 빠져들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사제로 살아온 시간이 오십 년도 훌쩍 넘어섰습니다. 1969년 사제품을 받은 직후 전주 주교좌중앙본당에서 사목했던 시간, 처음으로 본당주임을 맡아 정읍에서 보낸 시간, 프랑스 가톨릭대에서 교의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시간 등 모두가 귀하고 의미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제로서 살아온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시간, 그것은 전주교구장 주교로 헌신해온 27년입니다. “교구장직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사제의 삶을 내려놓은 건 아니죠, 저의 현직은 인보성체수도회 지도신부”라고 소개하는 주교님의 얼굴엔 흡사 하회탈 같은 함박미소가 번집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조건 신부가 돼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성장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신학교 입학시험까지 치려고 나섰지만 당시 교구장이신 김현배(바르톨로메오) 주교님께서 ‘중학교는 졸업하고 신학교에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 말씀을 들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 주교님은 ‘이 세상에 예쁜 여성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 내가 신학교에 갔으면 어쩔 뻔 했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되돌아온 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은 정말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빛을 발할지 모르는 일인가 봅니다. 어느 날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는데 다시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학교 수업도 빼먹고 뒷마당 짚불더미에 숨어서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 책은 「준주성범」이었습니다. 이후 사제 외의 다른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주교님은 강론을 잘하기로도 유명한 분이죠. 하지만 그런 주교님도 강론을 하는 것이 총 맞아 죽는 것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고 합니다. 강론에 대한 부담이 말도 못하게 커서, 치열하게 기도하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야 인마! 내가 너를 보낼 때 내 말을 하라고 보냈지 니 말을 하라고 보냈냐!”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느님 말을 전하면 되는데 내가 왜 고민을 하고 있었지’란 생각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한 것이죠.
이 주교님께선 기도하는 시간을 하느님과 1대1로 ‘맞짱뜨는’ 시간이라고도 하시는데요. 온 일생이 하느님과 씨름해온 시간이라고 하시고요. 무슨 뜻일까요? 다음 호부터 이병호 주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9월 11일,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2) “성경 속에 깊이 잠기면 하느님께서 함께 걸어주십니다”
- 이병호 주교는 매일 아침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산보에 나선다. “걸으면 정신뿐 아니라 몸도 최대로 활기찬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평소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한 짐입니다. 남 보기에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미끄러지듯 가는 것 같은 사람의 삶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어려움이 다 있지요. 제가 주교가 되자마자 맞닥뜨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보통 광신적이라고들 말하는 이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제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는 바람에 어려움이 훨씬 더 복잡해졌지요. 그 일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한때는 전국적으로도 크게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주교님들 중에서도 그 일의 깊은 내막을 아시는 분들이 별로 안 계셨는데, 당시 생존해 계셨던 수원교구의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거기에 관해서 아주 조금만 들으시고도 깜짝 놀라시며, “나는 이렇게 오래 주교 생활을 했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런 일이 다 있었나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즈음 치명자산에 올라가서 유항검님을 비롯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 등 가족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묘 앞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무겁던 어느 날, 거기에 갔더니 초로의 한 자매님이 무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주교라는 체면 때문이었을까? 저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그런 처지에 계속 눌러있으면, 그 스트레스로 적어도 암은 걸려야 맞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에게는 가장 확실한 답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미사에 나오는 성경 대목을 대하고, 토씨 하나까지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 읽고, 여러 번 읽어서 외우고 난 다음에,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계속 묵상하면, 세상에서 벼락천둥이 치고 별 일이 다 일어나도 저는 성경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 몰입해 있어서, 바깥의 일은 떠오르지도 않지요. 그리고 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강론에서 나누면, 생각이 한결 더 선명해지고 저 자신에게도 더 확실한 믿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성경 속으로 깊이 잠기면 “하느님께서 낙원을 열고 함께 걸어주신다”(2008년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문헌 「주님의 말씀」 87항 참조)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체험하게 되지요.
매일 새벽미사를 마치고 아침 산보에 나서서 치명자산을 향해 가서 순교자 묘와 경당을 거쳐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성서사도직 관계 아시아대회 참석차 방콕에 갔다가 다리를 크게 다친 다음부터는, 여정을 바꾸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서 교구가 마련한 토지를 임시 농장으로 쓰고 있는 데까지 갔다 옵니다. 지금은 한 시간 50분에서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데, 이 산보가 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성경이 둘이라는 믿음이 있어왔는데, 하나는 종이에 적혀 있고, 또 하나는 대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 펼쳐있지요. 그러니까 성당 감실과 십자가 앞에서 읽는 하느님 말씀은, 말하자면, 귀로 듣는 것이고, 밖에 나가서 자연 속에 들어가면 그 말씀을 눈으로 보는 셈이지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온몸을 움직여 걷는 것은 각기 특유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인보성체수도회 전주 본원에서 시작해 치명자산 아래를 거쳐 한참을 걸어온 이 주교가 전주교구가 마련한 토지에 세운 임시농장 앞에 서서 새벽부터 되새겨온 성경 구절을 큰 소리로 외우고 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성당에 들어갔을 때나 산보 때 이러 저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대단히 큰 착각 속에 빠질 위험이 크지요.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베드로가 그 황홀경에 계속 눌러앉고 싶어서 한 말을 성경은 기록해 두었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드리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그런 환상을 여지없이 깨어, 온갖 골치 아프고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 세계로 내려가게 하셨지요. 기도와 활동은 날숨과 들숨처럼 번갈아 있어야 둘 다 건강하고 참 의미를 띠지요. 이 중 하나에 고정되면, 영적 생명도 죽을 수밖에 없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산보를 거르지 않으니까, 어떤 분들은 건강을 위해서 그러느냐고 묻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건강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건강요?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건강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런 일에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앞세울 것을 분명히 하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말씀이지요.
아침 산보에서는 성당에서 시작한 성경 묵상을 자연 속에서 계속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건강은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면 건강은 덤으로 오는 것 아닐까요? [가톨릭신문, 2022년 9월 25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3) 성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동반해 주시는 어머니 믿음
- 중학교 졸업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학생이 이병호 주교다. 이병호 주교 제공.
어린 시절에 저는 나바위라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전주교구 나바위본당은 한때 군산, 강경, 논산, 고산,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전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신자 수도 3100여 명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성탄 대축일이 되면, 여러 공소에서 교우들이 갖가지 짐을 이고지고 모여드는 모습이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축일이 되면 큰 무리를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머리 속에는 바로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밤 12시가 되어야 시작되는 성탄 밤미사 전에는, 모여든 신자들을 위해 연극 등 여러 행사를 했는데,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쯤 되던 어느 해에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상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들 가운데 1등 상품은 성경이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제가 1등으로 당첨되어 생애 첫 성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성경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느냐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중학교 1학년 때 소신학교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교구청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 전에 주교님과의 면담이 있었는데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몇 학년이냐?” “중학교 1학년입니다.” “아, 그래? 그러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너라.” 이렇게 해서 시험도 보기 전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한 주일도 못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장가를 안 가고 한 평생을 혼자 살수 있단 말인가! 합격했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 갓난아이 시절 부모님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이병호 주교 제공.
그런데 몸과 마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여서였을까요? 그로부터 일 년도 채 안 된 늦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이기 때문에, 미사는 새벽에 한 번 밖에 없었습니다. 집안 식구가 다 미사에 다녀와서, 그때부터 어머님이 짓기 시작하시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나 일터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지요. 그날도 미사에 다녀와서 기온이 아직도 쌀쌀했기 때문에 아랫목 따뜻한 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구석에 「준주성범」이라는 책 한 권이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료하던 김에 무심코 그 책을 집어 들고 읽었지요. 그런데 몇 쪽도 읽기 전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 영원한 가치, 죽음 후에 나뉘는 운명 등등이 아주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공부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출세 아니라 천하에 없는 일을 이룬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학교에 가는 것처럼 책보를 싸 가지고 부엌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님께는 머리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가을걷이가 끝난 후라 집 뒤쪽에 잔뜩 쌓인 지푸라기 더미의 한 곳을 후비고 들어가 온종일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때의 심경으로는 인생살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대강 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 쯤, 책 보따리를 챙겨 들고 학교에 잘 다녀왔다는 듯이,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머리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님께선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 너 어디 있었는지 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동네 우물을 오가시며 엉성한 울타리 틈으로 저를 보시고도 모른 체하셨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갔다가 밤중에 돌아올 때면 친구의 어머님들은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자녀들을 치마폭에 감싸듯 해서 데리고 가시는데, 저의 어머님께선 저녁밥을 준비해 놓고 바느질을 하며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왜 안 나갔는지 아니?” 알 턱이 없어 그냥 서있는 제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당장 키가 한 자나 크는 것 같았죠…. 학교 간다면서 짚더미 속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저를 보시고도, ‘저 애가 저러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저라면 당장 가서 혼을 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고는 물었을 법 한데, 이도 저도 아니고, 어머님은 그날 저를 끝까지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그날의 그 장면은 지금도 어제같이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지금까지 그 특유의 미소와 함께 제 사제생활을 동반해 주시지요.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2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4) 신학생으로 살며 깊어진 영적 갈증, 신심서적으로 채워
- 이병호 주교 사제서품 소식을 보도한 1969년 12월 21일자 가톨릭시보. 맨 아랫줄 가운데가 이병호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준주성범」을 읽고는 사제의 길을 분명히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런데 그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나니 엉뚱한 생각이 드는군요. 최근에 저는 「20세기 신학 결산 보고서」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의 프랑스어 책을 읽었습니다. 두 권, 총 1585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인데, 20세기에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른 그리스도교 전체에 걸쳐서 신학과 교회생활에 일어난 변화와 동향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가톨릭으로서는 1962~1965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환점으로 하는 동향을 소개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학 각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 열두 분을 소개합니다. 이들 중 반은 개신교, 반은 가톨릭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가톨릭측 신학자로서는 폰 발타사르, 마리 도미니크 셔뉘,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 칼 라너, 에드워드 스킬레벡스 등 공의회 전후시기에 기라성 같이 떠올랐던 분들이지요.
그런데 이분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며 그것이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실제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크게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거기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하나같이 옛날 교부들에게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복음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데레사 자서전이나 「준주성범」을 읽으면서 온 존재 깊이 뚫고 오던 충격이나, 생생한 복음적 삶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신학교의 실상을 체험하며 나름대로 실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집에 와 있던 어느 날, 어머님께 불쑥 한마디 했습니다. “어머니, 나 신학교 그만둘까?” 물으면서도 예상되는 답변이 이미 머릿속에 있었지요. “일단 들어갔으니,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고서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등이었죠. 그런데 제 말이 나가자마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나와라.” 당시에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것은 온 동네 사람들 거의 다가 신자인 나바위의 분위기로서는, 지금이라면 사제품을 받고 나서 그만두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어머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외국에 보내줄게.” 외국은커녕 서울에 보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처지인데도,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때 어머님이 제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셨더라면, 저는 실제로 신학교를 나왔을 것입니다.
- 이병호 주교 사제서품 당시 증명 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렇게 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저는 요즈음 말로, 영적 무미건조나 갈증을 느낄 때마다 「준주성범」이나 소화 데레사 자서전, 그리고 당시에 나와 있던 몇 가지 신심서적을 읽으면서 목마름을 그럭저럭 달랬습니다. 성경 강의에서조차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지요. 성경 과목에서 시험 성적은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당시의 강의 방식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제대로 발견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이런 사정은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화 데레사도 먼저 「준주성범」에 매료되어 그것을 거의 외웠지요. 그래서 아직 법적으로 차지 않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로마에 갔을 때, 교황님 앞에서 「준주성범」을 줄줄 외웠다지요. 그러다가 후에 성경을 발견하고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병상에 누워있던 어느 주일, 문병을 온 원장수녀님께 “오늘 미사에 나온 복음이 무엇이었어요?”하고 물었을 때, “뭐였더라? 아! 그거. 작은 아들이 재산을 몽땅 가지고 도망갔다는….” 그 말을 듣고, 데레사는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하면서 루카복음의 그 대목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다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련장으로서 젊은 수련자들에게 수업을 할 때마다 성경의 말씀이 계속 튀어나왔다지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면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하신 말씀이 연상되지요. “그분은 입만 열면 그리스도가 튀어나온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나 입만 열면 그리스도가 튀어나와야만 그 이름에 걸맞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 공동번역)는 말은 그런 의미이겠지요.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공동번역)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9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5) “성경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시절 강의 중인 이병호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경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신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에 가장 엄한 학칙 가운데 하나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는 학생들이 모두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녁 식사 후에는 학년이나 학급과 상관없이 식당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열두어 명이 한 떼를 이루어 운동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종이 울리면 로사리오 기도를 함께 바치고 성당에 들어가서 마지막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의 공식 일정을 마쳤습니다. 어느 날 저녁때에도 그렇게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산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상 속에서 사제가 되어 있는 저에게 6~7세쯤 되는 소년 하나가 나타나 묻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물론 성경을 다 읽어보셨겠지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였지만 저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는 못 읽어보았지만…”하면서 어린이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물론 읽었지만, 구약성경은 당시 우리를 가르치시던 선종완 신부님과 개신교 측에서 주로 문익환 목사님이 주동이 되어 공동번역이 진행 중이었고, 모세오경과 이사야서를 비롯한 몇몇 대예언서들이 낱권으로 출판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읽었지만, 전체는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때는 개신교에서 나온 성경이나 다른 책을 읽으면 곧바로 지옥에 가는 줄 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나온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이런 사정을 설명해서 이해를 받을 수 있겠지만, 어린이 앞에서는 전혀 말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제인 내가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린이에게 들켜버린 이상, 당장 사제복을 벗어버리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 날 바로 동대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헌책방이 수천 미터나 늘어서 있었고, 거기서 영어성경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가서는 가톨릭 쪽인지 개신교 쪽인지를 식별하기 위해서 맨 뒷장부터 펼쳐보았습니다. ‘imprimatur’라는 라틴어는 가톨릭교회의 출판 허락을 받았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분명히 적혀있는 것만 확인하고는 영어 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그런데 전에도 방학 동안에 읽겠다며 책을 한 보따리 가지고 집으로 갔지만 겨우 한두 권 읽는 정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신을 단단히 묶어둘 규칙을 정했습니다. 대략 계산을 해보니 하루에 35~40쪽을 읽어야 그 방학에 다 읽겠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에 첫째, 매일 40쪽을 읽는다. 둘째,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식으로 재미가 하나도 없는 대목이 나오면 슬슬 건너뛸 것이 분명하므로 반드시 소리 내어 읽는다. 셋째, 영어이므로 어떤 단어의 뜻을 모를 때는 물론이고 발음만 확실치 않아도 반드시 사전을 찾아서 확인한다.
그러고는 며칠 후 방학이 되어 집으로 갔습니다. 그땐 서울에서 강경까지는 기차로 7시간이 걸렸고, 차 안은 마치 피난민을 실은 것처럼 늘 콩나물시루였습니다. 그 시절 방학 때 기차 안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요. 7시간을 꼿꼿이 서거나 옆 의자에 기대어 서 있다가 내릴 때가 되면 발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내린 다음 약 3㎞ 거리에 있는 나바위 집에 도착하면 보통 새벽 2~3시였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치면 마치 남북 이산가족이 만난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지요. 그렇게 가족들과 반가운 인사를 하고 나서, 방 한 켠에 앉아 스스로 약속했던 그날 치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첫날이라고 해서 이러저런 핑계를 대며 내일로 미루면, 내일에는 또 다른 핑계가 생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해 겨울방학에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성경통독이라는 것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고 나니, 성경에서 이 말씀 저 말씀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가 주는 인상이 몽둥이처럼 저를 강하게 때리는 듯했습니다. 집안의 역사로 보자면 5대 선조로부터,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회역사 초창기부터 그리스도 신앙인이었고, 제가 자라난 나바위라는 동네 또한 한두 집을 제외하면 전체 주민이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자타가 공인하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한 줄로 통독하고 나니“수천 년 동안 거대한 강을 이루어 도도하게 흘러서 나에게까지 도달한 그 물 속에 내가 비로소 푸욱 담갔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신앙인이었다는 생각이 큰 착각이었으며, 저는 신앙의 거대한 강물을 언덕에서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절실히 느낀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 먼저 그것을 한 줄로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그때의 체험 때문에, 저는 후에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가서도 신입생들에게 성경이나 신학을 가르치기에 앞서 성경을 읽게 하자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16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6) “말씀 붙들고 울고 웃었던 시간이 사제생활의 전부”
- 이병호 주교는 하느님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서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살아온 하루하루가 사제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제품을 받고 전주교구 중앙주교좌본당 보좌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 몇 년 전, 부제품을 앞두었을 때였습니다. 사제가 되겠다고 긴 세월을 보냈는데, 막상 사제직이 눈앞에 닥치니 정신이 번쩍 들고 겁이 왈칵 났지요.
“사제가 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이 되시는 신자들 앞에서, 인생이 어쩌구 사는 것이 저쩌구 하며 말을 해야 할 게 뻔한데, 삶의 체험이라고는 거의 없이 어떻게 내가 그분들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노동을 하든 뭘 하든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보고 난 다음, 그래도 사제가 될 생각이 남아 있으면 돌아오고, 아니면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옳겠다.”
그래서 교구장님을 만나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주교님이 계시는 전주에까지 가려면 기차로 거의 10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워낙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망설일 겨를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놀랍게도 당시 전주교구장이셨던 한공렬 주교님께서 무슨 일로인지 서울 혜화동 신학교로 오셨습니다. 면담을 요청해서 딴에는 비장한 각오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없었지만, 요즘이라면 이른바 ‘모라또리움’을 신청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분은 다 듣고 나서 껄껄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신부가 되고 나서.”
그래서 신부가 되기는 했는데, 특히 주일이 되면 그 큰 성당에 교우들이 꽉 들어차고, 맨 앞줄에는 예상했던 대로 할아버님 할머님들이 줄줄이 앉아 계셨지요. 잔뜩 긴장해서 준비한 원고를 읽는 식으로 강론을 하고 나서 미사를 마치고 제의방으로 돌아오면, 온몸의 기운이 구멍 난 축구공처럼 완전히 빠져나가고, 저는 제의상에 쓰러지듯 엎어져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심경으로는 차라리 소련(당시에는 펄펄 살아있었으니까)으로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철의 장막’을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고, 그걸 넘다가 전기줄에 감전해 죽든지 총에 맞아 죽겠지만, 적어도 사제로 죽을 수는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제 삶에서 강론이라는 것이 참으로 큰 부담이었습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복음 선포를 위해서이고, 그 쪽을 향해서 십 수 년을 준비한다고 한 사람이, 바로 그 일에 그런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은, 정신 차려 생각하면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 되든 말든 당시 제 심경이 그랬던 것은 사실입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강론에 대한 부담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고, 특히 본당의 연세가 높으신 회장님들께서 어떤 때 강론이 감동적이었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시기도 하셨지만, 강론은 오랫동안 저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번개처럼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말씀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야 임마, 내가 너를 보낼 때는 ‘내’ 말을 하라고 보냈지, ‘네’ 말을 하라고 보냈냐?!”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어깻죽지에 날개가 솟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렇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화살처럼 쏘아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을!” 그러고 되돌아 생각해 보니, 하느님 말씀 앞에서 양심이 찔리고 부담이 가고 때때로 정신이 아뜩해 지는 것은 당연하고 다행스럽고 건강한 일이었습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그 대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끼우기 위한 심장수술에 따르는 아픔이기 때문이지요. 아픔뿐 아니라, 정신이 혼란스럽고 세상만사가 뒤죽박죽으로 보일 때, 하느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시 분명해지고, 질서를 회복하고, 축 처졌던 다리에 힘이 생기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먼저 체험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이 상대방에 가서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졌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느끼던 건강치 못한 두려움 대신, 모든 지혜의 시작인 두려움이 들어선 것이지요. 저를 잘 아는 동창 신부님 한 분은 어느 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뀐 것이 아니라 뒤집어졌다.”
그리고 어떤 교우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강론대에 서시면 다른 사람이 되시는 것 같아요.”
정말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스스로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제생활하면서 이룬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서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고민하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가 완전히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지요. 아침 일찍 성당에 들어가 성경을 펴들면, 똑같은 말씀이, 마치 처음 대하는 듯, 전혀 새롭게 보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낡은 것, 의례 그런 것, 판에 박힌 것이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이사 43,19 공동번역)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23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7) “신자들이 말씀속에서 어려움 이겨낼 힘 얻게 하자”
- 이병호 주교가 2009년 6월 꽃동네에서 열린 세계성령대회에서 성경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병호 주교 제공.
교구장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엇보다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분의 기도와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이 히브리서의 한 대목과 함께 크게 밀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히브 12,1) 어렸을 때의 본당 신부님, 수녀님들, 초등학생 때의 담임이셨던 이범욱 선생님이 특히 생각났습니다. 수업 시간에 가끔 세계명작 동화책을 읽어주셔서 폭발적으로 발달해가던 시절 저의 상상력을 한껏 부풀려주신 분입니다. 평소 저의 태도를 눈여겨보셨는지, 한번은 말씀하셨습니다. “병호야, 너는 커서 철학자가 되거라!” 철학자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인생이란…”하는 말로 시작되는 문제를 붙들고 사는 분들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지요. 그 말씀이 마음속에 꽂혔습니다.
중학생 때는 천재라고 알려지셨지만 인간적으로는 따뜻한 구석이 좀 모자라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신자가 되어 나타나셨습니다.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는데, 레지오마리애 회원들이 환자 방문 왔다가 놓고 간 「준주성범」을 읽고 받은 충격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읽고 받았던 충격을 이 선생님도 똑같이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놀랐지요.
이제 시간 여행을 껑충 뛰어 볼까요. 사제가 되고, 첫 본당을 거쳐서, 아주 우연히 광주 신학교 교수 요원으로 선정된 다음 신학교에서 1년 반을 지낸 뒤, 파리로 유학을 갔지요. 거기에서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겸 신학교였던 곳에서 지냈는데, 거기 신부님들의 은혜를 참으로 크게 입었습니다. 저의 개인 생활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정으로, 파리에 있는 한국 신자 공동체를 맡게 된 뒤부터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주일 미사나 예비신자 교육 등 사목에 따른 여러 가지 활동을 위한 공간도 다 제공해 주셨습니다. 특히 6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본부로 발탁되어 가셔서 오랫동안 총무로 계시던 쟝 미셀 퀴니 신부님(1930-2022)께서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시는 분이셨는데, 선교사로서의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중요한 일로 우리 한국 공동체에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본댁에서 의사이셨던 그분 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본댁이나 우리 공동체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쭈어보았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선교사입니다. 아버님께서는 틀림없이 제가 당신의 장례식에 오는 것보다 여기 프랑스에서라도 선교지에서 오신 교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선교사로서의 일을 하는 것을 훨씬 더 원하실 것입니다.”
교구장 시절 이야기요? 눈에 보이는 일을 한 것이 별로 없다고 했었지요. 교구청을 지었지 않았느냐구요? 부지 마련부터 건축비까지 큰돈이 들었는데, 모두 교우들이 어려운 살림에도 감동적으로 마음을 모아서 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새벽 미사 후에 늘 하던 대로 아침 산책길을 걷고 있었는데, 몇 발짝 앞에서 네댓 분의 여성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대화를 듣게 되었지요. 그중 한 분이 개인 병원을 지어야 하는 상황에 있던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일은 잘 진척되고 있어?” 질문을 받은 자매님이 대답했습니다. “우선 교구청부터 지어놓고.” 저는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분들의 대화는 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교우들을 직접 상대하시는 신부님들의 수고는 말할 것도 없지요.
제가 교구장으로서 가장 마음을 기울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모든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 세상 삶에 따른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낙원’(「주님의 말씀」 87항 참조)의 맛을 보고 거기에서 힘을 얻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인들이 실제로도 그분을 세상의 부모처럼 가깝게 느끼며 그분과의 대화인 기도도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나는 자신의 말과 표현으로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을 합하면, 전례 특히 주일 미사에서 성경을 읽는 일부터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는 일까지, 습관적이거나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태도에서 벗어나, 정말로 믿는 사람답게, 생생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에 참여할 때 “마치 국외자나 구경꾼처럼 그냥 끼어 서있지 않고,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속 깊이 이해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건하게, 또 능동적으로”(전례헌장 48항 참조) 사제와 더불어 모두가 함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 대로지요. 실제의 신앙생활이 자칫 기계적이고 수동적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엄청난 보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땅속에 묻혀있어 자신이 무얼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살 수가 있지요.
젊은이들이 성당에서 떠나고 새로 영세한 분들이 쉽게 냉담 교우가 되는 것을 보며 걱정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위 두 가지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인 미사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정말 새로운 힘을 주고 삶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나게 한다면, 우리의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부님들 중에는 이런 일을 아주 잘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 것 또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30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8) “제대로 된 교육과 복음 선포로 주님을 찬미합시다”
- 이병호 주교(맨 왼쪽)와 동기 사제들이 2009년 7월 열린 ‘사랑의 입맞춤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이병호 주교 제공.
공동체가 하느님 말씀 속으로 들어가 새 빛과 새 힘을 받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성가를 부르며 그 기쁨을 나누면, 모두가 한 주간을 생기 있게 살아갈 활력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멀찍이 서서 구경하듯 겨우 참석만 하고 돌아오면, 기름진 음식을 앞에 두고도 스쳐보기만 한 것처럼, 그것은 그림의 떡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제가 교구장 재임 시절 가장 마음을 기울인 일은 모든 교우들이 하느님 말씀의 참맛을 체험하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하느님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저는 교구 내 모든 본당의 전례위원들 교육에서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먼저, 전례에서 성경을 읽는 일부터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 어문(語文) 교육에 문제가 크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말이 어문 교육이지, 실제로는 어(語), 곧 살아있는 말에 관한 교육은 빠지고, 문(文), 곧 종이에 써놓은 깡마른 글만을 가르치고, 그것 하나로 시험도 치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도 살아있는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천만다행히도 제가 대신학생 시절에는 국어 교수님이 특별한 분이셔서 우리에게 놀랍도록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서창제 교수님이셨는데, 원래 개신교 목사님이셨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분으로서 서울대학교를 포함해 여러 대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시고 한글학회 이사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과거에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사목자가 될 우리의 필요에 맞추어 가르쳐주셨습니다. 강의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부터 웅변조였고,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이 이미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발음을 어떻게 하고 훈련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당시 우리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셨던 조영호 선생님이 또 아주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 군에 가셨다가 제대 후에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지금까지도 저에게 생생히 살아 있어서 아침 산보 중에 성경을 외우며 생각에 잠기다가 거기 어울리는 노래가 생각나면 그걸 부르곤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이 온 몸에 퍼지고, 옛날에 동양과 서양에서 음악이 왜 인간의 정신 양성에 유일한 과목이었는지가 절실히 느껴집니다.
주교는 견진은 물론 사목방문을 위해서도 본당에 갈 기회가 많은데, 그 때에는 교구청의 여러 국장 신부님들이 본당 사목회원들과 함께 서류 등을 통해서 점검하시는 동안, 저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본당에서 전례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신자들이 성경 봉독을 참으로 잘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이 복음을 외워서 전하니까, 제가 주례하는 미사에서 성경 봉독을 하시는 교우들도 성경을 외워서 선포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외우기까지 여러 번 읽는 동안, 그 의미가 마음속 깊이에 전달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강약완급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듣는 이들에게 그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지요. 그리고 제가 강론하기 전에 신자들 가운데 한두 분을 초대해서 신앙체험담을 하시게 했습니다. 삶에 따른 비와 바람, 더위와 추위를 맨몸으로 마주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증언하는 동료 신자들의 체험담에서 신앙인들은 저의 강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줄이자면, 신앙인들이 하느님 말씀 속에 들어가 우리와 똑같은 몸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만나게 하자는 것이 저의 주교직 전체의 꿈이자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에 관한 저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결코 끝날 수 없는 이야기의 아쉬움을 느끼며, 여러분께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할 바 없이 더 깊고 넓고 끝장을 볼 때까지 길을 인도해 줄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연학 수사 신부님이 쓰신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입니다. ‘성서와 함께’에서 나온 이 책을 읽으며 저는 혼자서 나름대로 이리저리 모색했던 것들, 말을 하면서도 좀 더 확실한 바탕이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분명히 풀리고 확실해짐을 체험하면서, 우리말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신부님은 젊은 시절에 이미 대단히 멀리 그리고 높게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수도자의 길을 택하셨고, 말씀 자체이신 분 속에 들어가 사심으로써, 내용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쉬우면서도 혼솔이 없는 글로 우리의 참된 길벗이 되어주십니다. 그 길을 잘 따라가면,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온 몸과 마음 그리고 뼛속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그리스어 성경 원문, 이병호 주교 번역)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6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 (9·끝)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 감각으로 함께 걸어갑시다”
- 이병호 주교는 어느 행사장에서든 신자들의 목소리, 그들의 신앙체험에 깊이 공감하며 미소와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이병호 주교 제공.
프랑스 파리 유학 중 쓴 논문 제목은 ‘성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나타나는 공본성적 인식과 그리스도인 삶에서 수행하는 그 역할’이었습니다. 까다로운 주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처음으로 내신 문건 「복음의 기쁨」에 ‘공본성’(共本性·connaturality·나와 상대방이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신앙 감각’, ‘신앙 본능’ 등의 단어를 정식으로 쓰시면서 같은 생각을 표현하셨습니다. 다음 해인 2014년에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에서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라는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일화 하나가 그 내용을 아주 잘 밝혀줍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아주 친근한 사이여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사람 사이에 농담조의 대화가 오갔습니다. “당신은 돼지 같이 보이는 군요.” “임금님은 부처님 같이 보이는 군요.” “나는 당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는데, 당신은 왜 정반대로 말합니까?” “자기 안에 부처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고, 거기 돼지가 있으면 세상 모든 사람이 돼지로 보이는 법입니다.”
머리로 상징되는 지성, 심장으로 상징되는 감성은 작동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짐승은 본능과 감각적 판단으로 살아가는데, 사람도 보고, 듣고, 느끼는 등 5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방식은 짐승과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를 감각인식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늦게 결혼해서 얻은 자기 아들 니코마코스를 훌륭한 사람으로 기르기 위해서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단 한 마디를 모퉁이 돌로 해서 축조된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그가 어떤 질質의 인간인가에 따라서, 그가 좋아하는 것/ 목표가 거기에 따라 (달리) ‘보인다’.” ‘시각’이라는 감각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600여 년 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공본성, 신앙 감각 등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 중요성을 또 한 번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방향의 흐름이 특히 큰 사조를 이루어왔습니다. 그 가장 유명한 예의 하나가 춘추전국시대 막강한 제왕이었던 환공과 당대 노예와 다를 것 없던 신분의 윤편 사이에 오간 대화입니다. 하루는 환공이 고대(高臺)에 앉아 옛 현인들의 어록을 읽고 있었다지요. 마차 바퀴를 만드는 일에 한평생을 바쳐온 윤편이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한 마디 하는 데에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현들의 글이니라.” “그분들이 살아 계신가요?”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지금 임금님께서는 그분들의 찌꺼기나 만지작거리고 계신 거군요.”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네놈이 한 말에 그만한 이유가 있으면 살려두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당장 목을 치리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은 지금 이 나이에 이르도록 평생 바퀴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힘도 딸리고 해서, 생각 같아서는 제 자식놈에게 일을 물려주고 좀 쉬고 싶습니다만, 나무 바퀴를 조금 덜 깎으면 거기에 씌울 쇠바퀴가 들어가지 않고 조금 더 깎으면 헐거워서 곧 빠져나가고 맙니다. 말로 하자면, ‘더도 덜도 말고 정확하게 깎아서 꼭 맞게 만들어라’ 이러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말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익힌 ‘손 감각’으로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자식놈에게도 말로 가르쳐줄 수가 없어, 70이 된 이 나이에도 소인이 직접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냄새’(후각)를 풍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그 냄새를 감지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분의 말씀이나 쓰신 글에서도 사람들은 양 냄새를 느낍니다. 그분이 최고 목자가 되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몇 사람과 가졌던 대담이 「하느님께 활짝 열린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묶여 나오는 과정에, 출판사에서 원고를 검토하던 분이, 처음에는 그저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읽다가, 얼마 못 가서 자기도 모르게 원고지에 흥건히 눈물을 쏟았다고 하지요.
2021년부터 전 세계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 곧 ‘함께 걷는 길’ 과정은 위계질서에 속한 성직자들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교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옛날 모세 시대 때처럼 함께 걸어가면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당연히 수행해야할 인도자, 예언자, 목자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하자는 목표를 걸고 있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윤편처럼 지적으로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가 있을 텐데, 그런 이들이 무슨 근거와 자격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일까요? 그 대답이 참된 신앙인이면 누구에게나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 감각’입니다. 감각이기 때문에 지성과는 대조되면서, 지성적 인식과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지요.
열두 제자들과는 별도로, 장차 하느님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게 될 평신도들의 상징이기도 했던 일흔 두 제자가 아무 장비도 없이 파견되었다가 뜻밖에도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했을 때, 주님께서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 복음서 전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기뻐 뛰시며(exultavit) 말씀하셨지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카 10,21 공동번역)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13일, 정리 주정아 기자] 0 716 1 |